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강의 교안을 요구하는 곳이 있어 미리 만들어 둘 작정으로 들른 도서관.
입구에서 누군가 빤히 쳐다본다 싶더니 바로 훅 치고 들어온다.
“이게 누구야? 너 J 지? J 맞지? 나 Y야.”
아! 알지.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모두가 쭈뼛쭈뼛 어설펐던 대학시절. 그러나 그 시절부터 마당발 부문과 오지라퍼 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탑 오브 더 탑, Y! Y였다. 덕분에 미팅과 조인트 엠티는 원 없이 해볼 수 있었지만 나와 다른 부류를 이해하는데 성의가 없던 시절을 보내며 Y와 나는 그다지 각별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나는 대학 동창회에 두 어 번 참석하다가 어쩐지 줄 세우고, 줄 서는 분위기가 싫어 불참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 인연들과 멀어지게 된 지 어언 25년. 그런데 훌쩍 지나간 세월이 Y에겐 잠깐 비켜간 건가, Y의 얼굴은 그다지 변한 것 같지가 않았다.
나: “야, 어떻게 너는 이렇게 안 변했냐. 세월이 곱게 지나간 모양이네! 얼마나 좋아!!”
Y: “(다행, 동감의 웃음이 지나간다) 아휴, 아니야. 화장 지우면 장난 아니야. 그나마 의느님!! 의느님 덕분에 이 정도 유지하고 산다.”
그래, 인상만 안 변했겠어. 거침없는 분위기가 어쩐지 오지라퍼 계의 대모로 등극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 이때 대충 마무리하고 헤어졌어야 할 걸 난 또 자연스럽게 Y를 따라 근처 찻집으로 움직였다.
그럴 줄 알았다.
커피 집으로 이동하는 5분여 동안 Y는 내가 어디에 사는지, 아파트는 몇 평인지, 애는 몇을 나았으며, 대학은 보냈는지, 남편은 뭘 하는지, 우리 동네 통장님보다 더 세밀하고 정확하게 내 신상을 재빨리 털었다. 아! 나도 잽싸게 치고 들어갔어야 하는데.. 어째서 질문에 족족 답이나 하고 있단 말인가!!
커피와 작은 간식거리 정도를 시키고 자리를 잡으려니 본능적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이제 더 이상 털리지 말아야지.
Y: 평일에 도서관 오는 거 보면 너도 일 안 하는구나?
나: 어. 지금은. (그냥 ‘응’ 한마디면 됐을걸)
지금 안 하면 예전엔 했다는 거냐, 여태 뭘 하고 지냈냐, 그럼 곧 뭘 하려고 하느냐.. 물으면 곧이 곧 대로 정확히 빠르게 답을 해야 할 것 같은 이 분위기. 아…. 말리고 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다.
Y는 이 계통에 천부적인 능력 보유자다.
나: 넌 여전하다. 궁금한 게 아직도 많구나…
Y: 오랜만에 만났으니 궁금하지!! 근데 일 하려고? 왜? 일해야 돼?
아… 이럴 줄 알았다. 그런데 주춤 쭈뼛 거리는 나. 그리고 이게 쭈뼛 거리며 답할 사안인가, 뭘 감추고 말고 할 문제도 아니고. 이 나이에 뭔 소문을 겁낼 것이며, 소문이 난다고 얼마큼 날 것이며. 에라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이나 다 하자, 갑자기 대담해졌다.
나: 사지 멀쩡한데 집에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이제 시간이나 돈에 구애받지 않고 누군가를 돕는 일을 좀 하고 싶기도 하고..
Y: 자원봉사하려고?
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 내가 왜, 어떤 일자리를 구하는지, 왜 Y에게 설명을 해야 하나. 그 와중에 내가 어떻게 비칠지 자꾸 신경 쓰이는 건 또 뭔가.)
Y: (내 책을 슬쩍 보면서, 너무나 정직한 책 제목-한국어 문법, 어떻게 가르치는가?) 한국어 가르치려고?
나: (들켰다) 어. 자격증 땄거든.
Y: 너도 땄구나! 주변에 그거 하는 엄마들 진짜 많더라. 근데 그거 거의 자원봉사라던데?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모든 사실을 다시 확인받아 더 힘 빠질 이유가 있나. 어서 빨리 주제를 바꿔야 심기가 편하겠다 싶어 너는 어찌 지내느냐 물으니.. (그래, 궁금하지 않은데 궁금한 척 한 내가 잘못이지.) 잘 나가는 남편에 공부 잘하는 자식에 그래서 아무 걱정 없이 잘 살고 있으며 너무 밋밋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인생, 이젠 취미생활이나 진탕 해봐야겠다 싶어 운동에 전념하고 계신단다. 그래서 3년 전부터 골프를 다시 시작해(원래 30대 중반에 시작했으나 애 키우느라 제대로 못했다를 재차 강조하며) 요즘 골프 치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고.
나: 그랬구나. 마음 편히 잘 살고 있네. 행복해 보여!! 잘 됐네!!
그러니 여기서 그만 해라.. 그만… 도가 지나치고 아니고는 딱 선하나 사이. 그런 거다.
Y는 돈 많이 드는 취미생활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하다가 너도 취미생활을 제대로 해봐라. 그러면 일 구할 생각이 아예 없어진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랑 지내다 보면 일을 구하지 않아도 별 별 재미있는 일이 많은데 애들 예전 학부형, 아니면 동네 사람들과 잘 만나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래, 너 같은 부류들이 있더라. 근데 우리 나이에 너처럼 일 구하러 다닌다 하면 좀 그래 보일 수 있다…
........ 어쩌고, 저쩌고… ……..
좀 그렇다는 의미가 정확히 어떤 건지 캐 물을까 (참는 게 나을까? 낫겠지? 나을 거다!)
잠시 고민하다가 하필 너무 좋은 하늘에, 공기까지 상큼한 오늘, 그럴 필요까지 없겠다 싶어 그냥 마무리를 하자 싶었다.
나: “사람이 얼마나 다양하니. 나도 내가 이런 부류인 줄 몰랐더라고. 그리고 그래 보이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는데.. 이 나이 되니까 어떻게 보이든 말든 별로 신경도 안 쓰여. 그냥 평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찾다가 뭐 그러다 죽을 것 같아.”
고리타분했는지, 더 이상 말 섞어야 듣고 싶은 말을 못 들을 것 같았는지 Y는 ‘참 어렵게 산다, 인생 뭐 없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라..’ 주장을 펼치며 그 근거로 우리 나이에도 갑자기 병을 얻어 고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이미 세상을 버린 동창들 소식을 전했다.
근처 골프용품점을 소개받아 우리 동네에 들렀던 Y는 나를 만난 지 정확히 50분 만에 자리를 정리했는데, 헤어지기 직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소식을 보고하듯 전했고 마지막엔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싶었는지 내 손등에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한 검버섯을 살피며 어서 제거해라, 그대로 두면 나중에 더 빼기 어려워지며, 돈은 돈대로 더 들어간다, 물론 아는 피부과를 소개해 주겠다 의사를 타진했다.
그리곤 관례처럼 본인의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유유히 퇴장.
덕분에 나는 열람실에서 한참 옛 생각이 떠올라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교안 하나라도 만들어보자 정신을 차리려니 이번엔 문득 내가 궁금하다.
나는 정말 취미가 없어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하는 걸까?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무료한 나날을 일을 하면서 보내려고 하는 걸까?
물론 취미가 있으면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는 지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취미를 가져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동네 사람들이나 여러 모임을 갖는 것도 역시 개인 취향 문제 아닌가? 여럿에 속해 부대끼는 것보다 깊이 있게 몇몇과 잘 지내는 것도 역시 개인 취향이고.
그러니 누가 하란다고 할 것 도 아니고, 하지 말란다고 말 것 도 아니고.
그래 보이든 말든, 뭐라 하든 말든……..
아이고! 벌써… 오후 2시다.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어서 교안 하나라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