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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의 아이_마비키(mabiki)

일본의 영아살해의 실상

by 김순만

1. 기아문제의 해결점에 대한 조나단 스위프트
아이를 식용으로?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알레고리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는 영국의 기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이들을 식용'으로 사용하자는 충격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신의 아이 '마비키'는 이에 못지않는 숨기고 싶은 사실이다.


Jonathan Swift (30 November 1667 – 19 October 1745) 정치가, 에세이스트, 시인

was an Anglo-Irish [1] satirist, author, essayist, political pamphleteer (first for the Whigs, then for the Tories), poet, and Anglican cleric who became Dean of St Patrick's Cathedral, Dublin,[2] hence his common sobriquet, "Dean Swift".


2. 팜 파탈 -배신을 당한 어미의 복수극-자식을 토막내서 죽이다


팜파탈 이아손은 '솥단지에 늙은 사람을 넣어서 물을 끓이면 아이로 변화하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늙은 왕을 솥단지에 넣어서 삶아서 죽이는 끔찍한 장면도 있다. (Key Words: 황금양털, 이아손, 영아 살해) 팜파탈은 여기서 이아손의 배신으로 자신의 두 아들을 토막내서 죽이기도 한다.


3. 마비키 이야기


일명 '솎아내기'로 좋은 것도 나쁜 것을 걸러내는 것이다. 벌레를 먹은 콩을 할머니 손끝에서 솎아내는 것처럼 아이들 솎아내는 것이다.

'짜리 몽탕, 찌질이, 미숙아, 언청이(구순구개열), 너무 마르거나 과대비만' 등이 마비끼의 대상이다. 이들은 살해의 대상이었으며 일명 버려지는 아이들이다. 에도시대에 연속된 기근으로 인해 먹을 것이 없어지고 기아로 죽는 사망자가 가속화되자 정책적으로 마비기정책이 실행된다. 지금으로 치자면 아동학대로 마비끼를 실행했던 부모는 모두 살인혐으로 살게 될 것이다. 마비키에 대한 검색을 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온다.


마비키 자료출처: https://namu.wiki/w/%EB%A7%88%EB%B9%84%ED%82%A4


관련 자료들마다 차이는 일부 있지만 에도 시대 당대의 학자,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의 저서 「草木六部耕種法」이나 「경제요록」에 의하면 가즈사국(上総国)에는 약 10만의 농가가 있었지만 거기서 살해당하는 아이의 수해마다 3~4만 명에 달했으며 무츠국, 데와국에서는 솎아냄(마비키) 하는 수해마다 7~8만에 달했다고 한다. 솎아냄(마비키)은 콘돔을 사용한 피임 같은 인구 조절의 수단이 별로 없었던 당시로서는 필요악이었다는 것이다. 즉, 당시에는 '솎아냄(마비키)'을 별로 '잘못된 행동'이나 '영아 살해' 같은 흉악한 범죄가 아니라 그저 아이를 신에게 다시 돌려주는 일에 불과하며 자기 아이로 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마비키(間引まびき)는 에도 시대 일본의 영아 살해 악습이다. '사전적 의미'는 『1. 솎아 냄. 2. (江戸 시대에, 생활고로) 산아(産兒)를 죽이던 일.』이다.

에도 시대에는 태어난 아이를 엄마가 목을 졸라 죽이는 일이 성행했는데 이를 일본어로 솎아내기라는 뜻의 마비키(間引まびき) 혹은 코카에 시(子返こかえし)라고도 불렀다. 전자는 채소밭이나 삼림에서 간벌한다(솎아낸다), 후자는 신께 되돌려준다는 뜻이다. 직설적으로 아이 죽이기란 뜻의 코고로시(子殺こごろし)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없진 않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에는 평균 자녀 수가 대략 3명이었는데 아이가 3명을 초과해서 태어나면 부모가 죽이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이를 심각하게 여긴 막부와 다이묘들에 의해 마비키를 금지하는 움직임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에도 말기의 농학자 사토 노부히로()는 "데와()와 오슈(奥州)에서 매년 1만 6~7천 명, 가즈사()에서는 갓난아기 3~4만 명이 매년 솎아냄(마비키) 되고 있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사실 일본에서 마비키가 성행한 이유는 봉건적 인두세와 더불어 과도한 징세였는데 가난한 일본 백성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축내는 '새 식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당장 에도 막부의 창시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농민은 죽지도 살지도 못할 정도로 세금을 거두라"라고 명시했고 에도 막부의 관리들은 "참깨 기름과 백성의 세금은 짜면 짤수록 나온다."며 해마다 연공을 늘리고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즉, 막부와 다이묘들이 가혹하게 부과한 세금이 문제였다. 막대한 세금 때문에 영아 살해를 시행한 것이다. 한마디로 마비키를 발생하게 만든 것은 막부와 다이묘들이며 그들의 책임이 크다. 실제로 에도 시대에는 과도한 징세 때문에 민란(잇키)이 빈번했다. 에도 시대에 잇키가 무려 3천 번이나 일어났을 정도로 농민들의 삶은 힘들었다. 대략 계산해 보면 에도 시대가 약 252년간 지속됐으니 1년에 12번 정도, 즉 1달에 1번씩 반란이 일어난 셈이다. [출처2]

<출처: https://namu.wiki/w/마비키>


마비키.png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역사학자의 저서, 자료출처: 나무위키

4. 아동학대를 다룬 영화 <아무도 모른다>

아동학대에 관한 영화 <아무도 모른다>가 방치된 시대상을 반영하는데 16세기 중반에 마비키는 한국의 1950년 중반에서 1960년대 중반, 전후기근으로 한국은 말할 수 없이 참혹했다. 제국주의 식민통치로 일본이 패망했지만 한국 전쟁은 미국이 전쟁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하면서 급속한 성장을 하는데 일임했다. 이것은 마치 한국이 새마을 운동과 맞물려 베트남전에 지원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얻어 한국 재건을 하게 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5. 한국의 아동학대


생일 신고를 하지 않거나 미뤄서 신고하는 경우가 발생했던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식을 출생신고를 하고 또 사망신고를 하는데 있어 서류적 아픔을 없애기 위한 수단이었다. 어느 날 자식이 죽으면 쌀가마니 포대로 덮어서 지게로 지고 땅을 파서 묻었다. 이 시대만 해도 자식을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종속된 개체로 보는 경향이었다.

1950년대 아이들은 전쟁통에 살아남았다. 어디든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로부터 학대를 받는다 하더라도 생존의 문제가 더 중요했다. 베이비 붐이 일어났고 농사를 짓기 위해 많은 자식을 낳았고 또한 이 시대 아이들은 몇 년 가지 않고 죽기도 했지만 이런 역경의 시대를 뚫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훨씬 더 생존력이 높았다.

1970년대 아이들은 다수의 형제들 틈에서 살아야 했다. 부모세대에 회초리를 맡고 자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다음 세대에 회초리를 때리면 아동학대로 신고를 받았다. 자신이 받았던 식으로 자식을 대하면 아동학대로 신고받을 수 있으므로 방임은 허용되지만 채벌은 법률적인 위반이 되는데 이는 과도한 폭력으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다.

세계 최저의 저출산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도 인구 증가의 우려가 한때 있었지만 지금 보면 사치스러운 말이었다. 중국에 한때 저출산 정책으로 낳은 아동을 숨기는 사태가 있기도 했다.


6. 결론


쌍그리 어선은 아주 작은 물고기 마저 식용으로 잡아버리기 때문에 나중에 키워서 먹을 수 있는 물고기 마저 포획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동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면 사회의 유기적 조직 성장을 막는 모순이 도래한다. 둘만 낳아 잘기르자, 하나만 나아 잘기르자는 표를 만들어 인구억제 정책을 했으나 그 정책의 실패로 마을 공동화는 물론 초등학교에 폐교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아이에 관한 갖가지 부분은 결혼·출산 등 아주 예민한 부분에 맥락이 닿아 있다. 정부정책은 물론 사회적인 의식이 아이를 학대로 부터 보호하고 그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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