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카페 서래수 커피를 마신다. 20
가볍게 시작한 커피와 카페 이야기인데 막상 마무리를 하려 하니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무게감에 시작도 못하고 글감을 찾고 구상하는 데만 3일을 흘려보냈다. 능란한 글쟁이들은 묵직한 이야기도 마치 춤을 추듯 가볍고 경쾌하게 풀어내지만 나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로 느린 춤도 추기 어렵다.
춤꾼은 삶의 길을 알기 위해 춤을 추고 글쟁이 또한 삶에 대한 탐구로 글을 쓴다. 춤도 글도 그 일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생명을 나누는 일임은 물론 카페에서의 커피 한잔 또한 생명의 에너지로 교류하고 공명하는 일이다.
누구라도 춤을 추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알 수 없다는 어느 종교의 잠언처럼 이제 누구라도 카페로 가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코로나 시대는 우리의 현실이다. 집콕의 일상에서 벗어나 카페에서 차라도 함께 마셔야 비로소 우리가 공생하는 존재들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카페 서래수 커피를 마신다’를 쓰면서 나는 비로소 카페 서래수 커피를 4년을 마시고도 어떤 커피를 마셨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고, 그 맛이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카페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또한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러나 줌과 톡으로 스마트폰에서 매일 만나는 가족과 동료들과의 기계적인 교통보다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과 우리는 더 밀접한 에너지로 공명하며 생을 나눈다.
이제 카페는 단순히 차를 마시는 공간만이 아닌, 역동적인 생명이 상생하는 공간임을 생각한다면 우린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해야 하고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며 깊은 내면의 에너지로 교류해야 한다.
너와 나, 우린 모두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들이다.
죽은 것은 마시지 않고, 만나지 않고, 교감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살아있는 우리의 생을 증거하고 함께 공생하는 전일체로서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거나 가파른 두오모에 오르며 삶의 위로와 구원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2009년 1월, 피렌체 두오모에 올랐다. 어쩌면 그곳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간절함으로 끝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가슴이 답답하고 어둠에 울렁증이 시작될 즈음 왼쪽 머리 위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들어왔다.
빛이 들어오는 작은 쪽창을 통해 피렌체의 붉은 지붕들을 살짝 훔쳐보니 약간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불과 열 걸음도 되지 않아 정상의 문에 다다랐고 피렌체 시내 전체가 발아래로 한가득 펼쳐지면서 가슴이 탁 트이는 장쾌함을 경험했다. 쪽창으로 엿보지 않았더라면, 저 아름다운 풍경의 장쾌함이 더 실감 났을 텐데 너무나 아쉬웠다.
자신의 생각에 빠져 조바심을 내기 시작하면 더 큰 스케일의 그림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때 크게 깨달았다.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앞사람의 뒤꽁무니만 바라보며 어둠의 계단을 오를지라도 묵묵히 걸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피렌체의 높은 두오모에 올라야만 ⌜냉정과 열정사이⌟의 주인공들처럼 상처가 치유되고 사랑을 되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높이 솟은 피렌체의 두오모가 아니라 카페 서래수의 낮은 커피 잔 안에도 구원은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비로소 조금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은 마치 어떤 커피를 마셨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마셨는가에 따라 똑같은 커피 맛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게 되는 것과 같은 경지라고 해야 할까?
높고 낮음의 절대 기준이 없는 것처럼 커피 맛 또한 절대 기준은 없다. 우리 삶도 커피 맛처럼 같지만 다르다. 높지만 낮고 낮지만 높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 삶은 리듬을 타는 노래가 되고 춤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카페 서래수 커피를 처음 맛봤던 2018년 즈음에 나는 타자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온전한 내가 상처투성이의 너를 돕고 구원한다는 교만과 어리석은 아상으로 가득했다.
이를테면 피렌체 두오모에 올라야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는 멍텅구리 고집불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적어도 시선을 자신 안으로 돌려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두오모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 삶의 의미에 접근해 가기 위해 한잔의 서래수 커피를 마신다.
죽은 것은 마시지 않는다.
죽은 것은 만나지 않는다.
죽은 것은 나누지 않는다.
죽은 것은 손잡지 않는다.
죽은 것은 춤추지 않는다.
죽은 것은 오르지 않는다.
죽은 것은 마시지 않고 오르지 않고 춤추지 않고 교류하고 교감하지 않는다.
죽은 것들은 서로의 삶을 어루만지고 등 두드리며 두 팔 열어 포옹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서래수 커피 한잔의 따끈함으로 입 열고 맘 열고 서로의 생과 삶을 온전히 열어젖히며
피렌체 두오모 정상의 장쾌함처럼 경쾌한 삶을 그려나간다.
생의 봄을 지금 여기,
생명에너지 가득한 보티첼리의 우아함으로 그림처럼 그려나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카페 서래수 커피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