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과의 인연

새벽T톡 시즌 3-44

by 김은형

상쾌한 새벽 차 한잔의 힐링 새벽Tea톡 김은형입니다.




8년 전에 제자 정미가 미국 출장을 다녀 오며
실크블라우스 한 장을 선물했다.
디자인과 색감이 잘 맞는 옷이라 마르고 닳도록 입었더니
출판사에서 돌아오는 서울역에서 오른쪽 소매가 힘없이 북 찢어졌다.
대략 난감했으나 마침 서울역 롯데백화점에 '오브제' 매장이 생각나서
얼른 블라우스를 사 입고 대전행 기차에 올랐다.
그런데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 문득

“아! 오늘이 바로 실크블라우스와 인연이 다한 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인연 잡지 말고 오는 인연 막지 말라는 말이
단순히 웃기 위한 말이 아닌,
때가 되어야 비로소 만나고 헤어지는 시절인연에 대한 진리를 말함이었나보다.


만약 모든 일이 때가 되어야 비로소 생기고 사라지고 성취되거나 좌절되는 것이라면
그 자체가 모두 우리 삶의 하나의 리듬이거나 흐름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부처님은 뗏목처럼 흐르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실크블라우스가 낡아 섬유가 터지는 사고가 없었다면
새로 산 카키색 레이스 블라우스는 나와의 인연을 맺지 못했을 것이다.
사물도 사람도 가고 옴을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나와 8년을 함께 한 오렌지색 실크 블라우스는 내 삶에 가장 어둡고 힘들었던 터널을 밝혀주며 내게 힘을 준 옷이었다. 7년 전 그 블라우스를 떨쳐입고 안면도 교육청 교사연수 특강을 가던 길에 건양대병원에 들러 초기 위암이라는 건강검진 결과를 들었었다.


정신이 아득하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무엇을 어찌할 줄 몰랐지만 강의 약속을 지키느라 거의 3시간 거리를 운전해서 안면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교육장님까지 모두 나오셔서 나를 환대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뿐 아니라 오늘 강사님 블라우스 색이 너무 좋다며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위암선고를 받았다고 말할 틈도, 그래서 슬퍼할 틈도 없이 오렌지색 실크블라우스로 인해 나는 환하게 아름다운 특강강사로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나눠주고 돌아올 수 있었다.


하필이면 제자에게 블라우스를 선물 받았고, 하필이면 내가 좋아하는 실크블라우스인데, 힘든 시기에 오렌지색감으로 에너지를 주기까지 했던 귀한 옷이었다. 그 덕분일까? 나는 긴 시간을 돌아서 감사하게도 건강을 되찾았다.


귀한 옷과의 인연으로 내 삶을 또한 응원하고 지지해준 제자 정미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글을 마치고 나니 이제 비로소 내 귀하고 아름다웠던 옷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오렌지색 실크 블라우스와 함께 한 시간과 순간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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