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대체로 일정한 굵기로 자라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볼륨감 있는 몸매의 나무가 존재한다는 걸 국립세종수목원에서 처음 알았다. <케비아 물병나무>는 항아리처럼 나무 기둥의 중간이 튀어나와 있다. 이 나무는 에콰도르, 페루 등 남미가 원산지이고, 몸통을 가시가 뒤덮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덕구리란>이란 식물은 멕시코 원산의 식물로 사막처럼 물이 부족한 지역에서 주로 자라는데, 나무 기둥 끝부분에 물 저장고가 있어서 땅에 있는 줄기가 크게 부풀린 코끼리 발 모양이다. 식물 아래가 모래 언덕을 쌓은 듯 커다랗고 그 위로 우리가 보던 식물의 원통 모양의 기둥이었다. 빨간색 닭벼슬 모양의 꽃이 피는 <닭벼슬 나무>도 매력적이었다. 국립세종수목원을 구경하는 내내 식물로 세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봄마다 화훼농장을 찾아 여러 식물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국립세종수목원의 식물들은 다양한 기후의 식물들을 모아 놓아서, 대부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수목원 내부는 2층의 산책로도 조성되어 있어서 식물들을 다양한 높이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다 둘러보고 나오니, 전시실 밖에는 식물 상담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최근 산 만냥금의 초록 잎이 노란색 빛으로 변하더니 떨어졌다. 분갈이가 잘못되어 죽어가는 건지, 걱정이었다. 식물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추측할 뿐이었다. 영양제를 꽂고, 바람을 쐬고, 해를 보여주며 정성으로 간호했지만, 그대로였다. 그래서 식물 상담소가 반가워 안에 들어갔는데,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어슬렁거리는데, 자원봉사자 한 분이 다가와 이용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남편은 그분을 붙잡고 만냥금의 증상을 이야기했다.
“식물들이 분갈이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좀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남편이 영양제를 꽂아 두었는데, 괜찮은가요?”
내가 물었다.
남편은 어느 영상에서 분갈이 후 영양제를 꽂아 두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영양제를 줄 때는 식물의 뿌리 가까이에 꽂지 마시고, 뿌리에서 최대한 멀리 놓고 꽂으셔야 해요.”
“그래요? 듬뿍 먹고 잘 자라라고, 뿌리 가까이에 두었는데.”
“사람도 그렇고 식물도 그렇고 너무 사랑하면 안 됩니다.”
너무 사랑하면 안 된다.
식물이든 사람이든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그 존재의 뿌리까지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때로는 멀리서 지켜보다가 슬며시 다가가는 방법도 필요해 보였다. 말 없는 식물의 사랑도 어렵지만 사람 간의 사랑도 어려웠다. 모든 것이 아리송해서 문제였다. 식물과 달리 사람은 말을 할 수 있지만, 마음을 말로 오차없이 표현하는 건 어려웠다. 사람과 식물은 언어가 없어서 오해는 있지만, 갈등은 없었다. 하지만 사람 사이에는 오해와 갈등 모두 다 존재했다.
내가 주는 사랑이 상대에게 어떻게 가 닿는지 알 수 없다. 식물은 떨어지는 잎으로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넘치는 사랑에 사람의 뿌리가 조용히 썩어가기도 한다. 부모님, 부부, 자녀, 회사 동료, 지인들의 관계에서 너무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다.
사랑이 없어서 문제지, 사랑이 많은 건 좋은 것 아니야? 잘못된 방향의 사랑은 무관심보다 더 해롭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그물이 되어 상대가 움직이고자 하는 것을 막는다. 자유를 방해한다. 사랑을 줄 때, 섬세해야 한다. 진한 사랑보다는 연한 사랑을 해야 한다. 식물 뿌리에서 먼 곳에 영양제를 꽂는 것처럼, 스며들 듯 거리를 두고 사랑해야 한다. 계속 가까이 지내지 않아도 상대가 힘겨워할 때를 알아차리고 슬며시 안부를 전해오는 사람. 그들은 너무 사랑하지 않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 아닐까? 그들은 멀리 꽂아 둔 영양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