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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ying Johan Aug 09. 2023

ENFP 파일럿이 세상을 살아가는법

실수에 대처하기

아아~~ 미안 캡틴, 깜빡했네.


이륙을 서두르다 보니 랜딩 라이트를 켜는 것을 깜빡했다. 관제탑으로부터 "Cleared for Take-off (이륙을 허가합니다)" 싸인을 받고 멋지게 이륙 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자동차로 치면 헤드 불을 안켜고 운전하는 격이다.


멋쩍은 웃음을 짓고 얼른 계기판 위에 랜딩 라이트를 켜버린다. 어차피 10,000ft 위에 올라가면 다시 끄겠지만, 그래도 실수를 발견했으니 바로 되잡아야 마음이 편하다.


사실 랜딩라이트를 키고 끄는 문제는 시야가 쨍쨍한 한낮에는 안전과 아주 크게 상관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자동차 운전과 다르게 항공기 조종할때는 항공기는 이륙하기전에 이 라이트를 켜는 것이 국룰로 정해져 있다. 전문용어로 'SOP(Standard Operational Manual)'이라 부르는데,  파일럿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세계공통 표준절차이다.


이날 내 옆에 앉은 기장도 실수를 했다. 목적지 공항을 앞두고 접근 준비를 하고 조종석 컴퓨터 세팅을 완료했는데, 숫자를 잘못 입력한 것. 예를 들어 310이라 입력해야 하는데 301 이런식으로 입력한 것이다. 다행히 내가 발견을 하고 바로 수정해서 고쳤다.


기장도 "아아 숫자 잘못 입력했었네. 고마워"라고 말한다. 오늘은 무슨 마가 낀 날일까.



#. 실수가 사무치게 싫다


비행을 하다 보면 정말 징그럽게 실수를 많이 한다. 다행히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소한 실수이긴 하다. 그때마다 방금 에피소드의 경우처럼 내가 바로 알아차리거나 그게 아니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조종사가 발견하고 잡아주고는 한다.


해야 하는 필수 절차를 빼먹고 안한 적도 있었고, 무슨 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잘못 누른적도 있었고 아주 흑역사가 따로 없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때부터 실수가 많았다. '꼼꼼하지 못하다'는 말을 항상 달고 살았고, 초등학교에 받았던 통지표에도 항상 매 학기마다 '쾌활하나 주의 산만함'이라는 말이 매우 높은 확률로 적혀 있었다. 요즘 같으면 ADHD 증후군을 의심해 오은영 선생님 같은 분을 찾아 헤메 부모님이 아마 고생깨나 하셨을 것이다.


성인이 되면서 기본적인 실수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실수를 많이 한다. 열쇠를 까먹고 밖에 나와 못들어간 적도 많았고, 현금이 필요한 곳에 가야하는데 현금을 안 가져 나온다든지, 각종 비번은 왜 이렇게 자주 까먹고 생각이 안나는지. TV켜야 하는데 리모컨도 안보인다. 지금 이순간에도 리모컨 없이 생활한지 한 달은 넘은 것 같다.


나도 꼼꼼하고 싶다. 하지만 MBTI도 100번 검사했는데 100번 전부 다 ENFP가 나오는 것을 보니 이젠 이런 내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냥 나는 원래부터 이따구로 태어난 인간인 것이다. 무절제 무계획 즉흥적 산만함의 총집합 엔프피들이여 보고있나.


그냥 나는 원래부터 이런 인간인 것이다.



#. 이상과 현실과의 만남


현실적인 문제는 내가 원래부터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타입의 인간인데, 현재 직업은 실수를 하면 안되는 파일럿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만약 파일럿이 심각한 실수를 저지를 경우 뒷자리에 앉은 수백명 승객들의 목숨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중대사항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실수를 하는데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먼저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이렇게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인간의 뇌가 원래부터 완벽하지 않게 설계 됐기에 그렇다는 설명이다.


뇌과학에서 뇌세포와 뇌 부위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뇌가소성'이라 부른다. 이로 인해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수정 가능하고 유연하게 사고하면서 학습을 할 수 있게 하는 대신, 자주 까먹고 무슨 행동이 머릿속에 입력돼 있더라도 자주 실수를 하게 되는 반대급부를 얻었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변형되고 왜곡되기 쉽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유명인중에서도 "원래 그런거야, 실수해도 괜찮아!"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저자로도 유명한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영국 철학자인 칼 포퍼다.  그는 우리의 이성이 합리적이고, 많은 경험을 하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상에 '그렇지 않다'고 단호히 거부했다.


우리는 흔히 '과학'을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포퍼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오류 가능성이 많고 반증 가능성이 높을수록 과학에 가깝다고 봤다.  인간의 이성은 언제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은 '실수'로부터 성장하고 배운다고 그는 강조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저자로도 유명한 영국 철학자 칼 포퍼 옹 (1902~1994)




#. 부끄러움은 나의 몫으로


그렇다면 지구 최고의 ENFP 실수왕이자 덤벙이인 내가 현재 세계 최고 파일럿이자 항공전문가가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수의 빈도로 따진다면 나는 톰크루즈를 후두려 패는 탑건이 이미 됐어야 하는게 아닐까. 대석학 칼포퍼 옹께서도 우리는 실수로부터 성장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포퍼 옹께서 단순히 실수만 한다고 지식이 늘어난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비판적 합리주의는 실수를 인정하고 실수의 계속적인 교정을 통해 의식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의 지식이란 것은 지금까지의 과학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내가 틀렸다는 반증을 통해 성장하고 그래야 더 나은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


파일럿에게 실수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실수를 저지르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확실히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비행을 같이 하는 기장들 중 "내가 오늘 실수하거나 할거 같으면 바로 편하게 알려줘. 잠을 잘 못자서 컨디션이 좋지 않거든"이라고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기장들을 내가 좋아하나 보다.


사실 내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건 비록 일할 때 뿐만 아니라 언제 누구라도 힘든 일이다. 실수에서 성장을 못하는 것은 결국 내 탓인 것이다.


앞으로 내 실수를 더 인정하고 항상 공유해서 덜 부끄러운 사람이 돼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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