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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Aug 31. 2022

사랑에는 피부가 필요하고

잠을 홀대했던 날들이 오늘의 나를 망치려는 노력이었음을 이제는 알겠다. 그동안 네 시간도 자고 다섯 시간도 자고 심지어는 세 시간을 자면서도 만만해했는데, 비로소 겸허하게 밤 10시 반부터는 주변을 정리한다. 어제 7시간을 자고 오늘 7시간을 자서 나는 드디어 제 때라고 말하는 아침에 일어나 비교적 수월한 아침을, 다만 1분의 여유라도 있는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여름이 다 갔고, 갑자기 불어온 가을은 비까지 와서 바깥은 무섭도록 침착하다.

이런 날씨에는 덕수궁 근처의 와플 가게 앞에 줄을 서고 싶어 진다. 언젠가의 가을은 너무 추워서 손이 곱아 벌을 서는 기분이었는데 오늘 같은 날이면 이제는 넉넉히, 와플을 먹는 사람처럼 농담도 하며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이미 거리에는 내 얼굴만 한, 갈색의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날아다닐 것 같다. 전에 혼자 보고 놀랐던 저 이파리에 대해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아마도 다른 견지에서 이파리를 말할 것이고 그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라 이제 이파리를 보면 두 개의 기억이 함께 뒹굴 것이다. 같이 걸으면서. 같이 걸으면서. 나뒹구는 플라타너스 이파리를 구름처럼 넘으면서. 


아침에 어떤 집을 지나면서 화분에서 연기 나는 걸 보았다. 늘 지나가는 집이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아주머니가 집 앞 보도블록에 쭈그려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물을 주고 있었다. 조록조록 물을 주는 그의 머리와 담배 연기. 이 아침에, 담배와 초록이 물 주기라니 행복일 테지. 그런 생각을 하니 담배 연기가 그다지 밉지 않았고 매캐한 것도 얼마간 들어줄 만도 한 것 같았다. 일찌감치 걸음이 그를 지나쳤는데도 생각은 화분을 떠나지 않아 담배를 같이 피우게 된 식물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보도블록에 내다 놓은 초록은 굉장히 가깝게 모여있었지만 결코 서로 닿는 법은 없었다. 


서로의 뿌리에 닿을 리 없는 따로의 세계. 따로의 잠. 당신의 등. 내 방에서 넓은 등을 생각한다. 그 등은 자고 일어나 무용에 가까운 작은 농사를 살피러 베란다로 나간다. 어제는 계란 껍데기를 잘게 부숴 칼슘 비료를 만드는 노력을 듣고 그 여정이 만만치 않음을 설명해 내는 일에 감탄하면서 그게 당신의 행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록조록 물을 주는 손이 자연스러웠다. 물 주기란 어떤 이에게는 어떤 날에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니까. 그러나 무용에 대해서라면 나도 질 수 없다. 어젯밤에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날개 있는 몬스터를 종이로 접었다. 이름이 뭐더라. 20분을 설명해주면 나도 20분 끝에 무엇을 만들게 된다. 이 약속이 좋다. 고민은 유튜브에서의 설명은 대개 20cm의 종이인데, 나는 그보다 5cm 작은 종이로 접는다는 것이다. 언젠가 나도 큰 종이를 마련하고 싶다. 


어제는 집에 가면서 풀이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가 자작자작 내렸고 우산을 쓰고 성실히 걸어가면서. 내가 말했지만 참 좋은 결심이다 싶었지. 내가 있고 싶은 곳은 도롯가는 아니고 사람 많은 곳도 아니고 어디 사람 없는 너른 벌판에 다른 이들과 다를 것 없는 초록색이었다. 그런 풀이되면 좋겠어. 바람도 맞고 비도 맞고 해를 맞고도 초록인 풀. 그런 걸 다 껴안아도 아프지 않고 다시 산들산들하게 올라오는 풀 말이다. 사랑에는 피부가 필요하고, 


나는 그토록 좋아하지 않았던 좀비 영화에서 좀비 1처럼 지내고 있다. 피부가 상하거나 없지만 걷거나 뛰거나 기어오를 수 있는 좀비처럼. 잠을 자고 출근하고 다시 잠을 잔다. 그런 내가 좋아진다면, 회복한다면


밤새 사랑하고 아무렇지 않은 아침을 일어나 얼굴을 쓸고 물 한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태연자약하게 하다가 갑자기 갑자기 엉엉 우는 나도 좋아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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