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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김현정 Jan 26. 2022

에세이스트와 윤회, 그리고 주문

[에세이] 소설쟁이가 수필을 쓰는 이유

2021. Autumn. 제주, 정방폭포, 코닥 컬러플러스200 필름
 무언가를 잘하고 있음에도 불만감이 엄습한다. 

너무 쉽게 잠식된다. 분명히 잘살고 있는데, 마땅히 할 수 있는 만큼 잘. 그럼에도 스스로는 왜 본인 기대보다, 예상보다 혹은 타인의 욕망보다 한참을 못미치는 지. 그 간극이 그저 안타깝기만 순간은 영원처럼 다가온다. 따라잡기에는 숨만 벅차오르는 비극일 뿐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게 된다. 결국 지쳐나가 떨어질 즘에서야 모든 건 등 뒤로 발끝으로 길게 이어진 그림자와 다름없음을 알게 된다. 너무나도 늦게, 붉은 해마저 산 등성이로 사라지고 난 뒤에서야. 비극은 비극임을 알았을 때 완성되듯 그 순간은 영원히 박제되어 살아간다.     




 그럴때면 먼 곳에서 온 편지를 열어보곤 한다. 친애하는 친구가 옛날 옛적의 나를 그리워하며 썼을 편지. 글자들은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고 태양이 내리쬐어도 불타지 않는다. 사연 많은 이의 눈물에 젖어 들어 흐물흐물해져도 다시금 빳빳히, 새겨졌던 그 시간에 굳어있다. 말라 비틀어져도 굳건히 붙어있는 딱지처럼, 흉이 지더라도 영원할 상처처럼 그렇게 계속 존재하겠지. 그러니 별 수가 없다.      

2021. Autumn. 제주, 사계리 산방산 앞, 코닥 컬러플러스200 필름


 쓰고 싶은 소설, 혹은 글이 참 많은데 시간과 체력이 영 부족하다. 이쯤되면 나만의 알짜배기 루틴을 만들거나 아니면 이 부족한 상태 자체에 단념하는 것도 방법일텐데, 멍청함은 스스로를 이토록 어렵게 살게 한다. 괜찮아. 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모든 고통을 또 잊고 살 만큼 충분히 멍청하니까.     



2021. Autumn. 제주, 삼양 검은모래해수욕장, 코닥 컬러플러스200 필름


 첫 문장을 쓰는 것도 어렵다. 어쩌다가 또 이 모양이 되었는지. 언제는 글을 편히 썼던가? 막상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심지어 괜찮다 싶은 글을 골라 퇴고를 할 때에도 문장이 너무 엉망이라 스스로 너무 쉬이 썼던 날들을 미워하곤 했다. 벌써부터 미래의 내가 또 열렬히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파도가 친다. 내 오른팔 팔꿈치를 암초로 두고 파도가 치고 올라온다. 까만 물방울이 사방에 튀긴다. 그걸 주워다 글자로 옮긴다. 오랜만에 루이보스 앤 시나몬 티를 끓였다. 갑자기 분위기는 크리스마스 인 유럽. 오늘 밤에는 밤새도록 비가 퍼붓는다고 했다. 창밖엔 시절 좋은 풀벌레가 신명나게 울고 있다. 비가 왕창 오면 그들은 어디로 가려나. 그때에도 걍걍왕왕 울고 있으려나. 팔자 좋은 누런 인간은 차나 홀짝이며 글을 쓴다. 자기가 뭘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잘도 쓴다.     



2021. Autumn. 제주, 우리집, 코닥 컬러플러스200 필름

 누군가가 읽을 때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 글을 쓰고 있다. 수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손 가는 대로 줄줄 적는다. 이 흐름을 잃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를 쓰는데 망설이고 싶지도 더듬고 싶지도 지우고 싶지도 않았다. 어짜피 나만 보고 나만 소비할 것이라면 무엇이든 괜찮다며 다독이고 또 응원하면서 누가-내가?- 콱 즈려밟고 간 내 의기를 고쳐놓고 싶었다. 그러니 멈추지 말고 쓰자. 몰아치는 파도처럼 단어와 문장을 토해내고, 말 같지도 않은 것들을 연결하고 떼어먹고 잃어버리기도 하면서. 누군가는 이를 읽고 배멀미를 하겠다만 누군가는 신명나는 노래소리로 또는 여행길의 바운스 정도로 함께 해주겠지.     


 이번 여름처럼 더위에 고통받지 않았던 여름이 없었다. 그저 아름답게 빛나기만 했던 이 여름을 아쉽지만 보내줘야지. 이제 우리에겐 가을이 온다. 벌써부터 두 번째 사랑의 향기를 닮은 가을 내음이 맡아지는 것은 기분 좋은 착각이겠지. 새파랗게 구름 하나 없는 하늘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착각. 태어난 지 한 해도 되지 않았을 잠자리가 부지런히 날아드는 가을 아침. 조금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쓰고, 욕망만이 가득한 두 눈을 꼭 감아본다. 무언가를 다시 할 수 있는 힘, 새롭게 시작하거나 이미 하고 있는 것들을 더 잘해보겠다는 마음이 드는 그런 힘. 가을빛을 따라 퐁퐁 샘솟기를 바라며 찬란하던 여름을 보내주려 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올 초의 겨울을 지나 어른이 되어간 봄날, 하루하루를 사랑했던 여름을 건넜다. 이제 2021년, 연도표기도 익숙해질 가을이 온다. 두툼한 남방을 걸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다. 미래는 언제나처럼 이토록 두근거리는 날들이길 바래 본다.      


 언제나 그랬듯 글을 끝마칠 때면 첫 문장을 쓸 때 가슴께에 얹혀있던 추를 걷어내며 가벼워진 엉덩이를 툭툭 털어낸다. 내일은 정말 소설을 써야지. 행복하게 글을 써야지. 이 말도 안 되는 주문을 걸기 위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수필을 계속 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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