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에도 모양이 있다

( 줄리앙 석고상 )

by 하하연

‘쾅’


문이 닫혔다. 그날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날이었다. 고 3, 미대를 가기 위해 실기시험을 보러 가는 날의 아침이었다. 엄마와 다투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왜 싸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구겨진 마음은 생생히 기억난다. 세 개의 학교 중 제일가고 싶은 대학교의 실기시험이었다. 그 순간을 위해 하루에 4-5시간씩 3년 동안 그림을 그렸다. 단 한 번의 기회만 존재했다. 3차의 시험이 있다면 만회할 기회가 있었겠지만 오직 한 번뿐이었다.


어떤 석고상이 나올까?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시험장 교실에 들어서자 보이는 건 줄리앙 석고상이었다. 잘 그려지는 각도와 어려운 각도가 있었지만 고를 수 없었다. 입시 안내원들이 지정한 위치의 이젤 앞에 앉았다. 몸속 내장 기간의 위치들이 느껴질 만큼 쿵쾅거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필통에서 연필을 꺼내 들었다. 일단 밑그림부터 잘 그려야 했다. 그렸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날렵한 코를 중심으로 살짝 보이는 눈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좋은 컨디션으로 시작해도 실력 발휘가 쉽지 않은 날이었다. 오전의 다툼의 여운이 몸에 가라앉아 있다가 팔을 타고 손 끝으로 나오는 듯했다. 줄리앙의 눈은 이상한 곳을 바라보고, 탱탱한 머리 컬도 탄력을 잃은 듯 느슨해졌다.


기분이 또랑에 빠지기 시작하자 실력도 같이 빠졌다.


손을 댈수록 엉뚱한 그림이 되었다.

슥슥슥

연필이 흰 도화지를 빙판 삼아 미끄러져 나가야 하는데 자꾸 멈춰 섰다. 지우고 다시 그릴수록 그림은 탁해졌다. 4시간 곳곳에 얼룩덜룩한 점들이 생겼다. 그동안 수많은 줄리앙을 그렸지만 그날 제출한 그림은 처음 보는 석고상 었다.



기분에도 모양이 있었다.


그날 그린 엉망인 그림이 내 기분이었다. 울퉁불퉁하고 모가 난 기분은 따로 1번 방에 있고, 그림을 그리는 기분은 2번 방에 있지 않았다. 한 방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같은 감정이었어도 작은 일에는 작게 작용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중요한 날에는 작은 감정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나를 잡아 삼켰다. 실력을 판가름 내는 건 기분이었다. 중요한 사실을 중요한 날 알게 되어 속상했지만 어쩌겠는가? 빨리 털어내야 했다.

다행히 2 지망, 3 지망의 실기시험이 남아 있었다. 2 지망에서 최선을 다해야 했다.


물렁거리는 지점토를 주무르듯 기분을 만졌다.
전처럼 기분을 내팽개쳐 두지 않았다.


실기시험을 보러 가는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최대한 말수도 줄이고 작은 마찰도 피해 가려고 조심했다. 친한 친구와 수다를 떨며 긴장을 풀며 실기장으로 향했다. 어려운 자리가 배정되었고, 다른 수험생들과의 간격도 촘촘해서 신경이 쓰였지만 괜찮았다. 기분이 뾰족 거리지도, 오돌토돌하지도 않았다. 매끈하고 동그란 모양이었다. 그 어떤 환경도 좋은 기분 안에서는 다 제어가 되었다. 좋은 기분은 영향력이 컸다. 그래서였을까? 그림을 그리고 나오는 길,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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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언박싱 _ 석고상 미니어처>


어떤 물건은 나를 과거로 데려간다.

엄지손가락만한 줄리앙 석고상을 보았을 때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과 날렵한 콧날을 그대로 재현하느냐가 제일 중요했던 시간이었다.

인간복사기가 되어야 했던 그 시절.

지금은 희미해진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고 싶어 산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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