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lying Johan Aug 11. 2023

나이많은 부기장의 바람직한 자세

고인물과 뉴비사이

따르르르릉


기분이 싸해진다. 늦은 저녁에 전화가 오는 것 치고 좋은일이 없다. 수신자를 보니  'OPS(operations)' 라 크게 써져 있다. 한국어로는 운항본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작게 한숨이 절로 쉬어진다. 본부에서 이 야심한 밤에 내게 사랑을 속삭일리도 없고 (실제로 그래도 꽤나 무서울듯), 분명 일과 관련된 용건이기 때문이다.


"아 유 퍼스트 오피서 ㅐㅇ챙웡ㅇ???" (항상 이렇게 부름)
"네 맞는데요." (포기함)
"두 시간 뒤 뭄바이 비행 가능해?" (이거 물어보는거 아니고 그냥 가라는거임)
"네" (어차피 네라고 할꺼 왜 물어보냐)


이번 스탠바이는 무사히 지나가나 했는데 역시나 나는 일복이 많다. 짐을 꾸리고 비행갈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하는둥 마는둥 샤워를 끝마치고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같이 비행할 캡틴을 확인해본다.


"와, 94년생이잖아!!!"


감탄이 절로 나온다. 1994년생이란건 서른살도 되기 전에 기장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마 이 기장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비행을 시작했을 것이다. '인도 국적이니 군대도 안갔을테고…나이를 보니 대학도 안갔겠네. 아마 돈 많은 부모님이 비행훈련 전액 다 스폰해줬겠지' 별 생각이 다 든다.


'근데...나는 지금까지 뭐했지….?'   


'근데...나는 지금까지 뭐했지….?'


#. 나이란 무엇인가


나이 문제는 참으로 오묘하다. 우리만큼 나이에 신경쓰는 민족이 있을까. 한국인에게 있어 나이란 원초적인 지위 척도의 수단이자, 언어관계까지 바뀌는 도리이자, 그 자체로 (특정 나이까지는) 권력이 되는 요소인 것이다.


이제는 외국물 쫌 먹은 나는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직도 같이 비행하는 크루들 나이 세는거 보면 정신을 못차린 것 같다.


그렇다면 외국인들은 정말 나이에 아무런 감정이 없을까. 새파란 젊은이가 백발 성한 할아버지에게 “나이 많은게 어쩌라고? 누가 칼 들고 먼저 태어나라고 협박했나?”라면서 물 떠오라고 시키는게 아무렇지도 않은 문화일까나.


글로벌 도시인 두바이에서 오래 거주하면서 지켜본 결과 그러지는 않은 것 같다.


미약하지만 이곳도 나이에 따른 관계가 분명 존재하며, 그것이 권력관계는 아니더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존경(respect)을 표하는 그런 정도의 의식은 있다.


'그래도 그렇지 거의 10살이 차이가 나는데 신경이 안쓰이겠냐...'


외국인들은 정말 나이에 아무런 감정이 없을까. 젊은이가 할아버지에게 “나이 많은게 어쩌라고?”라면서 물 떠오라고 시키는게 자연스러운 문화일까



#. 부러움과 질투심 사이


나이가 많이 어린 기장을 볼 때 가장 먼저 느끼는 내 감정은 부러움이다.


30대 후반으로 앞으로 가야할 길도 까마득하고 배워야 할것도 익혀야 할 지식도 엄청 많은데 이들은 이미 그 길을 먼저 끝냈기 때문이다. 훈련소 먼저 입소한 친구가 그렇게 부러웠던 군대처럼.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옹졸한데 내가 지금 외항사에서 일하고 있기에 어린 기장이 같은 한국인이 아니라서 좋다는 의미다.


아마 현실적으로 열살 어린 한국인이 기장이고 내가 부기장이면 그쪽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할 것이다. 비행할때는 기장인데 사회에서는 내가 대학교 선배거나, 같은 동네 출신 형동생이거나 하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근데 쓰면서 현타가 오네. 그깟 나이가 뭐라고 진짜...


이밖에 '얘는 어쩌다가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이 길에 올인했나' , '역시 한 우물을 파는 것이 답인건가' 싶기도 하고 여러 생각이 든다. 이건 내가 특히 남들보다 늦게 비행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내가 나이에서 느끼는 상념들은 '지난날 나는 무엇을 했나'란 생각과 맞닿아 있다. 적어도 내가 어렸을 때부터 비행을 계속 해왔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대부분 이렇게 젊은 나이부터 비행 장인의 길을 걷는 기장은 또 나에게 흥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특히 파일럿이 되기 전에 저널리스트였다고 하면 더욱 눈이 반짝반짝 거리곤 한다.


유명인들 많이 만났냐 어디 담당이었냐 어디 채널이었냐 추가 질문이 무슨 이직 면접 보듯이 쏟아진다. 남의 떡이 커보이는건가.


비오는 어느날 뭄바이 공항에서


#. 나는 뭔가에 몰두하는 사람이었나


생각해보면 나는 원래부터 정신없게 살아왔다. 후회는 없지만 다만 '스무살부터 지금까지 온전하게 시간을 한 가지에 몰두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란 아쉬움은 든다.


호기심은 많아서 이것저것 시도했다가 마무리 하지 못하고 중간에 버려야만 했던 것들, 낭비했던 시간과 노력들이 참으로 많았던 지난날들.


심지어 스타크래프트도 그렇다. 그렇게나 오래 했는데 래더도 찍지 못했다. 그깟 게임 래더가 뭐냐 하겠지만 그래도 짬밥이 거의 20년인데...이게 다 무언가를 진득하게 못해서 그렇다.


시간은 유한하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내게 선택의 시간들이 계속 올 것이다.


게임으로 치면 한 서버에서 고인물이 되는 것과 어느정도 하다가 뉴 게임을 하는 것이 있다면, 나는 지난 날에는 어느정도 게임을 하고 나면 계정을 새로 파서 새로운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판단력도 흐려지고 언제까지고 이런 플레이가 먹히지는 않을 것 같다. 결국 어떤 영역에서는 고인물이 되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데, 비행에서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솔직히 되고는 싶다)


어려운 문제다.


새로운 항공 지식을 얻을 때 재미있나?

더 비행을 잘하고 싶나?

나는 비행할때 애정을 느끼는가?


다행히도 현재까지의 내 답변은 "YES"에 가까운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같은 대답이 나올 수 있게 더 노력해야겠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면서 계속 다잡아야겠다. 고인물의 길은 멀고도 험한 것이니..

이전 01화 파일럿이 됐는데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