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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aumazein Apr 16. 2024

나의 뿌리, 나의 고통

어느 날 창밖으로 보이는 한 풍경에 왜 문득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아침이었고, 날씨는 맑았고, 운동을 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내 눈에 한 아빠와 아이가 들어왔다. 삼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젊 건장한 아빠와 네 살 남짓되어 보이는 귀여운 아들. 손을 잡고 몇 발자국 걸어가다가 꼬마는 힘들다고 말하는 것 같았고, 아빠에게 안아달라고 조르는 듯했다. 하늘 같이 키가 큰 아빠를 향해 온 하늘을 다 안을 듯 두 팔을 쫙 벌리고 업히겠다는 포즈를 자신 있게 취한 아이에게서는 아빠가 업어주지 않을 거라는 의심은 단 1%도 없어 보였다.


여름이라 햇빛이 쨍한 오전, 더운 날씨였다. 아빠로 보이는 남자에게는 한 손에 다른 짐도 있어서 조금은 힘들어 보였지만, 그는 짐을 한 손으로 들고 무릎을 굽히더니 등을 45도 정도로 기울이고 앉아 아이가 잘 업힐 수 있도록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짐을 들지 않은 다른 한 팔을 등 뒤로 구부려 아장아장 언덕을 올라가듯 업히는 아이가 빠지지 않도록 감싸 안았다.


드디어 아빠 등에 업힌 아이는 세상 그 무엇도 다 막아줄 듯한 가장 든든한 등에 평온하게 얼굴을 기대고 두 발을 발랄하게 구르며 즐겁다는 자세를 취했다. 아이에게 아빠와 함께 가는 그 길은 무엇보다 행복하고 편안해 보였다. 남자는 짐도 들고 아이도 업느라 조금은 버거워 보였지만, 아이가 있어 더 힘이 나는 듯 조금은 무겁지만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리막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두 부자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망연하게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고, 이유 모를 울컥함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느닷없이 마주한 그 아침의 단란하고 짧은 풍경에 나는 왜 눈물이 났을까.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  의아한 눈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남자의 고단하고도 묵직한 삶의 무게를 견디는 일상이 보여서였을까. 세상에 나를 가장 위대하고 대단한 존재로 바라보는 아이 앞에서는 없던 힘도 생겨나는 아빠이지만, 아이를 업은 등 뒤로 조금은 쓸쓸하고도 힘겨워 보이는 생의 어딘가 한 귀퉁이에 기대고 싶어 하는 내 아버지의 인생길이 겹쳐서였을까.


그리고 아빠 등에 업혀가는 어린아이가 나는 부러웠을까. 아빠의 삶의 무게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나이에만 가질 수 있는 천진난만함과 아빠가 나를 업어줄 거라고 당연히 믿어 의심치 않는 아이의 무고함에 대한 나도 모를 부러움이 눈물로 쏟아나왔을까.



어릴 적 나는 한 번도 아빠의 등에 업히거나 두 팔에 번쩍 안겨본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 그런 적이 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내 기억에는 단 한 번도 없다. 세 아이를 먹이고 키우려면 전쟁 같은 사회에서 승승장구해야만 하는 가장의 무게로도 삶이 버거웠을 터라 세 꼬맹이들과 살로 비비고 몸으로 사랑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의 아버지였다.


이해한다. 이해하려고 했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아이를 낳고 키우며 그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다름을 알았고, 한 가장이 주로 한 가정을 다 책임져야 하는 그때에는 그게 평범한 가정의 모습인 줄 알았다.


그런데도 가끔 또래 친구들의 아버지들 중 유난히 친근하고 친구 같은 아빠 보면 너무 좋겠다는 부러움과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아빠를 가질 수 없음에 뿌리 깊게 한이 서린 적도 있었다.


노조가 없기로 유명한, 명예를 주고 직원을 갈아먹기로 유명한 우리나라 대표 S그룹에서 정년퇴임하신 아버지 덕분에 나는 지금도 S그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일생을 회사에 바치셔야 했다. 물론 가족을 위해 바치셨지만, 차라리 제적으로 부족해정서적으로 사랑이 궁핍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루에도 열두 번 사무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결혼 후, 내 아이에게 살로 비비고 맞대며 사랑을 전하는 남편과 아이를 보면서 내 남편이 아빠 같지 않아서 안도했고, 그러면서도 다정한 아빠를 둔 내 아이가 부럽다는 생각도 종종 하곤 했다.


이제는 어른이 되고 세 아이를 키워야 했던 아버지가 전쟁터 같았을 직장생활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다정다감한 감정 같은 것은 가슴에 묻고 사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런 날들에 얼마나 지치고 부치셨을까 안타까워도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이해와 공감이 긴 세월 동안 굳어버린 서먹서먹한 아버지와의 사이를 건너뛸 수 있을 정도로 깊고 넓지 않음도 어찌할 수가 없다.


그저 희미하게나마 여전히 내 삶의 기둥인 아버지가 오래 건강하평온하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할 뿐, 크게 무언가 바라지 않을 정도로 정서적으로도 물리적으로 거리가 있다.


그런데도 돌이킬 수 없는 아빠의 다정한 사랑이 나는 고팠나 보다. 어느 날 아침에 아빠의 등에 천진난만하게 업히는 아이를 보며 눈물이 났던 걸 보면.



이것이 내가 마주하는 나의 뿌리이자 나의 고통이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고 이 작은 공간에 표출하기까지도 내게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나의 뿌리는 곧 나이고, 나의 뿌리를 사랑하지 못함이 곧 나의 고통이기도 했기에. 그러나 책을 읽다 우연히 이 문장을 발견하고는 언젠가는 꼭 글로써 풀어내고 빠져나가고 싶었던 나의 얽힌 뿌리이기도 하다.


"... 그 기억을 일일이 들춰내고 복기하는 일이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그러나 그 무참한 죽음과 끝 모를 수치가 몸속에 쌓여 있다면 또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 (75)
- 은유, <쓰기의 말들>


때로는 담지도 못하게 수치스럽거나 화나지만, 결국은 내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 곱씹어 소화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것들을 써내야 그제야 마음에서 치우고 평온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서 이야기한 내가 무턱대고 강한 사람들이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누군가를 억압하는 것에서 유난히 두려움과 분노를 느끼는 이유이다. 그만큼 내가 존경하고 싶은 인물이 그때의 내게는 고통이었고 들키고 싶지 않은 아픔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늙어 가는 한 여자가 나는 더 여리고 서러웠다.



엄마는 원래 밝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40여 년 전 푸릇했던 여자는, 글쓰기를 좋아했다. 생의 파고 앞에 하소연할 곳 어디에도 없는 그녀는 글을 읽지도 못하는 갓난아이 딸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아이 낳고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때때로 난폭하게 변해버리는 삶 앞에서 세 아이를 놓고 어디로도 도망갈 곳은 없었다.


사춘기 때 기억이다. 사실 실제였는지 꿈이었는지 구분이 가지 않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차올라 내게는 생생히 실제 기억인 것으로 남아있다. 그날도 아침부터 전쟁을 치르고 외롭고 쓸쓸해하는 엄마를 혼자 두고 집을 나가는 게 마음에 밟혀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스킷과 시집을 거실 탁자 위에 올려두고 등교했다. 차마 말로는 못하고 '마음이 힘들 때  읽어, 엄마'라는 쪽지와 함께.


엄마가 시 읽고 글 쓰고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의 전쟁터에서 겨우 살아 들어오는 아빠가 핀잔주고 구박해도 엄마는 삶을 아름답게 지켜내기를 바랐다. 뜬금없이 폭포같이 쏟아지는 불호령에도 엄마가 건강하게 버티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나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생명의 끈인 엄마가 생기를 잃고 빛을 잃을까 봐, 사라질까 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나이가 들어 최근 어느 날, 엄마와 산책을 하게 되었고, 산책길에 우연히 미술관이 있어 들어가 보자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 미술관에 들어서며 엄마가 좋아하길 바랐다.


"여긴 에어컨도 나오고 여름에 시원하니 좋겠네."라며 천진하게 얘기하셨다.

"엄마, 이런 그림 같은 거 보며 뭔가 느끼고 사색하는 거 좋지 않아?"라고 물으니, 이제 사색 같은 건 지겹고 싫다 했다. 사색보단 산책이 더 좋다고 했다. 그런데 슬프지 않고 희망차게 들렸다.


그제야 나는 엄마가 안쓰럽지 않았다. 나는 이제 함부로 엄마 삶을 연민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엄마는 당신의 인생을 지나와 구불구불하게 굽어도 여전히 짙푸른 소나무처럼 당신의 삶을 낙관하고 있었기에. 내가 함부로 연민할 틈 같은 건 없는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여전히 푸른 엄마였다.  



애증의 관계인 듯한 두 분은 지금도 서로를 버티게도 하고 지치게도 하며 그래도 생의 두 손을 함께 잡고 있다. 서로의 인생에 유일하게 남을 친구처럼.


서글픔과 피곤함이 '기어이' 다정과 평화를 닮아 가는 일은 타인과 세상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통과하는 동안 이뤄지는 것이다. 모르겠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될 때 우리는 연결된다. (165)
- 장일호, <슬픔의 방문>


나의 부모는 외면하고도 싶었지만 이해하고 싶었고, 모르고 싶었지만 알고 싶기도 했던 나의 뿌리이다. 마주하거나 파헤쳐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글로 쓰기까지 오래 걸린 나의 고통이다.


하지만 나와 하나라고 생각해서 괴로웠던 나의 부모가 곧 나인 것은 아님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인생을 좀 더 살면서, 삶을 살아낸다는 게 그리 아름답고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의 이상과는 다르게 그냥 그렇게 살아지는 날들도 많다는 것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뿌리, 나의 고통이 더 이상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뿌리, 나의 고통이 있기에 나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도 눈을 뜰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때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기꺼이 함께 머무르는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다. 상처받은 마음이 타인의 슬픔에도 공감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좋아하는 은유 작가의 말처럼 무엇보다 나를 '하강'시키는 '기운을 상승의 언어로 번역'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고통을 승화시키고 과거의 나를 뛰어넘고 싶었다.

  

우리는 행복한 기억으로 살죠.
하지만 우리는 불행한 기억으로도 살아요.
상실과 폐허의 힘으로 말입니다.
- 김언수, <캐비닛>

행복한 기억은 나를 부드럽해 주고, 불행한 기억은 나를 단단하게 해 준다. 행과 불행을 함께 겪어낸 후 나는 부드럽고 단단한 사람이 된다.


그 시간을 통과한 우리가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하였기에.

지금의 나는 내가 행복한 법을 알고, 나를 단단하게 아는 법을 알기에. 그리고 그것은 나의 뿌리, 나의 고통이 만들어 주었음을 알기에. 나의 뿌리와 나의 고통을 통해 나는 '거짓된 자아'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짜 나'를 그대로, 그런 나의 모습도 끌어안고 사랑하는 법을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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