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의 헤어짐은 아쉬움에 그치지만 좋아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삶을 거꾸로 잡고 흔드는 일이었습니다. 이별 후에야 그 사람이 자리한 깊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별 직후에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그들이 남기고 간 것들을 알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이별한 사람들이 남기고 간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사랑은 책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뭐 해?”
“나 친구랑 야구장 왔어.”
“오빠는?”
“집에서 책 읽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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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해?”
“나 드라마 봐.”
“오빠는?”
“책 읽어.”
대학교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토익점수도 올려야 했고, 인턴 자리도 알아보느라 마음은 편하지 않은 날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1학년이었던 남자친구(1학년이지만 나이는 나보다 2살 많은 오빠. 우리 학교로 편입을 해서 1학년이었다)는 4학년인 나보다 삶을 더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놀고 있다고 말하는 제 모습이 민망했습니다. 그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늘 책을 곁에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독서를 했습니다.
방학,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본가로 내려갔습니다. 그 사이에 생긴 공백을 참지 못해 이별을 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의 연애가 있었지만 나보다 그를 사랑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이별의 원인이 무엇이었을지를 고민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의미 없는 일을 멈출 수 없었죠? 그의 이상형은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여성.’이었습니다. 통화를 하면 저는 늘 놀기에 바빴고, 그는 늘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함께 책을 이야기하는 사이였다면 우리의 사랑이 오래갈 수 있었을까? 후회되었습니다. 그와의 이별 후,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와의 사이에서는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제 삶에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독서를 강조해 왔지만 몇십 년 동안 제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20대 중반, 첫사랑은 제게 독서하는 습관을 남겼습니다. 그 후 책을 좋아하는 남편도 만나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도 책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티백을 꺼내 차를 마시듯 혼자 있는 시간에는 시 한 편을 적기도 했습니다. 그것들이 쌓여 동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모릅니다. 내게 남기도 간 것들을요. 이별은 고통스러웠지만 평생 친구인 책을 만났습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디 첫사랑뿐일까요? 대학원에서 조교로 일할 때였습니다. 옆의 부서인 체육대학원의 조교로 일했던 00은 반듯한 사람이었습니다. 시키는 일이 있으면 실수 없이 깔끔하게 처리했고, 누구에게나 예의 있게 대했습니다. 담당 교수님들에게도 신의를 얻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무실에서는 자기의 이야기를 한다거나 농담을 하지 않고 일만 집중했습니다. 2년을 함께 일했지만, 그가 주말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어떤 꿈을 꾸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조교들 사이에서도 서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사무적인 동료일 뿐이었죠.
회식날이었습니다. 그날의 메뉴는 갈치조림이었습니다. 맛있었지만 다들 뼈가 많은 갈치를 분해하느라 손이 바빴습니다. 회식이었지만 서로 이야기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때 00 조교가 양손에 숟가락을 들고, 갈치를 해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손을 거치면 갈치가 연어스테이크가 된 듯 살코기만 남았습니다.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살만 남은 갈치를 하나씩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갈치는 어려운 수학문제가 아니었구나 깨달았습니다. 몰랐던 갈치공식이 따로 있었습니다. 숟가락 하나로 갈치 몸통을 누르고 한 숟가락으로 잔가시를 뽑아냅니다. 그 과정으로 양쪽 가시를 다 뺀 후에, 가운데 위치한 비교적 큰 뼈 하나를 제거하면 갈치 살만 남았습니다. 현란한 손동작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홀리는 갈치플러팅이었죠.
몇십 년이 흐른 지금 그의 얼굴은 또렷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갈치 살 바르는 방법은 해를 거듭하며 발전하는 저의 특기가 되었습니다. 그 기술을 6학년이 된 딸에게 전수하니, 잘 따라 했습니다. 갈치 가시 제거가 너무 재밌다며, 성취감을 느낀다며 갈치만 구워 달라고 합니다. 동시에 “또래 중 내가 가장 갈치를 잘 바를걸.” 하며 뿌듯해합니다. 00 조교는 갈치 뼈를 바르는 기술을 남기고 스쳐갔습니다.
이별은 아프면서도 아름답습니다. 흔적 없이 증발하지 않고, 어떤 발자국을 남기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자주 이별을 떠올리며, 한 시절을 함께한 사람들의 시간을 펼쳐 읽습니다. 시절인연의 작은 순간이 모여 내가 되었으니까요.
* 기록해 볼까요? 이별이 남긴 것들
여러분의 지금 삶에 준 영향을 준 사람들이 있나요?
이별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기록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