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쟁이가 된 자신을 한탄하며
퀴즈하나. 파일럿들이 일이 손에 안잡히고 마음도 가장 콩밭에 있을 시기는 언제일까?
정답은 매월말이다. 보통 월말이 되면 파일럿들은 마음이 분주해진다. 항공사마다 다르지만 보통 다음달 스케줄이 전 월말에 한꺼번에 나오기 때문이다. 이를 보고 대충 앞으로 한달간의 계획을 짤 수 있다.
새로운 것을 접하기 전에는 누구나 마음이 설렌다. 나도 예외가 아니라서 항상 다음달 스케줄은 어떨까 시간이 날때마다 회사 어플리케이션에 접속해 새로고침을 계속 눌러보는 것이 일과가 됐다.
새로운 스케줄이 뜰때마다 누구는 쾌재를 부르고 누구는 좌절하고는 한다. 각자 선호하는 비행일정이 있어서다.
보통은 좌절할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가고 싶은 곳 비행이 있었는데 못나와서 그런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결혼기념일 생일 같은 기념일에 스탠바이가 걸리는 경우도 생긴다.
때로는 정말 가기 싫은 사람과 같이 비행이 같이 걸리기도 한다.
'아 이번달도 망했네....‘
다음달 스케줄을 확인해보니 한숨만 나온다.저번에 이 캡틴 맞춰주느라 진짜 힘들었는데 또 걸렸네. 아니 회사 안에 수백명이 넘는 다른 캡틴들이 있는데 나는 왜 항상 이 사람만 걸리나.
거기에 무슨 밤비행은 이렇게 많고 시간은 왜 이리도 더러운지. 아마 당직근무하는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잠은 저녁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게 당연한거다. 이걸 남들 잘때 일하고 남들 일할때 쉬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골병이 든다.
"나 다음달에 밤비행이 왜 이렇게 많을까? 건강해 보인다고 그냥 막 넣었네. 이건 나보고 일하다가 그냥 빨리 죽으라는 회사의 음모가 아닐까?"
“또 시작이네. 오빠 저번달에도 그 소리 했어.”
내가 징징거리는 것을 듣고 있던 와이프가 한마디 한다. 항상 레파토리가 주기적으로 일정하다나 뭐라나.
사실 다들 밤비행을 싫어하는건 아니다. 나 같이 유약한 사람은 몸서리치게 싫어하지만 어떤 젊고 건강한 파일럿들은 야간수당을 더 챙겨주기 때문에 이를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고민이 시작된다.
나는 왜 이렇게 일에 얽매어서 사는가.
왜 이렇게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을 쏟아낼까.
왜 내 삶에 주체적이지 못하고 한낱 일 스케줄 따위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릴까.
그토록 파일럿이 되고 싶었을때는 언제고 이제 머리가 좀 컸다고 항상 툴툴거리나.
나도 이런 내 자신이 싫다….
아마 19세기 네덜란드의 문명학자 하위징아라면 이럴때 "그건 니가 제대로 노는법을 까먹어서 그래"라고 내게 일갈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로 소개됐던 분 맞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위징아의 사상을 좋아한다.
그의 위대함은 우리 인간의 본질을 ‘사유’나 ‘윤리’ 같은 고상한게 아닌 '놀이'라고 정의했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노동’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 것이고, ‘놀이’는 수단과 목적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군대에서 빈땅에 삽질하라는 것이 그토톡 힘든 이유는 이 행위가 단지 수단일 뿐이고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왜 하는지도 모르고 이걸 한다고 해서 나에게 유익한 것도 없다. 삽질을 빨리한다고 해서 전역이 빨라지는 것도 아니다.
반면 스타나 롤을 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겜을 하는 행동 자체에 수단과 목적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것도 아니고 던전에 들어가 보스를 때려잡고 다인팟을 구성하고 티어를 올리는 그 과정 자체로 기쁨을 느낀다.
하위징아는 놀이가 노동이 아니라 놀이가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자발적 행위'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놀이는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순간 '놀이의 억지 흉내'이자 그 자체로 노동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하위징아에 따르면 내가 파일럿이 된 뒤 현재 비행에서 행복을 그닥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외부로부터 명령이 강제되어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처음에는 파일럿이 막연히 되고 싶었고 그때는 작은 성취만으로도 기쁨을 느꼈다.
비행을 하기 위해 무언가를 알아가는 그 자체가 참으로 즐거웠다. 하지만 지금은 회사로부터 스케줄이 강제되어 내가 하고 싶은 자유로운 비행을 못하고 비행하는 목적도 매달 월급받는 것으로 한정돼 버렸다.
그래서 행복을 많이 느끼지 못했던게 아닐까.
게임도 마찬가지다. 게임이 그렇게 좋아 결국 프로게이머가 된다면, 과연 겜하는게 예전만큼 행복하냐고 그들에게 묻는다면 아닐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까지 축구가 하루도 재미없다고 느낀적이 없어요'라고 말한 손흥민은 그래서 괜히 레전드가 아닌 것인데...
모두가 손흥민처럼 될 수는 없다. 나도 안 된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될 것이다.
최소한 내가 가진 일에서 즐거움을 되찾으려는 노력이라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겠지.
내가 어린이였을 때 하늘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푸르름과, 처음 견습 비행을 나갔을 때 공기의 부딪힘에서 느꼈던 그 상쾌함을 되찾아 봐야겠다.
그렇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행복한 삶은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