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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줄 Apr 04. 2016

4-2. 아름답고 강한 영혼

나단 나는 태양의 냄새, 빛의 알알한 감촉으로 눈을 떴다. 늦었을까 봐 조금 놀랐지만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열한 시를 지난 시각이었다. 아침까지도 뜬눈으로 전전긍긍하다 그 후에 어설프게 잠이 든 탓인지 머리가 띵했다. 

 외출을 앞두고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청바지에 후드티를 걸쳤다. 평상시와 다른 건 혹시나 해서 챙긴 선글라스 정도였다.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서서 나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았다. 

 "괜찮아. 긴장할 것 없어. 다 잘 될 거야."

 밤새 혼돈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던 내가 잠에서 깬 뒤론 나답지 않게 차분한 상태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지금부터 흥분하기 시작했다간 누나를 만나기도 전에 녹초가 되어 버릴 테니까. 

 명동 지하철역에 내린 후 평일 낮 이른 시간의 명동 길을 걸었다. 그나마 덜 북적이는 명동에 와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학교는 어떻게 하고 빠져나온 건지 알 수 없는 중고생들, 두 손 가득 쇼핑백을 든 외국인 관광객들, 한껏 치장한 젊은 여자들이 분주하게 걷고 있었다. 한 매장의 쇼윈도에 눈길을 끄는 옷이 있었지만 발이 들여놓아지지는 않았다. 날이 날인 탓도 있지만 나는 원래 쇼핑 같은 걸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옷이나 신발, 액세서리 등에 잘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대개 단벌신사 신세였지만 다행히 영어학원 선생이라는 직업은 복장에 까다로운 제한이나 지침 같은 게 없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참 편리한 점이다. 

 이제 밥도 먹을 겸 롯데리아로 향했다. 그때 수호로부터 문자가 왔다.

 - 집이냐? 미용실이라도 들러서 꽃단장하고 얼른 누님 만나러 가라.

 새삼스럽지만 그가 날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 미스코리아 나가냐? 미용실은 무슨.

 이렇게 답문을 날렸더니 바로 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 미스코리아 만나고 싶어. 미스코리아 좋아.

 녀석의 엉뚱한 대답이 실소를 짓게 했다. 나는 잘하고 오겠다고 다시 짧은 답장을 썼다.

 햄버거를 다 먹은 후에도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약속 장소에 먼저 가 있을 생각은 없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홀로 앉아 기다리는 중에 마치 형장에서 죽음을 대기하는 사형수처럼 괴로워질까 봐.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부르르 하면서 전화기가 점멸했다. 발신자로 미란이의 이름이 표시됐다.

 "어디에 있어?"

 "나? 근처야. 왜?"

 "응. 언니랑 방금 통화했는데 언니는 도착했대. 그러니까 너도 시간 맞춰 가 봐."

 마침내.

 "그래.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저기, 나는 사정을 잘 모르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냥 다 잘 되면 좋겠어. 잘 만나! 파이팅!"

 밖으로 나오니 아까보다 훨씬 많은 행인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나는 내가 지금 이곳 한국 땅에서 누나를 만나러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명동성당이 시야에 들어오자 드디어 다시 겁이 나기 시작했다.

 "겁내지 마. 네가 겁낼 이유가 없어."

 주문처럼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러나 생각과 현실은 달라서 몸뚱이에 벌써 부들부들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성당 앞에 도착하니 저 아래 약속 장소인 카페가 보였다. 평지라고 해도 무방한 완만한 경사를 올라왔을 뿐인데 내 호흡은 마치 한라산 정상에 오른 사람 같았다.

 결국 이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나는 방금 전까지도 이 사실을 몰랐던 사람처럼 급격히 동요하고 있었다. 카페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서자 심장이 갈비뼈에 금을 낼 것처럼 요동을 쳤다. 혹시나 하고 챙겨 두었던 선글라스를 꺼냈다. 겁에 질린 내 눈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똑바로 누나의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 카페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나는 번지점프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숨을 고르고 또 고른 후 힘껏 문을 잡아당겼다. 시원하게 문은 열었는데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카페 점원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문은 열어놓고 왜 들어오지 않느냐는 눈빛이었다. 그 시선에 당황해 황망히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간신히 고개를 돌려 누나를 닮은 사람을 찾았다. 찾을 필요도 없이 가게에 손님이라곤 한 명밖에 없었다. 제일 구석자리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순간, 이렇게 뛰다간 심장마비라도 일으킬 것 같았던 가슴이 거짓말처럼 뚝 고요해졌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대규모 공습이 지나간 후의 정적 같은 것이 화약 연기처럼 나를 감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뼈대만 남은 건물처럼 을씨년스럽게 서서 시선을 땅에 붙박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비로소 고개를 들었을 때, 거기에 앉아있는 것은 누나였다. 틀림없는 내 누나였다. 옛 모습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누나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이런 얼굴이라면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누나가 살며시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어쩐지 나는 이제 더 떨릴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야, 누나."


수호 회사로 들어서는데 오늘따라 유독 잉크 냄새가 역겨웠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 반이나 지각이었다. 전화로 몸이 아파 늦는다는 핑계를 대긴 했으나, 그 전화부터가 늦은 터라 나는 김 차장에게 불려 가 잠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밖으로 나오니 아깐 안 보이던 박 대리님이 분판용 필름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많이 아프냐? 어디가 아픈 거야?"

 "아프다, 대리님. 너무 아파. 제 영혼이 너무너무 아파요."

 나는 가슴을 움켜쥐며 대리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런 미친. 또 자명종 끄고 늦잠 잤냐?"

 "대리님. 제 영혼이 너무 아파서 좀 더 잤어요. 왜요? 안돼요?"

 "잘 한다. 영혼이 아픈데 아예 결근하지 그랬어?"

 "대리님. 저 수호예요. 내가 없으면 이 놈의 인쇄소가 통 돌아가질 않으니 원. 참, 저 오늘 모처럼 한가한데 밤에 한 잔 어때요?"

 "어이쿠, 그렇게 공사다망하신 분께서 웬일이셔, 황송하게시리. 근데 오늘은 안 돼. 우리 아기 생일이라서 바로 들어가야 돼."

 "이야, 가정적인 모습. 멋져요. 암, 그러셔야지. 그럼 다음에 마셔요."

 그때 불쑥 샤말이 끼어들었다. 비슷한 대화가 샤말과의 사이에서 다시 오갔다. 모처럼 대리님이나 샤말에게 만회할 생각이었지만 샤말도 오늘은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에겐 정기적으로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는데 그게 오늘이었다. 그와 같은 네팔 출신으로 모두 서울에서 일하는 친구들이었다. 일전에 그를 따라가 한번 어울린 적이 있는데 나는 그 자리가 꽤 취향에 맞았다. 그들의 푸짐한 순박함이 각박한 서울 생활로 버석버석해진 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주었다고나 할까.

 "샤말, 다른 날 시간 될 때 알려 줘요. 내가 삼겹살 쏠게."

 "무슨 좋은 일 있어?"

 "아니, 그냥. 뭐 나쁜 일만 없으면 좋은 거 아니겠어요?"

 샤말은 조금 늦게 내 말을 이해하고는 웃었다. 박 대리님이 말 나온 김에 미리 약속을 정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셋 다 글피 밤엔 시간이 비어 있어 그날 술자리를 갖기로 했다. 

 샤말은 이 인쇄소의 유일한 외국인 노동자다.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그 역시 고국의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고 있는데 벌써 이곳 생활이 칠 년째여서 유창하지는 않아도 우리말로 나누는 대화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샤말과 떠들다 보면 나는 막 우려낸 녹차를 마신 듯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혹독한 수난의 날들을 살아왔음에도 그에게서 그런 맑은 향취가 풍긴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종종 경외심을 품게 했다. 이 인쇄소에 다니기 전에 그는 오랫동안 경기도에 있는 주물공장과 프레스공장에서 일했는데 하필 모두 악덕 업주들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그땐 감금되다시피 한 채 오로지 일만 했다고, 시키는 만큼 일을 해내지 못하면 늘 쇠파이프 같은 걸로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심지어 그는 나중에 취직한 프레스공장에서 작업 중에 손가락 두 개를 잃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치료와 보상은커녕 밀린 임금조차 포기하고 탈출하듯이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워낙 이 사회에 만연한 일이라지만 막상 내가 그런 일을 경험한 사람을 만나니 분노가 치밀었다. 꿈꾸었던 돈을 모으기는커녕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핍박과 학대를 당하면서, 무려 칠 년 동안 아내와 자식의 얼굴을 보지 못한 그의 심정이 어떨지를 생각하면 내가 다 참담해지곤 했다. 하지만 차마 그런 비참한 신세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그는 한 번 더 용기를 냈던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이 인쇄소에 들어온 후 비로소 샤말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었다. 바라던 대로 매달 꼬박꼬박 집에 돈을 부칠 수도 있었다. 거의 대부분을 집에 부치고 그는 말도 안 되는 돈으로 생활을 영위했다.

 언젠가 그가 술에 취해서 자기는 세상에서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꼭 내가 죄인이 된 기분이어서 맞장구도 칠 수 없었다. 손가락이 세 개뿐인 손으로 담배를 피우는 그를 보면서, 나는 잘려 나간 그의 손가락처럼 잘려 나간 그의 영혼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그의 손가락이 이제 치유될 수 없듯이, 그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치유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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