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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ntie J Oct 21. 2019

적성과 진로 1. – 죽도 밥도 안되면 라면.


 “아직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어요.”

 

중학교 2학년 진로적성 수업을 들으며 밝힌 우리 딸의 입장.

입장 발표 후 2년 뒤, 고1이 된 딸은 대학 입학을 위해 전공 분야를 결정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러니 어떤 공부를 해보고 싶은지, 대학을 졸업하고 어떤 일이 적성에 맞을 것 같은지 두루두루, 총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도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어요.”


“음…. 그럴 수 있지.”


겉으론 담담, 그러나 속에선 화들짝.

다른 건 몰라도 자식 교육만큼은 초지일관 유난 떨지 않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나라의 입시제도 아래에서 매우 힘들지만) 학업성적보다 본인의 적성을 제대로 알게끔 하고, 가슴을 뛰게 하는 그 무엇! 즉, 꿈을 갖게 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교육 포인트였다.)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어 전공을 정하기가 실로 애매하단다.


딸의 설명인즉, 본인은 기막히게 잘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엄청 못하는 것도 없는 실로 평균, 보통, 중간 어디 즈음이며, 슬쩍해보고 싶은 분야는 몇 있지만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무언가 해보고 싶은 분야는 없단다.

더해서 뭐든 하라면 하겠지만 아주 즐거워서 하는 건 아닐 수 있으니 함부로 권하지는 말라고 덧붙인다.


그런데 대학은 왜 가려하냐 물으니 학교, 학원, 친구, 본인이 아는 주변 사람 대부분이 대학은 들어가야 하며, 그래야 먹고 산다는 의견들이 많았고, 잘은 모르겠지만 세상 돌아가는 걸 봐도 대학을 나와야 좀 더 잘 먹고 잘 살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고, 언제까지 엄마 아빠한테 기대 살 수는 없으니 일단 대학엔 들어가야 할 것만

같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여 엄마, 아빠 말씀대로 관심이 있는 분야를 공부해 보기 위해서 대학에 들어가는 것보다, 자기 주변의 친구들처럼 취직이 잘 되거나,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분야, 전공을 선택해 대학에 들어가는 게 더 효율적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본인이 그런 길을 선택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고 했다.


아! 솔직도 한 내 딸!!

이미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어린 나이부터 남다른 두각을 보이며 알아서 척척 자신의 진로를 부모에게 보여주었으면…… 뭐, 더 고마웠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 집 따님은 본인이 처한 현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부모에게 커밍아웃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그런 고민을 나눠 준 딸에게 우선 감사.

거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대학 입학이 목전에 닥쳤을 때, 딸은 아직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겠다며, 자기는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늦돼도 한참 늦된 편인 듯하다며 진로를 척척 잘도 정하는 다른 친구들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결국, 우리는 당시 그나마 가장 지혜롭게 여겨지는 선택으로 대학 진학을 마무리했지만 딸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이 길이 자신과 맞는 길인지, 아닌지, 혹은 등록금을 냈기 때문에 투자 대비 결과를 내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가끔 고민에 빠진다고 했다.

그리고 가끔 이렇게 주저주저하다 혹시라도 나만 뒤쳐지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몰려올 때가 있고, 그걸 극복하는 게 가장 어렵다고 했다.


“까짓, 그 길이 아니면 다른 길로 가면 되지!”


아니면 둘러가고, 둘러가서 늦게 가면 그게 내 속도고, 내가 선택한 길이니 그것 때문에 손해를 좀 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러면서 또 배우는 거니 손해가 아닐 수도 있고..


이 즈음 딸이 절망적으로 답했다.


“엄마, 엄마 말대로라면 플랜 B, C, D, E, F……. 다 괜찮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요즘엔 한 번 둘러 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대요. 그러다가 죽도 밥도 안돼요.”


아!! 여기서 난 그래도 우리 때는 말이다… 라며 칠전팔기에, 전화위복 같은 고리타분한 모험과 도전이 가득했던 그 시절 이야기를 시작할 뻔했다. 그러나 대견하다. 잘 참았다.

어떤 말로도 딸의 불안감을 위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불쑥 한마디는 참지 못했다.


“까짓!! 죽도 밥도 안되면 라면!!!”


피식 웃으며 더 이상 말자는 딸.


늦된 엄마는 딸이 늦되더라도, 그래서 좀 오래 걸리더라도 자기를 잘 알아가는 일만큼은 거르지 않았으면 좋겠어.

둘러간다고 늦는 것도 아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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