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한 번도 내 발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없었다. 20대에 다닌 첫 직장에서 내 발음이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없게 뭉개진 어묵 같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대치동의 창의력 학원에서 생각 그리기 선생님으로 일했다. 그 학원은 미술뿐 아니라, 소리 논리(음악), 생각 몸짓(연극)의 수업을 함께 가르쳤다. 주변에 음악을 전공한 친구는 몇 있었지만, 연극영화과 전공의 친구는 없었다. 다니던 학원 본사의 부장님도 연극영화과 출신이었다. 어느 날, 눈도 크고, 카리스마 넘치는 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하연씨는 말을 할 때, 말끝을 흐리는 습관이 있어. 말을 할 때마다 마침표를 찍듯이 끝까지 정확하게 말하려고 노력해 봐.”
25년 넘게 나를 데리고 살았지만 말끝을 흐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스스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중간에 멈춰서는 말을 종착역에 가도록 이끌었다.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뭉개진 발음은 고치지 못했지만, 그때 받은 피드백 덕분에 안 좋은 버릇 하나를 고칠 수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연극영화과에 가서 공부하면 발성뿐 아니라, 몸짓, 사람을 관찰하는 태도까지... 살면서 도움이 되는 점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렀다. 중학생이 된 딸이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드라마를 좋아하는 걸 넘어, 분석하며 보기 시작하더니 꿈의 방향을 찾았다. 궁금한 건 대본집을 사서 읽었다. 대본집에는 드라마에 빠진 앞, 뒤의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아이가 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했던 연극 덕분이었다. 두 번의 무대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다. 늘 큰 역할을 맡지 못해 아쉬워했지만, 작은 배역임에도 다른 반 선생님까지 그 배역을 한 친구가 누구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이는 자시의 꿈을 키워갔다. ‘아이가 연기를 하고 싶다니.’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진로였지만, 내 20대의 경험으로 그 꿈이 반갑기도 했다. 삶은 이렇게 대를 이어 연결되었다.
남편, 아이와 함께 동네의 연기학원 세 곳을 예약하고 상담하러 갔다. 학원마다 특징이 있었다.
A 학원 : 원장님이 예고로 출강을 나가는 분이어서 현재 예고들마다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학원이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원장님이 아닌, 학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우리가 일찍 도착해서 서성이자 로비에 있던 학생들이 앞다투어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묻고, 상담실까지 안내했다. 보통 또래의 친구들이 살갑지 않은데, 친화력이 돋보였다. (다른 B, C 연기의 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상담 중, 원장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보통의 회사원의 경우에는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분들과 잘 지내면 되는데, 연기는 매번 프로젝트가 바뀌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환경이에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예의 바르고 인성이 좋아야 해요. 어느 순간에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어야 하죠. 인사는 기본입니다.” 그 말이 이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기본교육인 것 같았다.
B 학원 : 뮤지컬 배우 출신의 원장이었다. 들어가자마자, 학원도 깔끔하고,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A 학원은 학생들은 친절했지만, 입구의 신발이 널브러져 있고, 어수선했는데 이곳의 공간은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원장님과 상담을 하면서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연기 취미반과 전문가반은 어떻게 다른가요? 취미반은 기본적으로 즐겁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수강생들은 연기에 대해 깊이 고민하거나, 스트레스받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반면 전문가반은 연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 더 깊이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단지 즐거움의 관점으로만 다가가지 않고 분석하고 노력해야 해요.”
원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평소, 아이가 드라마를 보는 태도에 관해서도 물어보고 싶어졌다.
“아이가 드라마를 볼 때 꼭 자막을 틀어놓고 봐요. 자막 없이 전체적인 것들을 보는 것이 좋은 것 같은데, 아이는 배우들의 발음이 들리지 않는다면서 자막으로 내용 하나하나는 다 확인하고 넘어가더라고요. 드라마를 어떤 방식으로 봐야 할까요?”
“일단 드라마를 유희로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대사 하나하나 다 궁금해하지 않아요. 아이는 연기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겁니다. (그렇구나.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다) 그런 자세는 열정적인 거니까 좋아요. (아이를 바라보며) 대사가 다 명확히 잘 들린다고 좋은 연기일까? 배우들이 연기를 할 때, 어떤 대사를 흘린다면 그것도 연기의 한 종류야. 의도해서 한 연기일 수 있어. 꼭 말로만 전달하는 것이 연기가 아니야. 표정, 몸짓, 눈빛, 공백으로도 대사를 전달해.
좋은 드라마란 끝났을 때, 시청자의 마음속에 한 줄로 남는 것이 있거든. 모든 대사가 또렷이 다 잘 들리는 게 좋은 드라마가 아니야. 앞으로 드라마를 볼 때 지금처럼 자막 켜고도 보고, 자막 없이 전체적인 흐름을 보는 것도 필요해.”
확실히 전문가로서 해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연기에 대한 철학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많았다.
C 학원 : 이 학원은 전국에 체인점이 있는 대형학원이었다. 학원의 수업과 예고 입시에 대한 설명을 시스템적으로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보통 상담하는 분 따로, 수업하는 선생님 따로인 경우가 많아서 어떤 선생님이 가르칠지는 알 수 없는데, 상담했던 분이 원장님이 아니라 직접 연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인 것이 장점이었다. 선생님은 대입 입시 9년, 예고 입시 5년의 경험이 있어서 예고에 대한 정보도 풍부했다. 많은 학생이 학원에 다녀서 예고 합격률도 높았다.
“대학을 연기과로 갈 때, 일반고를 다니며 준비하는 것과 예고를 다니며 준비하는 건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첫 번째, 연기과는 무대 경험이 중요해요. 독백 연기를 혼자, 만 번 하는 것보다 한 번 무대에 서는 경험이 더 좋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일반고에서는 할 수 없는 무대 경험을 예고에서는 여러 번 경험할 수 있어요. 두 번째는 같은 꿈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한 공간에 모여 생활하면 시너지가 높아요. 서로를 보고 배우고, 더 열정적으로 임하게 됩니다.” 이 또한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었고, 예고와 일반고 선택에 있어 도움이 되는 답변이었다.
세 학원의 상담을 하면 학원 선택이 쉬운 줄 알았는데, 각각의 특징이 달라서 선택이 더 어려웠다. 나와 남편은 연기의 철학이 있는 B 학원이 좋았는데, 아이는 예고라는 목표가 있어서인지 합격률이 좋은 C 학원을 원했다. 결국 아이가 다니는 학원이기에 딸의 선택을 존중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쉬웠다. B 학원 상담에서 한 대화가 오래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연기의 철학을 먼저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연기학원은 오로지 본인의 의지로 꿈을 이루기 위해 온 학생들이 많았다. 그래서 수학이나 영어학원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유의 활기가 느껴졌다. 이른 나이에 하고 싶은 것을 찾았다는 건, 행운이다. 물론 과정에서 꿈의 변화도 있을 테지만... 살면서 중요한 건 가슴에 별 하나를 품고 사는 일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꿈을 찾지 못하는 경우는 많다) 마음속에 별 하나 있으면 힘든 일이 있을 때 이겨 낼 수도 있고, 별을 닦으려고 날마다 노력하고, 작은 실패와 성취의 경험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꿈(별)을 품으면 삶의 끝에 한 번, 큰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자주 빛날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순간, 순간 빛이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