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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Apr 12. 2019

예술로서의 영상  

디지털 이미지와 영상  

1984년 백남준이 총지휘했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은 미국, 한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생중계되었던 야심 찬 비디오 아트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 자체가 비디오 아트의 역사에 기록될 터이지만, 피터 가브리엘, 로리 앤더슨이 함께 참여한 초기 뮤직비디오의 형식을 보여주는 실험적 영상도 눈여겨 볼만하다. 뉴욕의 전위예술가 로리 앤더슨과 영국 밴드의 리드 보컬이었던 피터 가브리엘은 기술적으로 투박하지만 의미 있는 컬래버레이션을 해냈던 참이었다. (두사람은 이 비디오에서 당시에 개발되기 시작한 CG를 흉내내는 신체동작을 선보이지만 특별히 그래픽으로 처리된 특수효과는 없었다. 그들은 TV의 특수효과를 몸짓으로 진지하게 흉내내면서 이를 풍자하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 전통적인 미술영역과 매스미디어가 본격적으로 만나 문화의 상호 모방을 선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징적 깃발이기도 했다.



예술의 범주 확장



60,70년대 기계로 복제되는 이미지들이 무차별로 쏟아지는 매스미디어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순수미술 Fine Art 은 나름의 변화를 모색해 내었다. 디지털 프로세스가 일반화된다면 현재 통용되는 이미지는 어떠한 것도 원본의 가치와 권위를 지니지 못한다. 소위 '순수미술'이라고 지칭했던 것들의 권위는, 유통의 과정에서 거리와 물질의 성질이 소멸되면서 단지 복제라는 순환 안에서만 예술품이라는 원본의 가치를 유추해 낼 뿐이다. (우리는 모나리자의 원본을 보기 전에 이미 화보 속의 모나리자를 보았다.) 영상적으로 확보되는 어떠한 창작물도 정보로 전달된다. 이러한 환경 변화들은 순수 회화의 극단적 추상화와 극단적 사회화를 동시에 만들어 내었다. 순수 회화의 추상적인 양식은 어쩌면 기계 복제 시대의 디지털 환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미술관 안의 미술작품들이 유달리 자기 지시적 성격을 (스스로 예술품으로서의 상징과 숭고함을) 띠게 된 것은 매스미디어가 지닌 사실성, 즉각성을 의식한 결과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칸트의 미학적 영향을 받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의하면, 예술은 미, 기술, 탁월함, 완전성에서 응용적인 실용적인 목적이 없는 미적 완전함을 지녀야 하는 그 무엇이다. 테오르도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마르쿠제 등은 이 분야의 미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던 주요한 사상가 들이다. 이러한 미학적 기초들은 '사회적 생산자로서의 작가 the Author as Produccer'를  정립했었다. 발터 벤야민은 더 나아가서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전통적 예술은 유일하게 태생적인 고유함으로 인해 '현존하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그는 도래하는 기계장치에 의한 이미지의 출현도 하나의 민주적인 잠재적 가치로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었다. 유통의 구조나 매체가 우리의 직접적 경험에 앞서는 경향이 있기에, 원본 조차도 이제는 디지털 이미지의 대량적 유포 방식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가 순수 예술의 권위, 즉 영적 분위기를 손상시킬 수는 없다고 간주했다.


마샬 맥루한 Marshall McLuhan도 미디어가 지닌 새로운 감각에 관해 많은 지적을 한 비평가 중의 한 명이다. 오래된 배급 형식과 새로운 미디어 사이의 대조가 우리가 예술품에 관해 지니는 토대를 바꾸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미디어가 메시지이다'라는 말은 전달 방식 자체가 결정하는 구조화된 의미작용에 관한 주요한 핵심을 포착하고 있다. 물적 토대가 사라진 디지털 이미지와 영상들은 다양한 양식, 문학, 고급과 저급이 상호 교차될 수 있는 토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솔직히 기술과 작가들의 노동의 과정 안에 순수하게 만드는 본질적인 그 무엇이 과연 존재하는 가?'에 관한 의문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고 일어난 것이다. 순수미술의 사회적 생산자의 위치는 포스트모던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실상 모든 문화적 자원이 서로 교차하는 혼성모방의 시대로 변화되는 것이다. 뮤직 비디오의 초기 형식, 로리 앤더슨과 같은 전위적 작가들의 팝문화의 차용은 매스 미디어에 관한 의심스럽긴 하지만 적극적인 예술의 범주 확장에 관한 모색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게 살펴볼만하다.




시물라크르


척 클로즈 Chuck Close는 촬영된 인물 사진을 토대로 그것을 사실보다 훨씬 사실적으로 붓으로 묘사하는 극사실주의 작가이다. 하이퍼 리얼리즘(극사실주의)으로 명명되는 이러한 회화 유파는 사실상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사진의 픽셀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옮기며 사진의 특성과 속성을 회화적으로 구현해 내는 것이다. 사진은 인화된 잉크의 작은 점들이다. 픽셀, 그레인 점들이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정밀한 밀도로 인쇄 종이에 프린트되면서 우리는 사실에 가까운 형태로 사물을 인지하게 된다. 그래서 척 클로즈의 회화는 후기로 가면서 점점 더 그리드로 구획된 평판 스크린 위로 색의 점들로 표시되는 픽셀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점차 변화하게 된다.


척 클로즈가 그린 Philip Glass의 초상, 1969


척 클로즈의 포토 리얼리즘은 사진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이미지의 속성을 회화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가 그리는 실제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미지이며 누구에게나 고민 없이 받아들여지고 교환될 수 있다. 그러나 가까이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사실상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센스에 기록되어 인쇄되는 이미지를 재현한 것이다. 이것은 장 보드리야르가 주장했던 시물라크르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모조물'이라는 개념을 통해 대중들에게는 이미지가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카메라로 재현되는 영상의 실제감이 훨씬 자주, 일상적으로 우리와 소통을 하게 되기에, 디지털로 재현되는 이미지는 실제처럼 교환되는 하나의 기호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하는 현상을 그는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으로 정립하고 있다.


Untitled, 신디 셔먼 1981


신디 셔먼 역시 영화적 여성성을 사진 작품의 소재로 끌고 들어와 이미지의 현실 왜곡을 드러내는 작가이다. 신디 셔먼은 스냅사진에 가까운 포즈의 일상 속 여성으로 작가 스스로 모델이 되는 셀프 초상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다양한 여성성을 드러낸다. 초기의 흑백사진은 점점 더 헐리우드 영화 속 인물을 암시하는 여성으로 변하고 갈수록 극적인 이미지가 덧 붙여진다. 이 인물들은 미국 영화를 따라 하는 개인적인 여성인 동시에 철저하게 공적인 이미지의 여성이기도 하다. 영상 이미지가 거울처럼 여성들의 아이덴티티를 반영하게 하는 비현실적 속성을 그녀는 자신의 초상을 통해 분열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 같다. 영화의 스틸의 형식을 차용하는 이러한 사진 작품들은 영화가 지닌 통제적 속성이나 현실보다 우선하는 왜곡된 가면으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이퍼 리얼리즘 작가나 현대 매스미디어의 영상적 속성을 곧잘 차용하는 이 시기 작가들은, 미디어의 대중문화적 속성을 차용하면서 여전히 그 사회적 생산성을 진지하게 다루고 극복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1980년대 이후의 예술은 미디어와 순수예술이 상호 영향을 미치며 서로가 서로의 양식을 차용하는 시기가 되었다. 순수예술 범주에서의 사회적 생산성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영화나 미디어에서의 현실 경험은 훨씬 광범위하고 직접적이기에 우리는 어디까지나 미디어의 영향 아래에서만 예술의 의미도 재고해 볼 수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여전히 마샬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그룬드버그 A. Grunberg, 가우스 K. Gauss의 저작을 참조해 볼 수 있다.) 들뢰즈나 보드리야르, 프레드릭 제임스는 영상에 관한 많은 비평을 하면서 이제 문화의 커다란 줄기로 자립잡은 영상 매체를 문학과 텍스트를 넘어서는 영향력있는 문예형식으로 인정하고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공간의 탐색과 영상적 시간


Corridor Installation 브루스 나우먼, 1970


확실히 영상이 예술적 경험으로 다시금 그 범위를 넓혀가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부르스 나우먼 Bruce Nauman은 거대한 벽면으로 좁은 복도를 설치한 뒤 그 끝에는 현재 그 복도를 비추는 두 개의 모니터를 설치했다. 관람객이 걸어 나가 모니터에 다다르자 두 개의 모니터 중 한 곳에 자신이 걸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모니터에는 아무도 비치지 않는다. 관객은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좁은 빈 공간을 통해서 마주하게 되는 비디오를 통해 마주하는 자신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낯선 시간과 공간의 모습을 마주 할 수 있게 해 준다.


부르스 나우먼은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예술과 경험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작가의 길을 걸었던 독보적인 개념예술가이다. 그의 작업들은 인간의 신체나 짐승의 부위, 문자, 영상 등을 활용하여 복잡하고 다양한 갈래의 개념을 실험적으로 설치하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작가에 속한다. 그가 특히 영상을 활용하여 제시하는 영상적 실험은 공간에 관한 관객들의 반응을 유도하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되어 모니터에 제시되는 시간은 현실 경험을 왜곡하고 우리에게 다른 시간을 선사한다. 녹화된 영상은 실제적으로 인식되지만, 우리는 기계적 시간과 동작의 일부가 되어 지각적인 무력함을 경험한다. 부르스 나우먼의 작품은 아마도 이러한 영상적 시간, 공간들이 제시하는 현실에서의 이탈을 기묘하게 비틀고 경험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익숙한 미디어의 장치를 낯설게 경험하게 한다.




영상이 특히 공간적 경험을 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영화감독이나 영상 작가들에게는 매력적이면서 도전해 볼만한 주제임에는 틀림없다. 멕시코 출신의 영화감독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2019) 형식면에서 공간에 관한 해석이 단연코 이 영화의 주제임을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명확하게 한다. 알폰소 쿠아론은 흑백으로 촬영된 이  영화에서 최대한 인물들의 극적 행동이나 색감들을 배제하고 공간 속의 움직이는 인물들의 관계에 주목한다. 카메라는 천천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패닝 하며 인물들이 살고 있는 공간들을 천천히 묘사해 내고 있다. 흑백과 롱테이크는 당연히 오슨 웰즈의 흑백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아마도 흑백 필름이라는 아날로그 방식의 다큐 형식에 대한 존중감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러면서 일상 속에 놓인 시간과 삶을 직면해야 하는 인간적인 숙명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카메라의 패닝은 어쩌면 VR 카메라의 공간적 탐색을 흉내 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좀 더 미학적인 전통에 걸맞는 우아한 구도를 지니고 있다. 몽타주가 줄 수 있는 환영적 심리가 아니라, 완전한 거리와 공간 묘사를 통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철저하게 공간에 대한 관조와 객관화를 탐색한다. 익히 알려진 그의 롱 테이크는 영상이 관객들과 함께 경험할 수 있는 공간적 탐색을 통해 어떠한 현실의 미적 구성과 예술적 성취를 구체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공존 


매스 미디어나 영화를 예술로 활용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전통적 비평가와 교육계에서 미디어는 비판적 매체이다. 특별히 전통적 순수예술은 (미술관이나 권위 있는 매개공간처럼) 어떠한 특정 공간에서 그 가치를 결정하게 한다. 모든 것이 정보화 된다면 현실세계의 예술적 권위는 따라서 특별한 권위있는 장소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미디어는 반혁명적이며 수동성, 무력감을 조장할 수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처럼 특정 자본이 주도하는 영상물은 부르주아의 취미를 만들어 내며 사회적 통제를 추구하는 세력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고 본다. (텔레비젼에 관하여,1999) 그렇다면 순수예술은 아직도 사회적 생산성과 일상 경험의 변화를 민주적으로 해내고 있을까? 어떠한 본질적인 가치를 내재하고 이를 사회 구성원과 공동체의 교육적 기제로 활용하고 있을까? 영상 미디어가 지니고 있는 현실적인 잠재력과 오랜 성취가 단지 부르주아 세력의 전략적 선전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몇 가지 긍정적인 영상 예술의 성취에 관해 목격해 오고 있다.


철저하게 아날로그의 영상 제작방식과 디지털의 유통방식이 점차 분화되고 있는 경향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름에 대한 영상제작자들의 존중감과 네트워크로 배포되는 디지털 소스는 미적으로 기술적으로 나름의 생태계를 유지하며 안착해 나가고 있는 듯 하다. 영상 컬러그레이딩의 색감은 필름의 70년대 인화방식에서 구현되던 그 당시의 색감을 따르고 있다. 어쩌면 르네상스 시대의 색감을 아직은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영상과 디지털 정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할 수는 없다. 아날로그의 영상 제작 전통과 기술들 - 미쟝센, 문예적 형식, 편집의 몽타쥬 등 - 또는 배포나 가공의 방식으로서의 디지털 프로세스는 어느정도 구분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가 나름의 영역 분화를 하며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해 나가는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술로서의 영상은 이제 첫걸음을 떼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어느정도 영상이 형이상학을 압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아마 고향의 멕시코 주변부 마을을 그 영화의 무대로 설정했듯이, 앞으로 도래할 시대의 예술은 특정 공간에서 저절로 성취되는 강단의 미학이 아닐 것이다. 기술과 공간, 경험의 확장과 탁월함이 공동체와 함께 삶의 기제로 자리 잡는 그러한 양태로 나타나지 않을 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특히 한 시대의 의미 있는 작품들은 교훈과 교육, 유산이라는 고유한 삶의 방식과 결부되어 왔다는 오랜 인간의 방식들을 생각해 볼 때 당연히 그렇게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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