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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aumazein May 28. 2024

나를 웃게 했던 사람이 나를 울린다

이 세상에 타인 없이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혼자 하는 일을 하고,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늘어다 해도 온전히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먹고사는 경제력과 기능적인 능력의 문제를 제외하고도 인간은 누군가와 심리적으로 연결되고, 정서적인 지지를 주고받고, 다정한 살핌과 헤아림의 마음을 든든한 기반으로 살아간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삶 속에서 우리는 깊게 연결되었다가 상실의 고통을 느끼고 그러면서도 또 마음을 나누며 살아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힘내고 살아가게 하는 이들도 내 곁에 사람이지만, 또 나를 간혹 힘들고 아프게 하는 이들도 내 곁에 그 사람들이다. 어릴 땐 나의 문제이냐, 너의 문제이냐를 놓고 옥신각신 다투기도 했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깨달아간다. 나의 인연들은 내 안에 또 다른 나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 내가, 또는 서로가 끌어당긴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인연이 주는 귀한 선물이라는 것을.


나를 웃게 했던 사람이 나를 울린다.

제목을 써놓고 이 챕터 글쓰기가 가장 오래 걸렸다. 혼자만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라 조심스럽고 어렵기 때문이다.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자칫하면 광대하고 진부해지기 때문에 무엇부터 써야 할지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우리가 맺는 대부분의 관계는 오해로 시작해서 오해로 끝난다

고 하지만, 혹여나 나의 이해일지 오해일지 모르는 무엇이 상대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쓰고 싶었고, 그렇지만 그저 두리뭉실하게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글쓰기 가장 어려운 주제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관계의 핵심이자 본질이 아닐까.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어서 내 마음대로만 할 수 없는 것, 서로의 온도와 속도와 방향을 맞춰나가야 하는 것. 그러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속 깊은 곳까지 이끌어 가주는 것. 그래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매혹적인 것!


'신이 인간에게 베푼 가장 큰 자비가 인연'이라고 하듯, 분명 우리에게 복과 기회는 사람을 통해서 온다. 거기에는 상황에 따라 선연, 악연이 있을 뿐 선인과 악인이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다. 선연이라고 여겼던 연이 악연이었다는 것을 뒤에 깨닫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나는 선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의도치 않게 악인이 되기도 한다.


인연이 닿으면 서로에게 스며들듯 마음을 주고받게 되고, 인연이 깊어지면 '나를 웃게 한 사람이 나를 울리는' 상황이 생기기도 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삶이 유동적인데 안정적인 관계란 게 어떻게 존재'(은유)할 것이며, 그렇게 안정적이기만 한 관계에선 얼마나 우리의 성장이나 확장이 이루어질까 싶다.  



친구관계든 연인관계든 흔히 연이 끝나고 나서 하는 말 중,

'그 사람은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필요해서 나를 만났나 봐'

라고 원망하듯 뱉어내는 말이 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 말은 사실이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해서 만나지, 그냥 만나지는 관계는 없다. 아무런 목적 없이 만나는 관계였다 해도 더 들여다보면,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서라던가, 맛있는 밥을 함께 먹을 수 있어서라든가, 나에게 잘해주어서, 취미가 비슷해서 등등의 이유가 있고, 하물며 심심해서 만났다 해도 여유시간을 때울 수 있는 필요가 충족되었기 때문에 만나었다.


즉 어떤 인연도 서로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데 계속해서 만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한쪽의 희생이나 헌신으로 지탱되고 있을지 모르고, 그런 관계는 이내 끊어질 확률이 크다. 물론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얽히고 설키는데 그것은 차치하고 말이다.


이렇게 관계에서 '필요(Need)'라는 것은
달리 뒤집어 보면 나의 '결핍(Want)'이다.

우리는 내게 없는 것을 가지길 욕망(Want)한다. 영어로 결핍(want)이 바로 욕망(want)인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것이 외적인 것이든 내적인 것이든 타인에게서 내가 못 가진 것, 내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이끌리갖고 싶게 된다.


관계란 것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집착이 생겨나고 번뇌가 반복된다. 타인이 내 것이 되면 나의 결핍도 없어지고 욕망이 해결될 것이라 믿기 때문일까. 허나 서로의 필요가 끝이 나면 인연도 끝나는 것임을, 어떤 관계도 소유할 수 없고 영원하지 않으며, 그저 한 시절이 가고 또 다른 계절이 온다는 사실을 맞이하게 된다.



나에겐 없는 무언가를 가진듯한 누군가에게 끌리어 꽤 가깝게 지낸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그런 관계가 있었을 테다. 서로 마음을 내주고, 함께하면 에너지가 생기고 시너지가 된다며 누구보다 터놓고 의지하며 지냈다. 주위 사람들이 어쩜 사이가 그렇게 좋냐며 부러워도 했지만, 그 좋았던 마음이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를 매이게 하였, 그럼에도 함께 하는 이 의리이고 그게 내 울타리 되뇌며 소란스럽고 려운 간을 헤매고 버티었다.


서로의 필요가 끝나니 관계도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려고 애써 괜찮은 척했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은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일이며, 그 미운 마음은 결국 내게로 돌아옴을 알기에 어디에도 쉽게 펼쳐내지 못했다. 간이 지나 나라는 존재와 타인이라는 존재, 그리고 존재와 존재 사이에 공간 거리를 두고 보니 보였다.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 나가는 과정인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고자  세계 밖에서  폭을 좁히기 전에 더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스스로 자신과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누구와도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자신만이 너무 가득한 채로, 또는 자기 안이 텅 빈 채로
타인과 깊고 얽힌 관계를 하게 되면 서로 채워지지 않은 얼룩진 눈물 같은 결핍만이 서럽게 남게 된다는 것을.

 

그러나 시간이 또 더 흘러서 보니 그 어떤 인연들 서럽지 않았고 후회되지 않았다. 결국 '자아의 내밀한 면모'는 혼자 살아가면서는 발견하기 어렵고, '관계의 경험이 쌓여야 드러나기'(은유)에, 그렇게 겹겹이 나를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깊은 만남과 시간이 없었더라면 내게는 나 자신을 직시하고 바라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존재는 관계의 산물이라는 것.
인생에서 스친 무수한 인연과 겪은 수많은 사건에 자기 행동의 기원이 있다.
다른 사건과 관계가 투입되는 운동 속에서
한 존재는 변한다.
- 은유, <쓰기의 말들>

     

나의 행동의 기원! 그 흐름을 따라 과감히 뛰어들어 봄이 과연 나에겐 무엇을 가져다줄까. 이 소란스러운 관계의 운동이 끝나고 나면 우리에겐 무엇이 남을까.

 


 '나'라는 것은 '내면화한 관계의 총합'(문요한, '관계의 언어')이다. 사람은 타인에게서 좋은 점을 보면 배우고 내 것으로 만들고, 나쁜 점을 보면 반면교사로 삼아 내 안에는 그런 점이 없는지 살피며 자신을 다듬게 된다.


그래서 타인을 거울삼아 내면화하는 것이다. 즉 처음부터 완벽하게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관계에서 오가는 수많은 경험으로 깨뜨려지기도 하고 새롭게 변모하기도 하며 숙해진다. 우리가 관계에서 재발견하는 것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며 그 대상의 내면화로 나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하고 만들어간다.


그러니 지금의 나는 아직도 완성된 나가 아니고, 내 옆에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로 변화무쌍하게 생성되어 간다. 내 곁에 가까운 사람들이 나의 일부를 구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며 지금의 내가 구성되었으니,
나를 스쳐 지나간 모든 인연이 그 없이 중하고 귀하다.

지나간 인연도, 앞으로 만날 인연도 그래서 나는 아낌없이 사랑한다. 사랑은 유일하게 나와 타인을 동시에 키운다. 남녀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과 동시에 타인을 넓혀나가는 힘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내게는 세계를 대하는 하나의 태도이며 나의 우주를 깊게도 하고 광활하게 펼쳐나게도  믿는다.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75)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사랑에는 분명 마음을 정화하는 가장 큰 힘이 있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만큼 깊은 쾌락'은 없다고 고백한 은유 작가의 말처럼, 나 또한 사람과 삶에 대한 깊고 온전한 이해에 대한 갈망이 여전하다. 그것이 무엇보다 삶에서 가장 큰 공부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결핍으로 나도 원치 않게 타인에게 주었던 상처들을 반성하고, 내가 받았던 상처 또한 또 다른 나를 피우기 위한 자양분이었다 회고하며, 또 어떤 타인을 통해 나를 발견할지 늘 꿈꾸며 기다린다.


여전히 그 낯선 여행에서는 기쁨과 슬픔이 오가겠지, 나이가 들어도 정체되지 않고 생기 있게 넘쳐흐르고 싶다. 늘 안에서 밖으로 시 솟아 흐르는 샘처럼 거듭 새로워지고 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흘러 타인에게 가닿 싶다.


누군가 내 곁으로 와 슬며시 마음을 열어 보여  또한 여름 저녁 바람처럼 선선하고 순전하게 나의 속살 같은 마음 한을 어김없이 내어줄  있기를. 서로가 서로의 '고독의 신호를 알아차리는' 기쁨의 순간을,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가까워지는 환희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 윤이형, <붕대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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