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질긴 인연 2 벨로미
아들 예명은 ‘벨로미’이다. ‘벨로미’는 전국대학뮤지컬페스티벌에 D 대학교가 출품한 뮤지컬 ‘판타스틱스(Fantastics)의 주인공 루이자의 아버지 역할로 출연한 아들 이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소년 마트와 소녀 루이자의 성장소설이다. 막이 오르면 해설자인 ‘엘가로’가 그 유명한 주제곡 ‘Try to Remember’를 부르고 마트와 루이자,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들을 소개한다. 남녀의 사랑을 맺어주려는 양쪽 아버지들은 마당에 울타리(벽)를 설치하고 일부러 청춘 남녀의 사랑을 방해한다. 아버지들은 울타리(벽)를 허물고 교제를 허락하면서 음모를 꾸민다. ‘엘가로’와 그의 배우들인 헨리, ‘머티머’가 ‘루이자’를 겁탈하려는 순간, 마트가 그를 구하게 해 둘 사이를 확고부동하게 연결하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계획이 탄로 나고 달빛 찬란한 환상이 깨진 이 두 사람의 열정은 식어버린다. ‘마트’와 ‘루이자’는 다툼 끝에 마트는 도시로 떠나버리고 사랑을 잃은 ‘루이자’는 가슴앓이를 한다. 시간이 흐르고 방황에 지친 마트와 뒤늦게 진실한 사랑을 깨달은 ‘루이자’와의 재회는 좀 더 성숙한 사랑을 할 그들을 암시하며 막을 내린다. ‘멜로미’는 복학하고 연극에 참여하기 일 년 전부터 혈액암 치료를 받아왔다.
오 년 전 ‘벨로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야기다. 학교에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생활지도 선생님이라고 본인을 밝힌 중년 남자의 점잖은 목소리였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들이 다녔던 유치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단 한 번도 학교에 일부러 찾아가 본적이 없다. 대신 아내가 초등학교 때 봉사활동, 졸업식 등에 참석하곤 했다. 친구 중에 학교 선생이 몇 있다. 요즈음 아이들 때문에 선생 노릇 못하겠다고 불평불만을 서슴없이 말하곤 한다. 수업 시간에 졸고 있는 녀석을 함부로 나무랄 수도 없고, 환장하겠단다. 그래도 좋은 것이 좋다고 그냥 넘어가기 일쑤라며 “요즈음 선생 하기가 힘들다 아이가.” 푸념하는 친구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교권이 붕괴하는 현실에서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학벌 위주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지 않으면 엄청난 사회적 고통은 계속 이어질 것이 뻔하다. 눈만 뜨면 공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공부 외에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또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 전쟁을 한바탕 치러야 한다. 아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인문계에서 예술계로 진로를 바꾸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연극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야!” “끼가 있어야 해!” 하면서 심하게 야단을 쳤다. 예술계통으로 꿈을 키운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노력해도 빛을 볼까 말까 하는데 타고난 끼도 없고,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연극을 하겠다니 기가 막혔다. “여보! 저놈의 자식, 누굴 닮아서 저렇게 고집불통인 게야!” 나는 괜히 애꿎은 아내에게만 화풀이해대고 짜증을 냈다.
예술계통은 수학능력점수보다는 실기 위주로 선발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아들에게 두 손 다 들고 말았다. 진학하기 위해 일 년 동안 두 군데 학원을 보냈다. 한 군데는 수학능력 고사 입시학원이고 또 다른 한 군데는 실기를 대비한 연기학원이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낙방을 통해 뼈아프게 느낀 교훈이다. 마지막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집안의 공기는 냉랭하고 차가웠다. 아들은 자기 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꼼짝도 하지않고, 아내는 아무런 얘기도 없이 슬그머니 집을 나간 지 몇 시간 채 행방불명이었다. 나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라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아들에게 욕을 마구 퍼부었다.
“이놈의 자식! 내 그럴 줄 알았다.” “뭐! 어쩌고 어째, 재수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공장에 취직이나 해!” “고생을 톡톡해 해봐야 정신 차릴 놈이야!” “이 여자는 말도 없이 어디를 갔어? 휴대전화도 안 받고,” 혼자 식식대고 있었는데 현관문이 힘없이 열리더니 아내가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아내는 그래도 묵묵부답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는 마음이 답답하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는데 한참을 가다 보니 소요산이었단다. “이 밤중에 간도 큰 여자로군.”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는 방법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거다. 그러다 보면 그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지혜를 건져내기도 한다. 아들이 대학에 낙방했다고 미워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아들 대학 실패가 어찌 아들 혼자만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며칠이 지나고 아들 진로 문제를 진지하게 논하기 위해서 우리 셋은 동네 음식점을 찾았다. 요 며칠 동안 아들을 너무 심하게 닦달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지나간 일은 모두 잊고 새로 출발해 보자!” 아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자, 묵자!” 한 번만 더 아들에게 진학 기회를 주기로 하였다. 옆집 호태는 원하는 대학에 찰떡같이 붙었다며 호태 아주머니는 좋아서 싱글벙글한다. 호태를 정말 축하해 줘야 하는데 겉으로는 축하하지만, 어찌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로부터 다시 일 년이 눈 깜박할 사이에 훅 하고 지나가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 다시 돌아왔다. 아침 일찍 아들을 태우고 대학수학능력시험 고사장에 도착했다.
“아들! 마음 편히 가지고 시험 잘 봐.” “예! 아버지” 드디어 대학수학능력시험 결과가 나왔다. 아들은 대학 수학능력 점수표를 내밀면서 당당하게 말한다.
“1등급! 잘했지요?” “그래, 아들! 장하다.” 수능점수는 괜찮은데 실기가 걱정이다. 아들 나름대로 열심히 연기 공부를 했다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은 이상 마음 놓을 수 없다. 아들의 연기에 믿음이 가지 않았다. 두 군데는 연기로, 한 곳은 이론연출로 원서를 내고 결과를 기다렸다. 결과를 기다리는 이 시간만큼은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불안했다. 부모 마음이 이러한데 아들은 오죽하겠어, 세 군데 다 합격명단에 아들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실낱같은 한 가닥 희망을 품을 곳은 수능점수만으로 뽑은 이론연출뿐이었다. 적은 인원을 모집하는 데다가 합격 예비대기 번호가 10번에 아들 이름이 올라 있다. 이중합격을 해서 더 좋은 대학으로 이동한 학생이 있다든지 아니면 사정에 의해서 결손이 발생하면 예비순번대로 합격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이 대학의 과거 합격사례를 봐서는 아들이 합격할 확률은 0%도 안 된다. 모든 것을 접고 차선책으로 M 대학 문예창작과에 원서를 제출하고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아들도 별 불만 없이 부모 말에 따랐다. 아들은 불만이 있어도 부모와 한 약속 때문에 자신의 고집을 접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회는 단 한 번이라고 못을 박아 두었기 때문이다. 내 보기에는 아들은 연극보다는 글 쓰는 쪽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 아들은 합격통지를 받고 친척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드렸다. 요즈음은 수험생이 있는 집에 먼저 전화하기가 참 곤란한 추세다. 그래서 시험을 잘 치르고 대학에 합격했는지 궁금해도 꾹 참고 눈치만 보는 일이 허다하다. 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까운 친척 누구도 아들의 합격 여부를 먼저 물어보는 사람이 없다.
“아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잘 되었는지도 모른다.” “알았지!” 아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들과 함께 M 대학에 등록하러 갔다. 등록금을 내고 학교생활 안내서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들은 아직도 연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 표정이 시무룩하다. 저녁을 먹고 난 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아들은 후다닥 거실로 튀어나오면서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른다. “아버지! 엄마! 나, 붙었어요!” “붙었다니? 뭐가 붙어.” “D 대학교 이론연출에 붙었단 말이에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들 방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그리고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예비 10번, 아들 이름이 분명히 있었다. 참 희한한 일도 있네! 추가합격 1, 2번은 몰라도 10번까지 합격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혹시, 학교 측의 실수가 아닌지 불안하다. 전화로 다시 확인해 본 결과 정말 합격이 맞다. 아들은 이렇게 하여 이론연출로 입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