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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aumazein Mar 18. 2024

차원의 문

가끔 대화를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의 언행이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독특한 개성이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4차원'이네 또는 그 이상의 '고차원'이라며 농담 섞인 말을 던진다.


차원:
1.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는 처지. 어떤 생각이나 의견 따위를 이루는 사상이나 학식의 수준.
2. 물리량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 또는 물리량의 기본 단위와 유도 단위의 관계.
3. 기하학적 도형, 물체, 공간 따위의 한 점의 위치를 말하는 데에 필요한 실수의 최소 개수. 직선은 1차원, 평면은 2차원, 입체는 3차원이지만 n차원이나 무한 차원의 공간도 생각할 수 있다.


점과 점이 만나 1차원의 선을 이루고, 선과 선이 만나 2차원의 평면을 이루고, 거기에 하나가 더해지면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입체 공간이 된다. 그리고 보통 상대성 이론에 나오는 시공간을 4차원이라고 일컫는다. 과학적으로 조금 더 복잡하게 들어가면 5차원, 6차원,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있다.


나는 뻔한 건 재미없는지라 가끔 4차원, 5차원 같다는 말을 들으면 흐뭇하게 칭찬으로 받아들이곤 하며, 예상 밖의 반전 매력을 가진 사람에게 나 역시 차원이 다르다고 애찬을 하고는 한다.


우리가 사는 3차원 공간은 앞뒤, 좌우, 위아래로만 움직일 수 있지만 4차원 그 이상에서는 '해리포터의 9와 3/4 승강장 벽'에서처럼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래서 대화를 하다가도 뻔한 시작과 끝이 아닌 퀀텀점프처럼 시공간을 오가며 나누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이 묘하게 연결될 때 나는 말과 말 사이로 무한히 빠져들게 된다.


공간도 그렇다. 비록 지금의 나는 3차원에 살고 있지만 어떤 공간에서는 마치 차원이 다른 공간으로 빠져들어가듯 몰입될 때가 있다. 내겐 첫 음부터 심장을 울리는 음악소리가 꽉 차게 들리는 곳이면 대부분 그렇다. 나도 모를 신음 같은 감탄이 나오며 어떻게 이 공간에 안 빠져들 수가 있겠냐는 듯이 순식간에 내 주위 세계 어지고 나 그 안으로 녹아들듯 스며들어 버린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 다 비슷하리라 생각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수 이적이 음악에 대한 애정을 '차원의 문'에 빗대어 이렇게 썼다.


 음악이 들리는 순간,
그것은 본론이고 주제고 모든 신경을 앗아가는 블랙홀이다.


멋지다. 그래, 블랙홀이다. 나에게도 본론이고 하나의 주제이며 모든 신경을 꺼버리고 단 하나만 켤 수 있는 블랙홀 같은 '차원의 문'이 있다. 바로 어느덧 일곱 번째 계절을 맞이하며 내가 일하고 있카페의 출입문이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나는 미처 다하지 못한 집안일부터 아들 걱정, 먹고사는 시름과 관계에서 오는 온갖 번뇌까지 다. 여기서 필요하지 않은 나와 잊고 싶은 일들은 모두 문밖에 두고 들어간다. 물론 같이 일하는 들과 갖가지 이야기도 즐겁게 나누기는 하지만, 문 밖의 모든 걱정거리 끌고 들어올 만큼 깊어지지는 않는다.


외양은 같지만 속은 또 다른 나로 탈바꿈된다. 그래서 카페에서 일하는 그 시간은 내게 차원이 다른 사람처럼 매력적이고 중독적이다. 무한 반복해서 일해도 매일이 새롭다.



젊은 날엔 인증이면서 동시에 족쇄였던 직원증을 목에 걸고, 기한까지 써야 하는 계획서며 보고서와 씨름하고, 부서 회의하는 날이면 숫자로 들이밀어대고 서로 말로만 잔치하는 성과 싸움에 갑갑했다. 무대를 꿈꾸지만 그 무대가 아니었는데 어쩌다 행사 개요부터 예산이며 스크립터며, 사회 마이크까지 잡으며 내가 있을 곳이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출근하는 길이 까마득한 적 많았다.


지금은 그때보다 월급은 적지만 마음의 짐도 적다. 적어도 이곳에서의 시공간은 나를 늙지 않게 한다. 물론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내 일부분을 구성하는 것알기에 예전 직장의 숱한 날들에도 나는 감사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하는 일도 노동의 한계 시간을 초과하게 되면 계속 좋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이제 나는 내 노동시간을 내가 정하고, 그 이상 일하지 않을 권리를 적극적으로 누리고 있다. 출근하는 아침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상쾌하고 가벼우니, 일할 있음에, 그리고 하고 싶은 만큼 일할 있음에 그것만으로 감사하다.



게다가 내가 우연히 일하게 된 이 카페는 사장이 직접 로스팅하는 아는 사람만 아는 동네 맛집이라 아침마다 미각을 깨워주는 커피맛이 찐행복이라며 나는 늘 감탄한다. 그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참 소박한 것에 좋아한다며 신기해하는데, 나는 이게 어찌 행복이 아니냐고 반문하며 더 신기해한다. 뭐 사람마다 행복의 원천은 다르니까. 슬픔도 잘 느끼지만 기쁨도 잘 느끼는 나라는 것도 다시금 깨닫는다. 그렇게 나를 새로이 보는 순간도 즐겁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은 솔직하다고 믿기에 공간이 몸에 주는 느낌을 첫 번째로 여기는데, 내가 그 장소의 차원 속으로 빠져들기 위해서는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의 공기와 소리와 조도와 분위기가 나를 매료시키고 동시에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 아주 최신 유행하는 인테리어는 아니지만,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이 카페는 저 네 가지가 모두 충족된다.



영주의 마음이 일터를 반긴다.
영주는 몸의 감각이 이곳을 편안해함을 느낀다.
그녀는 더 이상 의지나 열정 같은 말에서 의미를 찾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기대야 하는 건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기 위해 반복해서 되뇌던 이런 말들이 아니라, 몸의 감각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가 어느 공간을 좋아한다는 건 이런 의미가 되었다.
몸이 그 공간을 긍정하는가.
그 공간에서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그 공간에선 내가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가.
그 공간에선 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가.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 중에서


소설에서 말하는 바로 그 공간이 나에겐 여기, 내 몸이 긍정하고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곳, 차원의 문이 열리는 이곳이다.


나는 '지금의 나'를 마주하기 위해 왜 이 '차원의 문'부터 시작했을까.


수계절이 지나가는 동안 내게는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를 다독이는 건 내가 나를 바라보는 글 쓰는 시간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질한 모습부터 남들은 모르는 나만 아는 구질구질한 뒷모습까지, 나의 바닥부터 나의 별다른 색채까 생생하게 뚫어 봐야 한다. 하지만 그 뚫린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마음이 개운해지고, 고통의 날들도 무히 지나, 그러는 동안 마음에 근력이 생기고 생의 계곡을 건너는 힘이 생다.


그런데 글을 마무리하는 건 또 다른 힘이 필요한 건지 용기가 필요한 건지, 써놓고도 그렇게 대단한 글감이 아니라는 생각에 막막히 글 쓰던 노트북을 접고는 했다. 까마득한 탄생의 순간, 혹은 그 이전까지 갔다가 이러다가는 위인전도 아닌데 아무도 읽지 않겠다 싶었고, '에이, 그래 내가 무슨 글을 쓰겠어'라고 또 원점으로 돌아가곤 했. 래서는 평생 글 한 편 완성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멀리 가지 말고 무 어렵게 시작하지 말고, 무작정 내가 쓸 수 있는 하나의 출발선 - '지금의 나, 지금 이 순간 내 두 발이 디딘 곳'에서부터 찬찬 시작해보기로 한 것이다.



나의 첫 번째 이야기는 지금 나의 하루를 안온하게 보낼 수 있는 곳.

그러면서도 그 문 안으로 들어가면 일상의 나를 잊을 수 있는 곳. 

한 때는 우울에 빠져 무기력했던 내가 하루를 생기 있고 명랑하게 보낼 수 있는 곳.

대단하지 않아도 매일의 내가 성실하게 쌓이는 곳.

그렇게 쌓이는 하루가 나를 긍정하게 되고 나의 연연한 마음도 홀연히 단단하게 쌓아 올려주는 곳.

바로 '차원의 문'이 열리는 나의 일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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