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잘 기억하는 방법
아, 처음 가는 곳이구나!
문득 비행 스케줄을 보다가 작게 소리쳤다. 다음주에 사우디아라비아 어딘가 소도시에 가야 한다.
구글링을 해보니 이런 곳이 있었나 싶다.
아니 뭐 압둘 어쩌고 공항인데 진짜 한국인에게는 처음 듣는 장소다. 현지에선 유명한것 같긴 한데, 여기가 어디뇨?
가본 적 없는 공항에 처음 갈 때는 평소때보다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공항 차트도 더 살펴하고, 날씨같은 것도 더 꼼꼼하게 확인한다. 이미 갔다온 적 있는 동료들의 경험 조언도 들으면 금상첨화다.
"거기 공항에 approach할때 조심해야할거 있어?"
"관제에서 좀 고도를 high하게 주는 경향이 있으니 미리 속력을 좀 줄여주는게 좋아"
몇 주전 해당 도시에 이미 비행 다녀온 요르단 출신 친구가 대답한다. 여기에 '요즘 날씨가 매우 더러워서 터뷸런스도 매우 심하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고도를 high하게 준다'는게 무슨 의미냐면, 예컨대 나는 이 거리에서는 대략 10,000ft에 있어야 해당 공항에 타이밍 맞게 착륙할 수 있는데, 관제에서는 15,000ft 를 준다는 의미다.
이러다가 잘못하면 공항에 못내리고 그냥 지나칠 수 있기에 파일럿들은 미리 속력을 줄인다든지 강하율을 높인다든지 등의 대책을 세운다. 그걸 미리 대비하라는 의미다.
꼼꼼히 준비했으니 별일 없겠지. 어느 정도의 긴장감과 기대감을 갖고 짐을 꾸린다. 자, 오늘도 무사히.
비행과 멀리 나가는 여행의 공통점이 있다. 새로운 곳을 간다는 설레임을 갖고 낯선 곳으로 가는 동안 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비행하면서 생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한다.
순항고도에 이르러 밖을 쳐다보면 특히 저녁때는 비행기 밑 도시가 수많은 밝게 빛나는 점의 모임처럼 보인다.
그 점들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고 선들은 커다란 덩어리로 다시 뭉쳐진다. 그 점 하나하나가 다 우리가 살고 있는 흔적이겠지.
저 점 안에는 희노애락이 있고 누군가의 삶이 있을 것이다.
웃음을 잃지 않는 천방지축 어린이가 그려지고, 한창 자식들에게 줄 요리를 하고 있는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진다. 애들 주겠다고 치킨 한마리 사고 들어가는 고단한 퇴근길 아버지의 뒷모습도 보인다.
이러한 것들을 상상하는건 크나큰 즐거움이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Esse is percipi)'
17세기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인 조지 버클리가 한 말이다.그는 대상은 인식됨으로 인해 의미를 갖게 되고, 우리들은 서로를 인식하면서 존재하게 된다고 봤다.
그는 내게 있어서 지루한 일상에 '의미'를 안겨줬던 철학자로 기억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내가 비행할 때 봤던 하늘 아래 저 밝게 빛나는 점들은 내가 지각함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셈이다.
그러고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단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네게 이름을 불러주니 '나의 의미'가 된다는 그 구절 말이다.
지도를 보면 가본적 없는 수많은 장소들, 비행을 하면서도 가지 않은곳 가야할 곳 그리고 가고 싶은 곳이 너무나 많다. 그곳이 어떨지 미리 상상을 하며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것은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 가지고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도 든다. 존재를 단순히 지각하는데서 그치고 싶지는 않다. 그 의미를 더 느끼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많은 곳을 다니고 누비면서, 내 지각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공간들을 계속 추억하고 싶다.
굳이 파일럿으로써 가지 아니해도 된다.
백팩 대충 둘러메고 가기만 해도 신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품게 되는 날, 언젠가는 이렇게외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존재하는 것은 기억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 장소들은 영원토록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