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소 쇼핑일기
대학교 동아리 모임 뒤풀이 자리였다. 후배가 등장하자 시끄러웠던 공간은 음악을 끈 듯 조용해졌다. 거기에 있던 여자들의 보이지 않는 시선의 실타래가 엉켰다. 서로 그가 어디에 앉을까 궁금해며 기대하는 눈치였다.
“저 옷은 뭐에요?”
“코트인데, 세탁소에서 드라이클리닝을 하고 찾아온 거예요.”
그가 옷을 벽에 걸어두며 말했다.
“집에 갈 때, 잘 챙겨가야겠다.” A가 관심을 보였다.
그가 내 앞에 앉았다. 이상하게 대화 내내 그 옷이 신경 쓰였다. 아니, 신경 쓰였던 건 옷이 아니라 그였다. 그는 동아리 후배였지만, 나보다 두 살이 많았다. 군대를 다녀온 후, 편입해서 대학교에 들어왔다. 나는 4학년이었고, 그는 1학년이었다. 학기 초, 그를 보지도 않았는데 많은 이야기가 내 귀에 들려 왔다.
“캠퍼스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이야.” 후배를 먼저 본 동아리 친구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기대감은 점점 커졌다. 직접 본 순간, 그 말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사람에게 많은 매력이 있지만, 시간이 걸리지 않고 바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큰 키에, 중저음의 목소리, 약간 쳐진 눈꼬리가 선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와 함께 걸어가기만 해도 멋진 옷을 입은 듯, 저절로 어깨가 펴졌다. 사람들의 시선은 늘 그를 향해 있었다.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법. 그는 많은 여자의 마음을 자기도 모르게 빼앗아 갔다. 그런 그와 인연이 된 건, 사 학년 일 학기에 신청한 교양수업이었다. 수업시수를 채우려고 관심도 없는 <독일 사회와 문화> 강의를 신청했다. 수업 첫 날이었다.
“어, 선배?”
그였다.
“이 수업 들어요?”
“네.”
내가 그동안 무슨 덕을 쌓았을까? 그 많은 과목 중 우리 둘이, 이 과목을 선택했다니…. 지금 생각해도 인생의 가장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몇 번의 우연이 겹쳐진 건지…. 그와 월요일마다 시간을 함께할 보낼 수 있었다. 나는 동아리 선배였기에 좋아하는 마음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몇 주가 지났고, 그는 내가 좋아하는 딸기 우유를 월요일 수업 때마다 들고 왔다. 지나간 말을 놓치지 않고 챙겨주는 배려에 내 마음은 쏟아졌고,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아니, 주워 담고 싶지 않았다. 발표수업을 핑계로 우리는 더 자주 만났다. 작은 만남이 이어지고 서로를 알아갈 때쯤이었다.
그는 “선배, 좋아해도 돼요?”라고 수줍게 물어왔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동아리 후배를 사귄다는 소문이 껄끄러워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녔다. 암실은 사진만 인화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인화하는 곳이었다. 공강때면, 그는 나를 빈 강의실로 불렀고, 누가 들어올까 조마조마하며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캠퍼스는 우리를 위한 정원이었고, 맛없는 학식도 그와 있으면 근사한 요리였다. 하늘색, 핑크색 커플티를 맞춰 입으며 길을 걸었다. 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선명한 계절은 희미해졌다. 우리는 서로의 계절이었다.
야작으로 밤새 작업을 하기 위해 미대 건물에 있을 때면 그가 조용히 나를 불러냈다. 내 손을 잡고 기숙사로 올라가는 길, 옆으로 난 작은 길로 안내했다.
“이런 곳이 있었어?”
“내가 찾아냈어. 아무도 없어.”
혼자라면 무서워서 돌아나가는 곳. 그곳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연애에는 지붕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 지붕은 우산뿐이었다. 작은 숲의 커다란 나무들이 벽이었고, 까만 밤하늘이 지붕이었다. 달이 조명처럼 우리를 비췄다. 밀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서로 포개어 한 우산을 썼고, 함께 흑백 사진을 찍으러 다니고, 기숙사 개방의 날 그의 방을 보러 가기도 했다. 그가 내 집에 데려다주었다가 다시 학교로 가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을 낭비했다.
계절의 끝은 없지만, 우리의 계절에는 끝이 있었다. 가을이 시작되면서 매미가 우리의 사랑을 들고 갔다. 그를 잊기 위해 모든 노력을 했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머리를 감다가도 샤워기의 물과 같이 눈물도 쏟아졌다. 화장한 날에도 햇살이 눈에 부셔 울었다. 날마다 그를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더 또렷해졌다.
2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퇴근길 지하철을 탔다. 대학교 홍보를 위한 광고물이 지하철 천장에 쫙 붙어 있었다. 그 안에는 그가 웃고 있었다. 졸업 후 겨우 잊었는데, 이렇게 불쑥 나타나다니…. 가까스로 잊은 그를 퇴근 시간마다 마주해야 했다. 2년 전, 하늘은 나의 사랑을 도왔지만, 지금은 나의 이별을 방해했다.
당도 초과였던 날들. 그를 잊지 못해, 그 맛을 잊지 못해 주머니에 손을 넣어 더듬거렸지만, 사탕은 없었다.
다 먹고 이미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