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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aumazein Oct 04. 2024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어느 날 갑자기 아는 사람의 부고 연락을 받았다. 며칠 전까지 웃으며 인사하고 함께 얘기 나눈 사람의 갑작스러운 부고는 언제나 잘 믿기지 않는다. 믿기지 않았지만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하니, 검은색 정장 옷을 찾아 입고, 장례식장으로 찾아갔다.


함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인사도 하고, 다정하게 안부를 나누는 모습은 여느 결혼식장에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관혼상제가 인생의 애경사라더니 혼인 죽음 결국 모두 삶이 지나가는 흔적이라는 사실이 다가왔다.   


흰 봉투에 이름을 쓰다가 함께 갔던 친구가 울음을 터뜨린다. 그제야 나도 그분의 죽음이 실감이 나서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해야 하니 꾹 참고 있었는데, 건장하고 에너지 넘치는 영정사진을 보고는 나도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너무 울면 별다른 관계라고 오해받을 수 있어"라 농담으로 친구와 서로를 겨우 진정시 않았으면 제대로 인사 못 할 뻔했다. 이 생에서의 그분과 마지막 인사를.



그 일이 있었던 게 몇 년 전 이맘때쯤 도시 축제 기간이었다. 온 동네가 축제였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검은 독수리들이며, 밤하늘 팡팡 터지는 불꽃소리며, 왁자지껄 여기저기 곳곳에서 볼거리, 먹거리가 넘쳐나고 소란함이 가득한 가을이었다.


축제기간에는 거의 온 도시 사람들이 공원으로 나와 한 마을처럼 함께 즐긴다. 온 마을에 울려 퍼지는 떠들썩한 분위기이맘때쯤 돌아가신 그분이 생각났다. 그리 쏟아지는 환호와 음악 사이에서 나는 당신 떠올랐다.


친해진지 얼마 되지 않아 먼 도시로 이사를 가야 한다며 마지막 인사를 덤덤하게 건네던 열한 살의 소녀가,

중학교 시절 서로의 애칭을 만들어 교환일기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누었던 둘도 없는 단짝이었던 네가,

서로 헤어지기 싫어서 SKY대학은 너희 때문에 일부러 안 간다며 별빛 아래 잔디밭에서 백일주 마시며 웃고 울던 우리가,

찬란한 봄날을 같이 보고 싶었다며 벚꽃 잎을 한가득 싸와서 뿌려주던 세상 일등 로맨티시스트였던 그대가,

고작 보름을 떨어져 있는데 일 년 동안 못 만난 듯 편지를 써붙여서 이미 귀국해서 만났건만 한동안 집으로 계속 오던 그의 편지가,

어느 겨울밤, 전화도 없고 버스가 끊겨 먼 길을 벌벌 떨며 걸어온 나를 유일하게 기다리던 당신의 방 불빛이,

모든 나를 포기하고 오로지 너의 엄마로 지내는 나에게 매일 함박웃음으로 폭풍 같은 감동을 주던 너의 맑은 눈동자가,

어디서 무얼 하든 가장 큰 믿음으로, 가장 큰 응원으로 나를 지켜주고 있음을 아는 나의 뿌리 깊은 울타리가,

너랑 얘기하는 게 제일 재미있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아침 함께 마시던 너와 나의 짙은 커피 향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나를 불러 말없이 차려주던 잊지 못할 당신의 하얀 쌀밥과 따뜻한 된장찌개가,

그렇게 어느 날 내게 와서 멈춘 당신의 깊고 푸른 마음이.



내가 과연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가장 생각나는 것들이 무엇일까. 어떤 대단한 물질이나 성공의 순간도 아닌, 아마도 내 곁에 있었던 들과의 리고 뜨거웠던 지 않을까. 당신들과 나누었던 들이 지금 내 옆에서는 당장 사라지고 없지만, 나의 기억 속에서는 살아 숨 쉬고 있다.


심장이 튀어 나올 듯 폭발하고,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춤을 추는 불꽃놀이. 아름답지만 짧은 불꽃처럼 까만 밤하늘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너와 나. 혼자서는 쉬이 꺼질 수 있는 반짝임이지만, 작은 불씨와 불씨가 만나면 꺼져가던 불이 다시 살아나고 꽃이 되어 피어난다. 환상적인 놀이가 되고, 축제가 된다.


약하디 약한 유한한 생명체가 이 땅에 태어나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아있는 동안만 빛나고 사라질 테니 생겨나는 욕심도 부질없겠지만, 그래도 한 때 여기 있었 존재로 순간만이라도, 단 한 가슴속에서라도 빛나고 싶다.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유약한 생명이지만, 기억 속에는 영원히 남을 수 있는 끈질기고 아름다운 영혼이지 않은가.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아마도 그 욕망 때문일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존재가 존재에게 전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 바람처럼 진하게, 멀리멀리.


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리라. ('근사하다'라는 칭찬의 취지가 거기에 있다. '근사'는 꽤 비슷한 상태를 가리킨다. )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러나 한 예술가를 평가할 때 그런 기술적인 요소들보다도 언제나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다. 그런 통찰력을 갖고 있는 예술가만이 진실한 감정을 창조해 낸다. (27~28)
-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100퍼센트 정확하지 않아도 가장 근사한 값으로, 대체불가한 당신과 나만의 불꽃같은 순간들명철하게 표현하고 싶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으로 우리 안에 피었다 져버리는 진실한 영혼의 울림을 다시 게 하고 싶다. 

선명하고 진실된 창조함으로 당신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나는 세상에 전하고 싶다.


존재의 내부와 존재 자체를 통찰하는 것은 일종의 지적 즐거움이다. 내부에 있는 힘과 존재 자체의 힘은 만들어지는 것만큼이나 파괴되기도 쉬운 맹목적인 힘이다. 그 변화의 힘과 통찰력의 빛을 이어주는 법을 의식적으로 배울 때 비로소 자신을 창조적인 존재로 느끼기 시작한다.
- 줄리아 카메론, <The Artist's Way>


죽음은 언제나 삶을 더 살아나게 한다.

불꽃이 가장 아름다운 때가 연기로 사라지기 직전인 것처럼.


괴되기 쉬운 맹목적인 힘이지만 푸른 줄기가 꽃을 피워내는 힘.

 생명력으로 꺼져가는 불을 다시 오르게 하도록. 

쏘시개 같은 작은 불길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비 다시 피어나게 하도록. 


그것만이 내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도
수많은 가슴속에서 불변하며 찬란할 생명의 불꽃이기에.
꺼져도 꺼지지 않을 가장 처음이고 가장 마지막인 유일한 사랑이기에. 
나는 오늘도 글을 쓰며 나를 태우고 작은 불씨를 피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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