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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ntie J Sep 05. 2019

나도 당신의 보험이고 싶다.

남편은 원래 바깥일을 잘 말하지 않는 스타일의 남자다.

(과묵한 게 좋아 결혼을 결심했는데, 살면 살수록 ‘과묵’ 보단 타고 난 말 주변이 없어 ‘말을 못 하고, 안 했을 뿐’인데 주변의 애정 어린 시선 덕에 과묵하고 점잖아 보이는 캐릭터가 입혀진 게 아닌가 싶다)

 

남편 바깥일의 대부분은 물론 회사 이야기다.

성향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나는 내 인생에 크게 영향을 끼칠 정도가 아니라면 남편 회사 이야기를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간혹 회사에 다리 걸친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나만 모르고 있을 때, 더해서 ‘여차 저차 이런저런 일이 있데요, ….. 그런데 모르셨어요?’라는 뉘앙스의 이야기가 넘어 들어오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나만 몰라’에서 ‘나는 대체 누구랑 살고 있나..’로 감정이 심화, 역류하며 싸움을 걸 기회로 상황은 전개된다. 

그러나 무딘 건지, 도를 통하신 건지 내 남편, 당최 넘어오는 법이 없다.

그리고 자로 잰 듯 한다는 말,

“회사 일? 알아야 머리 아픈 이야기뿐이고, 나만 머리 아프면 될 걸 뭐 하러 너까지 아프게 하냐?”

사근사근하고 달짝지근한 맛도 좋겠지만 묵직한 곰 스타일. 그러니 나를 봐주며 사는 거라..

 

그런데, 이런 남자도 세월 앞에 별 수 없는 건가..

반 백 년 연식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안 하던 행동을 한다.

전에 없이 투덜거리기도 하고(다행이다. 이제라도 본인의 의사를 바로 표현하기 시작했으니) 안 챙기던 건강도 슬그머니 걱정한다. 그리고 가장 달라진 건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거나, 위, 아랫사람들과 문제가 생기면

희미하게라도 질문을 한다.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냐?” 


내가 뭐 그리 대단하고 전문적인 답을 하겠으며 남편 또한 기막힌 해결책을 기대하고 질문을 했겠는가!!

아니란 걸 알지만 나는 어떤 일이든 회사 이야기가 주절주절 나오는 날이면 나름 객관적으로,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대부분 우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다만 측근에게 소리 내어 한번 더 이야기하면서 정리를 하는 과정. 그런 과정이지 싶다.) 


어떤 주제든 처음은 조용조용, 이성과 논리로 무장해 대화가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마무리는 항상 당장 던지고 나올 사표 이야기다. 목에 핏대를 빡 세우고 누구든 당신을 힘들게 하면 사표를 딱 써버리라고! 그리고 휘릭

날려버리고 바로 뒤 돌아보란 듯이 나오라고! 이 즈음이면 곰표 남편이나 다혈질 마누라나 더 말해도 득 될 게 없는 걸 아니 자연스레 대화가 끝난다.


그리고 밤. 잠든 남편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본다.

‘그래, 혼자 조용히 사부작사부작 일해야 하는 사람이었어. 이런 사람이 조직생활을 해야 하다니..’ 

결론은 이거다. 일은 좋지만 조직 생활 때문에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가 싫다는 남편. 


이런 남편이 오조 오억만 번째 지긋지긋한 회식을 마치고 벌건 얼굴로 들어와선 씻지도 않고(세상에서 제일 인정하기 쉬웠다 - 남편이 나보다 깔끔하다) 벌러덩 누워 천장을 또랑또랑 노려보며 이야기한다. 


“그냥 확 그만둘까?” ………………………..” 


“이번엔 어느 집안 손이더냐?!!”


사연은 길지만 과하게 짧은 핵심.

관리자의 성향과 조직 장악의 상관관계. 남

자들만 득실 거리는 조직에서 곰과 양을 반반 섞은 듯한 내 남자가 어떤 고초를 겪을지는 충분히 상상

가능했으나 막상 훅 치고 들어온 ‘나 회사 그만둘까….’..


‘그래. 그만둬!!! 뭘 고민하냐! 인생 한번 살지 두 번 사냐?’ 


………………….. 3년 전. 딱 그때까지만 해도 그럴 수 있었는데….

눈치 하나는 끝장 빠른 아줌마. 목구멍으로 나올락 말락 촐랑거리는 말을 꾹꾹 누르고 꿀물이라도 타야지 하며 주방으로 내뺀다. 


그렇게 다음 날이 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출근해야 하는 아침.

알람이 울리고 어제 아침보다 조금 더 일어나기 힘들어 보이는 남편을 다시 눕힌다.

‘5분만 더 자. 시간 괜찮아!’


한 없이 느긋하게 일자리를 구하며 나는 잊고 있었다. 


남편은 나의 든든한 보험이다. 그런데 나도 남편의 보험일까..


...................... 나도 남편의 든든한 보험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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