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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aumazein Oct 15. 2024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함께 울면 희극이지

La vita e' breve, La vita e' bella!

날씨가 눈부시게 좋다. 차를 타고 달린다. 차 안에 가득 흐르는 음악도 마음을 렁이게 한다. 마음 맞는 사람을 불러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날이다. 내키는 곳 어디든 가서 쌓였던 이야기를 한가득 풀어내고 싶은 날이다.  


그러나 어김없이 마음을 붙잡고 발길을 돌린다. '오늘은 차분하고 친절한 그 바리스타가 없군' 아쉬워하며, 그래도 집중은 잘 되겠다 생각하며, 창이 크고 풍경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오래된 노트북을 켠다. 해가 지기 전 느긋한 햇살이 나뭇잎을 여유롭게 달래고 있다.


암호를 누르라고 뜬다. 암호. 내 마음으로 파고 들어가는 시공간을 허락하는 암호. 헛돌고 겉도는 생의 시간들을 모아 은밀하게 표출하도록 시작하라는 암호. 오늘도 가까스로 성공이다. 가슴 들뜨게 하는 바람이며, 각나는 사람이며, 가고 싶은 그곳이며, 유혹하는 리가 가득한 계절이지만, 오늘 나에게는 그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약속한 나와의 시간이 있으므로.



살다 보면 일상에서 나를 다 발산하지 못해 갑갑할 때가 있다. 살아야 하니 해야 하는 일들이 있고, 체면 차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형적이고 틀에 갇힌 시간을 보 날이면, 내 안에서 물음이 가득 맴돈다.


'너는 이것으로 충분하니?'

'너는 정말 이것으로 충분하니?'  

돌아서서는 '아니, 나는 그렇지 않은데..' 마음에 그림자가 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삶에 고랑이 패이는 느낌이다.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은 보기 좋은 이랑 옆에 깊이 파여 물이 고이기도 하는 고랑.


고랑에 고인 물을 빠져나가게  시간이 필요하다. 바람이 불고 배수가 잘 되도록 뚫어서 다시 삶의 작물이 잘 자라도록 정비하는 시간이 절실하다. 내게 그 재정비의 시간이 글을 쓰는 이 시간이다. 그냥 두면 일상에서 흩어지고 말아 다시 찾기 어려운 생각들을 붙잡아 씨로 뿌리고 내 말과 행동의 기원을 찾아 내 안에 뿌리내리는 시간. 흙 속에 묻고, 물을 주고, 햇빛과 바람을 쐬게 하면 어느덧 글로 탄생한다.   


예전에는 그냥 쓰고 싶을 때 썼다. 당장 글로 돈을 벌 수 있는 실력도 아니고 억지로 앉아서 쓰려고 하면 작위적인 글 밖에 더 나오겠냐며 그렇게까지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끔이지만 쓰면 쓸수록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났다. 바라는 게 없으므로 자유로운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살기 위해 버리고 살던 내게 유난히 생겨난 욕망이 글이다. 감탄이 절로 나오게 너무 잘 쓴 글을 보면 그 재능이 탐나고 글이 욕심났다. 통이 좋은 글을 탄생하게 한다면, 내 고통이 모자란 것인가 의문하기까지 했으니!


그런데 고통이 충분하더라도, 재능을 타고났더라도 글을 잘 쓰는 지름길은 없다. 그저 쓰는 수밖에. 쓰고 쓰고 또 쓸 수밖에. 그리고 그렇게 쓰기 위해서는 우선 나와의 시간을 떼어놓고 사색하고 몰두하고 끈질기게 붙잡아야만 했다.

고독하고 고뇌하고 고립되어야 했다. 그래야 삶이 모아지고 글이 떠올랐다. 그고 나면 때로 카타르시스 같은 쾌감이나 희열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글밭 위에 풀어놨을 때, 이번에는 고랑이 제대로 파였구나 싶었다. 글은 그렇게 겉도는 나를 잡아둔 선물로 내게 다가왔다.


닥치고 글쓰기!

온갖 핑계를 대자면 안 쓸 이유가 너무 많기에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닥치고 일단 써야 했다. 그래서 글 연재를 시작했다. 쓰고 보니 터무니없는 문장들에 숨고 싶기도 하지만, 시작했다는 것에, 그리고 골몰하고 끝까지 보았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나를 유혹하는 것들을 눌러 앉히고 이 복잡 오묘한 생명체를 스스로 글 앞에 앉혔다는 것에 자찬해주고 싶다. 이제 이번 연재 마지막 을 쓰며 나에게 다시 묻는다.


그런데 너는 왜 쓰려고 하는가?

작가가 되고 싶어서? 돈을 벌고 싶어서?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그 어느 것도 아주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그 어느 것도 진짜 답은 아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잃지 않고 싶어서'이다. 량한 글을 단순하게 뽐내는 것이 아니라, 글이 삶을 다지고, 삶이 다시 글이 되게 하고 싶어서이다.  아무리 같아도 나는 여전히 유쾌하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서이다.



성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돌아보니 이 나이에 집 한 채 없는 건 우리 집뿐이었고, 부랴부랴 겨우 마련한 오래된 아파트 한 채는 얼마 되지 않아 그 값이 우습고 허망하게도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언제나 욕심이 화를 부르는 것인가. 다시 보헤미안처럼 집 없어도 마음 편하게 살자 싶었지만 은행빚 집의 시가보다 더 나가 팔지도 못하는 웃픈 현실이 닥쳤다. 되돌리고 싶어도 되돌릴 수 없는 뼈아픈 현실이었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삶에 묶여버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더 깊게 빠져버리고 허우적대는 내가 서글프고 열심히 버는 대로 은행에 다 갖다바쳐야하는 현실이 났다. 생의 제 중에 돈문제가 가장 쉬운 문제라고 하지만, 이 끝이 안 보이는 듯한 고난이 건강을 잃게 하고, 나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평온함에 균열이 가게 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긍정의 오기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삶이 아무리 바닥으로 나를 데리고 가려해도 그대로 주저앉게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좋아. 큰 집 아니니 청소하기도 쉬워. 내 집이라 이제 걸고 싶은 액자도 마음대로 걸 수 있어.'라고 찾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들에 감사하기 시작했다. 흔히들 고통을 피하기 위해 하는 합리화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욕심의 끝은 고통이 어쨌든 욕심을 버리니 어느 순간  평온해졌고, 이도 저도 못하는 묶인 삶이라면 나는 이 삶을 더없이 즐겨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은 쉽게 말해 낭만적인 삶이다. 내게 낭만적인 삶이란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그리고 또 마지막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낭만이 밥 먹여 주냐고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어떤 이들'의 말이지 내 말이 아니다.  나에겐 '밥'이 전부가 아니며 경제적인 부유함만이 전히 나를 살리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빚만 갚으며 절망스럽게 살고 싶지 않다. 모질어도, 아무리 사회가 닦달해도 그 속도에 맞춰 일만 하다 굽은 등에 생기 없는 눈빛으로 살고 싶지 않. 그렇게 나는 '나를 잃지 않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타인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날씨가 좋은데, 뭐 하고 있어?"

글 쓴다고 잠시 엎어둔 휴대폰을 젖혀보니 반가운 톡이 와있다. 이렇게 이유 없이, 용건 없이 문득 오는 연락이 좋다. 내가 나누어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도 그저 내 안위를 궁금해해, 나의 쓸모와 상관없이 그저 나라는 존재와 함께 있길 바라는 부름이 뭉클하다. 


인연은 삶과 비슷해서 슬프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고, 붙잡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다. 많은 연이 스쳐갔지만, 잡지 않아도 내곁에 남아있는 이들이 있다. 내게는 글만큼이나 해서 세상의 거친 바람과 휩쓰는 파도에도 손 놓고 싶지 않은 이들이다. 리가 서로의 전부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나의 눈물을 알고, 나음을 안다. 나 또한 그들의 굳은 마음을 알고, 그 굳은 살을 어루만 때를 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지만,
함께 울면 희극이 되기도 하지.

종종 내가 지인들에게 하는 말이다. 사람에 매여 관계가 내 인생을 다 채우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타인 없이 혼자 행복한 게 또 무슨 소용이겠는가. 글을 쓰는 일은 고립되어야 하고 고독해야 하지만, 글 쓴답시고 내 곁에 그들을 모른 척하고 싶지 않다.


'인생의 나약함과 이기적인 것보다 더 숭고하고 더 영원한 것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것은 사랑이다.'라는 어느 작가의 말에 뜨겁게 절감한다. 허나 사랑의 실현도 타인의 존재가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책을 볼 때마다, SNS를 켤 때마다, 영화를 볼 때마다 사랑은 넘쳐난다. 그럼에도 결코 쉽게 정의할 수 없지만 지금 내가 잠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내게는 관계만이 사랑이 아니고, 데이트를 하는 것이 사랑도 아니다. 누군가와 24시간 대화를 나누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며, 누군가를 위해 밤을 새워 희생하는 것만도 사랑이 아니다.


"만약 두 사람이 똑같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다면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리라."
- W.H. 오든


바로 이것이. 쩌면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이 행하기에는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나의 모자람을 보고도 나를 선택해 주는 당신의 감한 너그러움이고,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좌절할 때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이다. 나의 모든 나쁜 점을 보고도 나의 좋은 점을 말해주는 당신의 말이며, 내가 여전히 괜찮은지 확인해 주는 당신의 마음이 내게는 사랑이다.   


내면만 바라보는 사람은 혼돈을 발견할 테고, 비판적인 눈으로 외면만 바라보는 사람은 결점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연민과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바른 길로 나아가려고 분투하는 복잡한 영혼을 발견할 것이다.
- 데이비드 브룩스, <사람을 안다는 것>


을 통해 나는 나의 복잡한 영혼을 보고, 나의 분투하는 영혼을 통해 타인의 숨겨진 영혼도 끌어안고 싶어진다. 그리고 어떤 지성적이고 영웅적이고 이타적임을 자랑하는 글이 아니라, 언제나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위선적이고 이기적이기도 한 이지만 바로 그 속에서 내 글이 탄생하고 다시 삶 속으로 스며들길 바란다. 가장 위대한 것은 결국 오늘도 내일도 반복되는 살아있는 일상의 힘이라고 믿기에.


여전히 어렵지만 앞으로도 한 겹 씩 한 겹 씩 계속 나를 벗기고 탐문하며 글을 쓸 작정이다. 그리고 다가갈 것이다. 나의 위선과 겉마음을 벗고 홑겹의 나로 다가갈 때 함께 속내를 열어 보여주는 이들에게. 인생은 결국 고통이고 망망대해에서 나눌 수 없는 각자의 절대 몫이 있지만, 괴로운 마음을 함께 짐 지는 순간에 우리는 잠시라도 안도하며 착지할 수 있다. 


고통의 눈물 심으로 함께하면  끝에 우리는 웃을 수 있으며, 그런 웃음은 모든 것을 뒤집는 힘이 있다. 공명할 수 있는 힘이다. 벽을 무너뜨리면 다리가 되듯이 타인의 베인 마음에 나의 마음을 다리를 만드는 방법이 내게는 글이다. 작게는 내 곁을 지켜주는 이들과, 크게는 내가 모르는 어떤 이들과도 뜨겁게 울리며 연결되고 싶다.



'진짜  사랑할 용기 으신가요'라는 연재 글을 마무리하며 진짜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견할 용기부터 가져야 함을 깨달았다. 리고 타인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내 고통의 환부를 드러낼 용기부터 가져야 함을 다.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말을 빌려, '인간이 어떻게 삶을 버티고, 떠나기를 몰래 꿈꾸고, 저마다 홀로 피로와 시련을 감당해내는가 하는 것'에 늘 파고들며 글을 쓰고 싶다.


글이 나의 피난처이고 안식처이듯 때로 내 글이 누군가의 피난처이고 안식처가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위로가 없겠다. 글을 쓰며 홀로 서성이고 고독했던 나의 시간이 누군가의 고독한 시간도 영원처럼 안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의 고통과 당신의 고통이 연결되어 글로써 함께 공명하 나는 로 살아삶으로 쓰고 싶다.


La vita e' breve, La vita e' bella!
인생은 짧고, 그러니 아름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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