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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aumazein Sep 23. 2024

길을 잃어야 길을 찾는다.

당신에겐 어떤 두려움이 있나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가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두려움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회피하기도 하고, 알더라도 두려움의 근원을 찾아내거나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바쁜 현대인이 된 우리들은 완결된 것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나들이를 갈 때도 도착지를 내비게이션에서 검색하고 소요 시간과 최대한 효율적인 길을 찾아 출발하고, 식당에 갈 때도 미리 검색하여 리뷰를 살펴보고 별점 높은 곳, 또는 가성비 좋은 곳을 찾아 결정한다.


인간이 하룻밤만에 시든 꽃처럼 떨어질 수도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고, 처한 환경에 따라 어제의 마음 다르고 오늘의 마음이 달라지는 미완성된 존재라 그런지 확실하고 확고한 것들에 안심하고 결심하는 두려움이 가득한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틀릴까 봐, 남들과 다르게 뒤쳐질까 봐, 우리는 자신의 오감으로 경험한 값어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고 그 평균즈음에 내 생각의 기본값도 맞춰야 안전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두려움이 바로 출구'라는 말이 있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인생 최고의 순간을 두려움 뒤에 숨겨놓았다.

우리의 두려움이 있는 그곳이 정말 영화 '트루먼쇼'처럼 지금의 세계에서 탈출하는 출구이자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입구이다. 내가 더 열리고 확장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나의 두려움의 끝에, 새로움을 향해 다가가 서는 그곳에 있다. 헤맨 만큼 내 땅인 것이다.



나 홀로 교토 여행을 하게 된 적이 있다.

가족여행으로 일본에 갔는데, 어쩌다 혼자 하루 여행할 시간이 주어졌다. 자유시간이 주어짐에 신나기도 했지만, 막상 타국에서 혼자 여행하려니 두렵기도 했다.


'길을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그 와중에 휴대폰 배터리까지 다되면? 방까지 잃어버리면..?'

등등의 걱정들이 순간 들었다. 새로운 도시 가지 말고, 잘 아는 이곳나 더 머무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두려움은 잠시, 이럴 기회가 또 언제 오겠나 싶었고, 말 안 통하면 바디랭귀지로 하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어느새 가고 싶었던 교토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한국이었으면 가는 길을 미리 조사하고 하나하나 따지고 가장 가성비 좋은 루트를 선택했겠지만, 24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호텔에 앉아 찾아보는 시간도 아깝다 싶어서 그냥 무작정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가보자 하고 타야 할 전철만 확인하고 출발했다. 일상과 다른 내가 되는 것, 여행의 힘이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아니나 다를까, 한국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일본 전철노선 앞에서 나는 역 개찰구에서부터 헤매기 시작했다. 영어가 잘 안 통하는 일본인에게 영어로 묻고, 구글 번역기 일본어로 다시 보여주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본어로 열심히 대답하는 일본분을 따라갔다. '낯선 이를 신뢰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믿을 사람 없는 그곳에서 내게 친절을 베푸는 그 사람에게 나는 나의 온 용기를 내어 믿고 따랐다.


일본인 친구는 정말 친절하게도 자기가 타야 할 역 개찰구에서 나와 인은 타지도 않을, 내가 타야 할 전철표를 끊고 들어와 전철이 오는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내가 타는 것을 확인하고 그제야 안심하고 다정한 인사를 하고 떠났다. 이른 아침 시간 출근하는 바쁜 길이었는지도 모르는데 자기 나라를 찾아온 낯선 여행자에게 말이 안 통하니 몸소 시간과 돈을 베푸는 그의 작은 친절이 바로 인류애가 아닌가, 나도 다음에 누군가에게 그리 베풀어야겠다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차 풍경에 마음은 벌써 교토로 가있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내리는 역을 또 놓쳤다. 아뿔싸!

이러다 오늘 교토여행 제대로 하려나, 시간만 계속 버리겠네 싶었는데 웬걸! 내리자마자 보이는 가장 교토스러운 거리와 넓고 평화로운 카모강을 보고 완전 반해버렸다. 바로 직전의 잡념들은 다 잊어버렸다. 태어나서 처음 새로운 곳에 혼자 왔음에 낯설고 흥분되었다. (물론 사진으로는 실제의 풍경을 반도 못 담았지만, 글로 다 못하는 도시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더 공유하고 싶어서 올려본다.)



하기야 어디 내리나 다 교토이니 여기서부터 어디로든 걸어가 보면 되겠지 생각하며 도시를 오롯이 느끼고 누리며 걷고 또 걸었다. 혼자 온 여행은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남편과 아이와 같이 왔다면 그들을 신경 쓰느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뒤로 물러놓기 일쑤였는데, 나 혼자이니 나와 이 도시의 소통과 교감에만 온전히 촉수를 뻗치면 되었다.


물론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아이가 생각났고, 좋은 곳을 볼 때 남편도 왔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싶었지만, 대신 나라도 넘치게 느끼고 가자로 이내 마음을 돌렸다. 가고 싶은 곳으로 그저 걷고, 끌리는 대로 가보고, 당기는 대로 먹어보고, 나는 물처럼 정함 없이 흘러갔다. 벅차고 자유로웠다.


천년 역사의 수도였던 교토.

교토는 우리나라 옛 주요 도시 경주나 전주 같은 예스럽고 클래식하면서도 현대적이고 모던한, 복합적인 매력이 가득한 도시였다. 오래된 것들이 가지는 그것만의 역사는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였을 때 묘하게 더 멋스럽다. 사람으로 치면 자기만으로 가득한 꼬장꼬장한 어른이 아닌, 품위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깊이가 있는 멋진 어른 같은 모습이었다.


물이 맑다는 청수사.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 물씬 나는 골목들 산넨자카, 니넨자카.

교토를 유유히 관통하며 흐르는 그야말로 유유자적한 카모강.

캠퍼스가 아름답기로 유명하고 윤동주와 정지용이 다녔던 도시샤대학.

늦겨울에도 벌써 벚꽃과 매화가 피어 도시 곳곳에는 이미 생기가 피어올랐다.


사람처럼 도시도 고유하다. 비슷비슷한 배경의 곳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나라, 그 도시만이 가진 역사와 고유성을 알고 나니 마음이 더 진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에 죽기 전에 다시 또 못 올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풍경 하나하나가, 지나는 순간순간이 귀하고 했다.


그렇게 생애 한 번뿐일지도 모를 도시를 두 발로, 또 두 바퀴로 여기저기 곳곳을 누비다 보니 어느덧 해질 때가 되었고, 해가 지는 기운이 도시를 감싸자 귀향 본능이 피어올라 왔던지 숙소가 있는 도시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가는 길을 검색해서 가기만 하면 되는데 이런!!!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이 방전되는 난관에 또 봉착했다.


 '뭐, 근처 카페에서 충전하면 되지' 하는 순진한 생각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갔는데 아무 가게에서나 전기를 쓸 수 있는 우리나라가 그렇게 좋은 나라라는 것을 이곳에서야 알게 되었다. 들어가는 가게마다 휴대폰 충전은 안된다고 퇴짜맞고, 묻고 물어 스타벅스에서만 충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는데, 이번엔 내가 가지고 온 충전잭이 안 맞는 거다. 편의점 가서 맞는 충전잭을 사려고 했지만 내 휴대폰과 맞는 것은 그곳에 없었다.


이쯤 되니 오늘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 유난히 활기차고 친절했던 자전거 가게 주인아저씨가 생각났다. 좀 멀어도 거기로 다시 돌아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휴대폰 충전을 해달라고 하면 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기억을 더듬어 가게를 찾아냈고, 흔쾌히 웃는 얼굴로 충전하라고 하는 사장님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보였고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달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지구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것과 그 푸른 구슬에서 시인이 바로 인류애를 떠올린 것은 지구라는 행성의 승객인 우리 모두가 오랜 세월 서로에게 보여준 신뢰와 환대 덕분이었을 것이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여행 중 느낄 수 있는 인류애를 다시 한번 느끼고 휴대폰을 충전하고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니 그제야 편안한 마음으로 근처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카레덮밥과 생맥주 한잔을 시켰다. 우리나라 파닭처럼 파가 송송 올라간 치킨카레덮밥이었는데, 마음이 편해서였는지, 일본인들의 장인 정신으로 정말 웬만한 식당은 모두 맛있는 것인지 '이렇게 맛있을 수가!!' 감탄을 하며 먹었다. 배가 부르니 흡족하고 노곤한 몸과 마음이 되었고, 자전거 가게 사장님께 "아리가또 고자이마쓰"를 몇 번 외치며 감사의 초콜릿을 안겨다 드리고, 이미 해가 져버린 차창 풍경을 바라보며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길을 잃어야 길을 찾는다.

길을 잃지 않았으면 찾을 길도 없었을 테고, 새로운 도시에서의 나 홀로 여행의 두려움도, 두려움 뒤의 즐거움도 몰랐을 테다. 정말 두려움이 출구이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 너를 살게 할 거야'

인생에서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내 곁에 남아있다면, 그것들이 언제고 우리를 다시 살게 해 줄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오늘 저녁 식탁 위에 올라온 내가 좋아하는 찌개와 반찬이거나, 비 오는 날 산책 길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이거나, 왠지 마음이 허할 때 듣는 음악 한 곡이거나, 바람 부는 날 가기 좋아하는 나만의 장소이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이것들이 삶의 방공호가 되어 두려움의 문을 열어도 나를 지켜준다. 그리고 그 사소한 기쁨의 방공호는 내가 두려움을 떨치고 문을 열고 나아갈 때 기다렸다는 듯이 새롭게 생성되고 다가온다.


새로운 도시 교토를 가서 올해 처음 본 매화 꽃잎들과 우연히 들어간 곳에서 맛본 입에서 녹는 프렌치토스트와, 도시샤 캠퍼스에서 만난 정지용, 윤동주 시인의 아픔의 날들과 그 위에 겹겹이 쌓인 마음의 시간들과, 넓고 평화로운 카모강을 보고 순수한 기쁨의 순간들을 만났. 하나의 세계가 열리고 나의 오감이 성성하게 깨어났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 아는 내 기억 속의 황홀한 방공호이다.



나를 뚝 떼어서 낯선 곳에 툭 떨어뜨려놓은 듯한 생소함이 혼자 여행의 묘미. 정말 말도 못 하게 행복했다. 이렇게 낯설고 아름다운 도시들이 이 지구상에 얼마나 더 많을까! 언젠가 또 떠날 새로운 도시들에 남은 설렘을 아껴둔다. 이제 두려움의 문을 열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새로운 환희와 기쁨의 순간들을! 그리고 그때그것이 더 이상 두려움의 문이 아님을,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문임을 나는 다알게 되리라.


여행기는 모험 소설과는 다른 측면에서 나를 안심시켰다.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것이 불안과 고통만은 아니라는 것. 거기에는 '지금 여기'에 없는 놀라운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끝이 없다는 것.
-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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