관계의 두께

( 양말 )

by 하하연

“이 책이 너무 두껍거든요. 현대문학 PIN 시리즈는 가벼움을 지향하는 시리즈였는데, 이 책이 다른 책의 두 배쯤 되는 것 같아요.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좋은 소설을 줄일 수도 없고 해명 부탁드립니다.”

윤고은 작가의 ‘도서관 런웨이’ 작품이 출간되면서 황인찬 시인과 북토크 중이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양장 제본으로 같은 사이즈의 책 모양으로, 어떤 독자들은 그 시리즈를 수집하기도 했다. 두꺼운 책이 다른 책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것 같아 황인찬 시인은 농담을 섞어 물었다. 당황할 줄 알았던 윤고은 작가는 재빠르게 답했다.

“서가 분위기를 볼 때, 너무 같은 느낌의 볼륨감의 책들만 가득 차면 인테리어 느낌이 안 살아요. 살짝 비대칭으로 어떤 책은 두꺼워져야 인테리어 효과가 있어요. 독자님들의 서가를 위해 제가 (두껍게) 더 썼습니다.”

독자들의 서가의 분위기를 고려한 것이라고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웃음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방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책들은 각기 다른 볼륨을 가지고 있었다.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는 베개처럼 두꺼웠고 <나는 비비안의 사진기>는 연필 두께였다.


수많은 책처럼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두께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의 단짝 친구는 언제 멀어졌는지도 모르게 시간의 행성 밖으로 사라졌다. 매해 만났던 선생님들과의 인연은 단 1년뿐이었다. 어떤 남자 친구는 6개월을 만났고, 또 다른 남자 친구는 15년을 만났다. 직장동료와의 관계의 두께는 퇴직 전까지였고,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단 몇 정거장 만에 헤어졌다. 거리의 가로수처럼 쉽게 스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이 없었다. 관계 속에서 증발해도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 안에 꾹꾹 눌러 담거나, 비에 젖듯 내가 상대에게 흠뻑 젖어 있을 때는 달랐다. 이별은 마침표가 아닌, 이어가고 싶은 꼬리를 달아 쉼표로 만들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20대의 첫 직장에서 만난 친구는 나의 한쪽 양말 같았다. 꼭 두 쪽이 있어야만 의미 있는 양말처럼 없으면 안 되는 존재였다. 힘든 일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고, 궂은일은 그녀가 함께 나누어 주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같이했다. 서로 직장이 달라졌어도 자주 만났다. 친구가 잠깐 어학연수로 미국을 가게 되었지만 곧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기에 슬프지 않았다. 1, 2년 만의 이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곳에서 남자 친구를 만났고 서울에서 몇 년을 살다가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녀에게 운명 같은 일이 내겐 얄궂은 일이었다. 날마다 보던 사이가 일 년에 한 번도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아니, 몇 년 동안 한 번을 보기 어려워졌다.


다른 이별은 이사를 통해 다가왔다. 결혼 후 타지에서 마음을 주고받으며 5년을 함께 했다. 아이들의 성장을 쭉 함께 지켜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사는 갑자기 관계를 종결시켰다. 한창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조기 종영되는 드라마 같았다. 원치 않은 이별이었다. 또 다른 경우는 잘 지내던 친구와 나눈 말 한마디에 상처가 되어 관계가 끝나기도 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영원할 것 같은 만남에는 끝이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직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떤 사람과의 인연은 금방 끝나 신문기사처럼 얇았고 어떤 사람과는 계절을 거듭하며 만나게 되면서 장편 소설처럼 두께를 더해갔다. 짧게 만났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시집 같은 사람도 있었다. 회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 두꺼웠지만, 사무적인 이야기만 주고받은 사전 같은 사람도 있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과의 두께는 얼마나 될지 모른다. 그 끝을 가늠하는 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치 앞은 모르는 날씨처럼 어떤 환경의 변화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에 현재라는 시간 안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두께를 만들어 나가면 된다. 때론 유머러스하고, 때론 진지하고, 때론 슬픔을 채우며 말이다. 결국, 관계의 두께는 오늘이라는 한 장이 쌓이고, 내일이라는 한 장이 더해져서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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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언박싱 _ 양말 >


귀여운 양말은 눈에 띄지 않던 발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준다.

힐을 신을 때 발뒤꿈치가 까지면 붙였던 대일밴드를 양말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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