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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aumazein Sep 10. 2024

더 깊고 더 좁은 삶으로

입추와 처서가 지나고 무더위가 가신 듯 하지만 한낮에는 남은 더위가 계속된다. 올해 첫 기획 연재글이라는 것을 쓰고 있는데, 고작 6편의 글을 쓰는데도 봄, 여름, 두 계절이 지나갔다. 닥치고 써보자 시작하였지만 글 앞에서 애면글면하는 나를 보면 그만큼 솔직한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고, 이런저런 현실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핑계를 대는 나의 게으름만 마주하고야 만다.


글은 말을 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말은 어쩌면 생각나는 대로 하면 되어서 일차적으로는 더 쉽다. 하지만 상대와 공존하는 상태에서 즉흥적인 오고 감으로 섞이는 대화에서 의도와 다르게 결론이 날 때도 있고 그래서 원치 않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반면 글은 혼자 하는 작업이다. 물론 글을 읽을 독자를 생각하기도 하지만, 우선적으로는 안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무엇을 쓰고 싶은지 묘파 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이 편하고 생활이 즐거울 땐 글 속으로 잘 안 들어가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지 않을 때도 있고, 어떤 땐 속에 가득한 것들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도무지 시작을 못할 때도 있다. 그럴 땐 사색과 사유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또 다른 자아와의 생소한 만남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지루한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하기도 한다.

  

'나'와 '타인'과 '세계'에 대한 글을 차례로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나 자신'에 대한 글을 쓰고 있지만 어떤 나는 잘 알겠으면서도 또 어떤 나는 여전히 지의 세계 속에 아있.


하지만 분명한 건, 글을 쓰기 전과 후,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로지 씀으로써 생겨난 변화는 아닐 수도 있지만, 아무 영향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 또한 틀림없다.



혼자서 외롭게 글을 쓸 때
가장 살아 있다고 느꼈다.

올여름 데이비드 브룩스의 문장 파고 들어왔다. 이 문장에서 '외롭게'와 '살아 있다'는 두 단어가 바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글은 혼자 하는 고독한 작업이어서 나를 온전히 만날 수 있고, 하루하루 일상을 느라고 숨어 있고 감춰져 있던 내가, 을 쓰는 동안 돌올하게 살아난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사람을 안다는 것>이라는 책에서 인생의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질문에 답을 해보는 동안 한여름 무더운 더위만큼이나 무언가가 내 안에서 벅차게 차오름을 느꼈다.


몇 년 전쯤에도 나 자신의 사명 같은 것에 깊이 심취해서 묻고 또 물었던 때가 있었다. 더운 여름이었고, 아이와 아이가 너무도 좋아하던 강아지를 보러 가서 평온한 하루를 보내던 때였다. 내 아이가 그토록 사랑하는 강아지를 끌어안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내 안에서 질문 하나가 의아하게 떠올랐다. 그 질문은 메아리처럼 점점 더 커지더니 가슴에 점점 더 꽉 차올라 사라지지 않았다.


What made me come to this world?

What made me come to this world??!!

WHAT ON EARTH MADE ME COME TO THIS WORLD???!!!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그 무엇도 다 이유가 있어서 태어났을 테고, 그것이 달리 말하면 어떠한 사명으로 소명되었을 텐데, 나도 그런 이유로 이 세상에 왔을 텐데 내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나 알고 싶고 찾고 싶었다. 당시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물주가 있다면 당신이 나를 만들어 이 땅에 내놓으신 이유가 있지 않나요. 그 까닭을 알려주세요. 간절히 알고 싶습니다. '라는 마음이 울리고 울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아 눈물이 속수무책으로 흘렀던 때가 있었다.


대단하지 않더라도 아주 작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 할 수 있는 그 작고 작은 사명에 대한 간절한 물음이 몇 년 후 지금 나에게 다시 연결되어 떠올랐다. 작가가 던지는 질문에 답을 하다 보니 내가 언제 가장 살아있음을 느끼는지를 깨달았고,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 하는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작은 응답으로 연결이 되었다.


캄캄한 밤하늘에 유성이 떨어지는  같았다. 마음속에 하나도 아닌 무수한 별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형형한 빛은 내가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그리고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음을 통겨주는 듯했다.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 자의 반, 타의 반 침잠의 끝으로 좁고도 깊게 들어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 해답이 어렴풋이 성큼 내 앞에 와 있었다.


인생은 사람을 부드럽게 만든다. 한 아이의 아버지(어머니)가 되는 경험은 가히 감정의 혁명이었고, 나는 어린이면 누구나 감내해야 하는 상처와 고통을 내 몫만큼 받아들였다. 인간관계의 단절,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나의 시행착오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늘어나는 질병의 가짓수 등이 그런 것들이다. 점점 나는 내가 취약한 상태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유익하다. 한층 깊은 내면에 있는 억압된 영역으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17)
- 데이비드 브룩스, <사람을 안다는 것>


다음은 간단하다. 이제는 나침반의 바늘침이 떨리고 있는 방향을 따라 키를 돌리고 노를 저어 가기만 하면 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나의 배 위에 버려야 할 것들이 많지만, 버리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그 무게로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있었음을. 어디로도 흘러가지 못하고 정체하고 있었음을. 그것들이 없어도 내 인생의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음을. 아니, 오히려 더 귀중한 무언가를 만나기 위한 버림인 것을.   


오래전에 몽테뉴가 통찰했듯이, 다른 사람의 지식으로는 박식해질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지혜로는 지혜로워질 수 없다. 이해하려면 경험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공감 능력을 높이려면 그저 인생의 온갖 돌팔매와 화살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 내가 아는, 진실로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힘든 인생을 살았지만 시련에 부서지지 않았다. 그들은 인생의 시련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목적으로 심리적 방어기제를 강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대하게 방어기제를 모두 내팽개쳤다. 그들은 자기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어서 인생의 시련이 더욱 활개 치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기가 경험하는 고통의 순간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또 그들과 연결되었다.
- 데이비드 브룩스, <사람을 안다는 것>


요즘 내게 다가오고 내가 마주하는 것이 그러하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갈망해 생의 변이제야 에서부터  나오고 있인지도 모른다.


내가 참되게 알고 싶어 하게 된 신과 인간이라는 존재의 원천, 그 기원에 대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 경이로운 이유에 대하여.
홀로 있어도 충만할 수 있는 까닭을 알게 되고,
그것을 내가 믿어 가게 됨에 대하여.


대답은 간단해졌다. 마치 몇십 년 만에 만난 어머니를 붙들고 울듯이, 어쩌면 그것보다 더 간절히 그리워하며 내 밖에서 찾아 헤매던 그 사람을 만나게 되니까.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으나 잊은 줄만 알았던 첫사랑의 기억과도 같은 나 자신. 사람은 신의 모상을 닮게 만들어졌으니 그 나 자신 속에 사랑의 원천인 신의 모습이 들어 있으니까 말이다. 인간에게 그보다 더한 그리움이 있을까.
- 공지영,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생의 무거운 돌문이 닫히고 열리는 때가 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때 삶은 시작된다'.  


인생의 변곡점일지도 모를 여기서부터, 남은 내 인생은 '탄생'과 '죽음'을 생각하며 살고 싶다. 죽음으로 인생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 처음 태어난 것처럼 천진하고 맑게, 해사한 얼굴로 활짝 더 나를 열고 싶다. 이것이 나의 전부라고 한계의 선을 그어버리고 싶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더 정직하고 용감하게 살고 싶다.


'죽음을 생각하면 남은 인생은 덤으로 사는 것이고, 죽어가는 길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의 마음으로 친밀하게 녹아들 수 있으므로'.


기억하고 싶다. '가장 높은 곳에서도 가장 낮은 곳을 알고, 가장 빛나는 순간에도 가장 어두운 곳을 보며, 가장 기쁜 마음 안에 가장 슬픈 마음깃든다는 것을. 삶과 죽음, 환희와 고통은 제나 관통한다는 것을.'

 


"진짜 나를 사랑할 용기 있으신가요"

이것은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고, 당신에게 던져보고 싶은 질문이다.


그런데 느 날 문득 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언제나 어디서나 나를 사랑하고 있는 한 존재가 있음을. 곁에 아무도 없는 순간에도 변함없이 내 곁을 지켜주는 단 한 존재가 있었음을. 그러므로 내가 용기를 가지지 않을 이유가 없음을. 이 망한 깨달음은 말로도, 글로도 쉽게 전할 수가 없다. 그저  고 더 은 삶으로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실천하고 싶은 것은, 아니 사실 실천이라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을 테고, 닮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은 그것은 인간에 대한, 존재함 그 자체에 대한, 순정하고도 지고한 '사랑'이다.


사랑이 옅어지면 우리는 대상의 존재함 자체에 무신경해지듯이, 반대로 진정한 사랑은 대상의 존재함 자체에 온 신경을 세우고 귀 기울인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결국 일어나게 한다. 곳이 어떤 곳이든.


어떤 존재 오존재하기만을 바라는, 그 바람이 모두이고 전부인 사랑은, 가장 밑바닥까지 내던져진 헐벗은 영혼도 기어코 살아나게 한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시작도 끝도 없이 로지 사랑하는 당신에 대한 눈물겨운 깨달음이 일순간 나에게 말을 어왔다.


 "Amo: Volo ut sis."
"사랑합니다.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하이데거가 아렌트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에 적힌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훗날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다시 적은 그 말, 사랑은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갈망이다.
세상이 고통이어도 함께 살아내자고, 서로를 살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는 유일한 가치라고 말하는 네 개의 단어. ...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 신형철, <인생의 역사>



꽃이 피고 잎이 무럭 자라는 두 계절이 지나는 동안 나는 나 자신에 대 통찰해보고 싶었고, 그 사색은 머나먼 곳까지 갔다.  쓰기 글이 '사랑'으로 끝이 날줄은 몰랐다. 내가 쓰는 글이지만 언제나 글은 처음 쓰고자 했던 대로 끝나지 않을 때가 많다.


글을 쓰며 깨달았다.
글은 내가 쓰지만, 때로는 내가 쓴 이 글이 나를 어딘가로 데리고 간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끌림과 열린 길을 이제 나는 두려움 없이 믿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을.
그 길이 더 깊고 더 좁은 삶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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