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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aumazein Apr 30. 2024

혼자인 시간에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을 반기게 된 건, 혼자일 때 오히려 마음이 채워짐을 알고 나서부터이다.  



"자기 시간 중 상당 부분을 일하거나, 일하느라 쓴 기력을 회복하거나, 일하기 위해 지출하거나,

일할 곳을 찾고 준비하고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활동에 소모하는 우리는

그중 얼마만큼을 진정 자신을 위해 쓰고 있는지 말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

- 데이비드 프레인, <일하지 않을 권리>


성적 자기 결정권처럼 노동 자기 결정권은 왜 없는가. 하고 싶은 만큼만 일한다고 일 자체에 대한 경중도가 낮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몰입하고 순수하게 더 즐기며 일할 수 있다. 치열하게 일한다고 그 일에 진지하고, 그렇지 않다고 진지하지 않은 건 아니다. 더 오래, 끈기 있게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 날은 일하는 날 못지않게 내게 중요하다. 쉬는 날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늘어지다 보면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 집안일을 1시간 안에 후다닥 끝낸다. 꼭 필요하거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으면 온전히 나를 위해 보낸다. 운동을 하고 주로 도서관이나 카페로 간다. 또는 보고 싶었던 영화나 전시회를 찾아서 간다. 가보고 싶었던 장소를 저장해 두었다가 찾아가기도 한다. 연주해보고 싶었던 곡 악보를 찾아서 피아노 앞에 앉거나 기타를 다시 잡아보기도 한다. 가족과 생계일 다음으로 내 우선순위에 두는 시간들이다.


특히 마음이 텅 비거나 왠지 모르게 지칠 때는 그저 걸으며 음악을 듣거나 보고 싶었던 책을 찾아서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걸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는 걸 알고 나서 생긴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다.



20년 전쯤 영어 공부를 한다고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 혼자 가서 연수생들 사이에서 소위 말하는 '향수병' 같은 게 생겼을 때 처음에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들과 하하 호호 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겨봤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잊었던 외로움이 더 무섭게 찾아왔다. 새로운 도시에 왔으니 좋다는 곳을 찾아다녀봤지만, 너무 좋은 곳이어도 그걸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의 여유가 없이는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면 나아질까 싶어 마음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만나봐도 내 마음을 다 채워주지는 못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보내다가도 영어실력이 늘어야 할텐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답답했고, 내가 이곳에서 지금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시절 철없는 방황이었을지 몰라도 그땐 나름 내가 내 '역할'을 다 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한 것이었다. 어느 날엔 바다 앞에 앉아 수평선 끝을 한참 바라보며 저 수평선을 너머너머 계속 가면 내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우리나라가 나올까 하는 생각 같은 걸 했다.


그러다 찾은 곳이 서점이었다. 'Thought of the day'라고 이름 짓고 그날의 문장을 찾아 이해되기도 하고 되지도 않는 원서를 읽다 보면 그날 마음에 박히는 문장이 꼭 하나씩 있었다. 없으면 있을 때까지 읽었다. 그러다 보면 꼭 한 문장은 만나게 되었고 그걸로 신기하게 마음이 채워졌다.


남녀노소 국적을 떠나 어떤 한 사람이 쓴 글이 내 마음에 와닿았다는 건 그가 누구든 나와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는 것에 먹먹하게 마음이 채워졌다. 그걸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때부터 생긴 문장 찾기 습관이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때로는 아주 오래된 것들을 뒤죽박죽 느끼면서 살아가고, 그러다가 그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내가 느낀 것에 대해서 말해주는 책을 만나게 되죠."

- 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의 말>


그리고 때로는 그저 집 앞 바닷가로 나가서 해지는 것을 보며 음악을 들으며 무작정 걸으면 또 그걸로 마음이 채워졌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나의 '쓰임'을 다하지 못할까 봐, 내 '역할'을 다 하지 못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나라는 '존재' 그대로 누군가의 '존재'와 만날 때 채워지는 안도감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나의 있는 그대로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찾아오는 평온함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마음이 헛헛할 땐 음악을 찾고 좋아하는 책을 찾아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찾는다. 그러면 그렇게 마음이 넉넉해지고 설렐 수가 없다.


 '방해 없는 시간으로 열린 틈서리-' 잠시나마 모든 것과 떨어져 자유와 몰입의 세계로 가는 나만의 길이다. 누구에게나 간절한 자기만의 공간에서 온통 몰입하는 그 시간이 좋다. 어떤 밤엔 음악만이 나를 살려두었고, 어떤 날엔 글만이 내게 길을 보여주었기에. 내게는 빛이고 에너지인 시간이다.


읽는다는 건, 문자 그대로 책을 여는 것이고 동시에 자아의 일부를 여는 것이다.
- 줌파 라히리,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


내가 나를 여는 시간.

내 안에 쌓아놓은 것들이 내가 생생히 겪은 일들과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키면 그때는 글을 쓰며 내 안의 서사를 쏟아 펼쳐보고 나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던 내 감정과 반응의 이치를 다시 되씹어본다.



책을 읽을 때는 주로 도서관을 찾는다. 해야 할 일이 가득하고 널브러질 곳이 여기저기 있는 집이나 봐야 할 것들, 가고 싶은 곳들, 유혹이 가득한 야외에서는 책이 잘 읽히지 않는 편이다.

온통 집중하는 에너지가 가득한 곳, 사각거리는 소리까지 울릴 듯 조용한 곳에서는 몰입하고 빨려드는 에너지로 나도 잠시 현실과 동떨어져 책 속으로 들어가기가 수월하다. 수렴하고 받아들이기에 내게는 가장 좋은 장소이다.

  

반대로 글을 쓸 때는 카페를 주로 찾는다. 여럿이 모여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속얘기를 꺼내며 발산하는 곳, 무언가 표출하고 생산하는 에너지가 가득한 이곳에 와야 나 또한 자유롭게 내 안에 묻혀있는 것들을 꺼내게 되고 써내려 가진다.

 

도서관은 고독과 고립, 수용하는 장소라면, 카페는 소통과 순환, 발화하는 곳이다.

식물이 이산화탄소와 물을 재료로 빛을 받아 광합성 작용을 하듯 나도 글로 광합성 작용을 한다. 어처구니없이 마음과 다르게 나왔던 나의 언행들을 시작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누군가의 마음을 향해서 건너도 가보고, 복잡하고 미묘하고 얽혀있던 감정들이지만 그대로 두면 어느 날 폭탄이 될지도 모를 찌꺼기들을 모아 빛처럼 반짝이는 글을 흡수해 광합성 작용을 해본다. 식물이 이산화탄소를 마시고 포도당과 산소를 만들어 내듯이 나도 한쪽으로 치워뒀던 감정들을 소화시키고 내가 살아갈 에너지원을 다시 만들어내 본다. 그리고 그것이 또 다른 누구에게 산소 같은 글이 되길 바라며 써온 글을 내 펼쳐본다.


이렇게 혼자 있을 때는 아무도 배려하지 않아도 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막무가내로 꺼내 놓기에 자유롭다. 내가 나와 가장 농도 있고 밀접하게 만나는 순간이다. 어쩔 수 없이 사회적 관계에서 하나 둘씩 쓰게 되는 가면을 벗어놓고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나를 글로 떠미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딛고 자유롭게 뭐든 생각하고 써볼 수 있는 사색과 사유의 시간 속을 유영한다.


그리고 이 시간은 내가 가장 흔들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별 탈 없는 일상의 바퀴에 묻어둔 나의 생각과 감각, 감수성의 수문이 속수무책으로 열리는 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이 여성들에게 책을 못 읽게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한다. 여성들이 무언가를 깨달으면 집을 박차고 나갈까 싶어서 그랬다는 우스개 소리도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 시간은 내내 돈만 벌고, 공부만 하다가 '자의식은 높고 자기 의견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모든 책이 그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아. 하지만 책들은 은밀히 그대 자신으로 되돌아가도록 가르쳐주지."
-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의 문장들>


고독.

소통.

환기.

이 세 가지가 선순환하는 일상이 나를 건강하게 지탱하게 해 준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지만, 세상 또한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하도록 책을 읽고 생각을 다듬고 글을 쓴다. 그러면서 나만의 생각이 고쳐지고 취향이 생기고, 그런 나의 사유와 취향은 무엇보다 나를 잘 드러내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파악할 때도 그 사람만의 대화하는 방식, 혼자 있을 때 시간을 보내는 법, 또는 그만의 취미나 취향을 관심 있게 살펴보는 편이다. 못내 드러나지 않은 한 사람의 색과 빛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언가 기다리며 웅크리고 내부로 침잠하는 시간 속에서 감춰져 있던 것이 보인다. 혼자 있는 시간, 텅 빈 시간을 보내는 방식에서 그 사람의 세계가 드러난다. 한 사람의 세계가 돋보이며 존재의 결이 선명해진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또렷하게 삶에 새겨진다. " - 김지연 평론가


홀로 침잠하는 시간을 제대로 보낸 사람에게서는 화학적인 코팅이나 연마제로 생겨난 번들거림 말고, 오랜 세월 닦이고 닦아 자연스러운 광이 나듯 윤이 난다. 그렇게 나도 나이가 들면서 안으로부터 절로 빛이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홀로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내 '삶의 맥락을 만'드는 시간이다.

'슬픔, 기쁨, 불안, 전율, 울분, 감동 같은 정서 작용'이 현실의 압력으로 억눌러져 있다가 혼자 있는 시간에 지진처럼 지층이 흔들리고 그렇게 내면의 지층이 흔들리다가 다시 지각이 굳어 형성되면 층리나 엽리 같은 나만의 아름다운 무늬가 생겨난다.


자신만이 가지는 고유한 무늬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 슬픔을 모르는 순진한 이가 아닌, 슬픔을 알지만 그럼에도 삶을 밝고 명랑하게 사는 사람. 지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위화감을 주지 않는 말투를 가진 사람. 인생의 고통 속에서도 타인과 나를 편안하게 하는 유머와 위트를 잊지 않는 사람. 본의 많고 적음에 휘둘리지 않고 삶을 즐겁고 근사하게 살 줄 아는 사람. 그런 색과 무늬로 자연스럽게 내가 나임이 드러나는 사람이고 싶다.


그렇게 혼자인 시간에 우리는 자신만이 가지는 고유한 무늬를 만들어간다. 러니 어찌 때로 홀로됨을 반기지 않을 수 있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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