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순례 #9
햇살은 맑고 하늘은 청명하다. 성당 순례의 아침은 제법 산뜻한 출발이었다. 하지만 서쪽으로 갈 수록 날이 흐리더니 결국 하루종일 굵은 눈발 속에서 성당과 공소를 찾아 다녀야 했다. 오랜만에 보는 눈이라 반갑기도 했다. 낮이기도 하고 도로에 급하게 쌓이는 눈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오히려 앞유리창에 부딪혀 금새 녹아버리는 눈의 결정이 시야를 즐겁게 한다. 더불어 그 옛날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에 집을 짓고 성소를 만들었던 박해받은 자들의 길이라 생각하니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이날 찾은 공소들은 하나같이 역사적 삶을 담은 공간이기도 하거니와 위로와 피안의 장소였다. 오래된 기둥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박해를 피해 안식처를 찾은 교우들의 숨결이 서린 곳이다. 처음 접하는 신앙, 그것이 그들에게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예전에는 없었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였을테고 예전엔 알지 못했던 평안함을 주는 것이었다.
눈앞에 닥친 죽음이나 고통앞에서 가져야할 두려움마져도 복음의 씨앗을 마음에 심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강건해지는 도구가 되었나보다. 진리를 알게 된 자들은 그 진리의 양심앞에서 더 강해지는 것이다. 그들의 신앙을 담은 그릇이기도 했던 공소는 그렇게 100년이 지나도록 그들의 숭고한 신앙의 버팀목으로 서있었다.
문득 신념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생각해본다. 목숨과도 바꿀 만큼 대단한 것일까?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누가 그것에 동조할 수 있겠는가. 믿을 수 없는 허망한 이야기들을 그들은 믿었다. 수백년 부처의 세계에 살았고 무당과 정한수로 소원을 빌며 샤머니즘의 경계에 살았던 그들이 어떻게 이방의 종교인 하느님의 종교를 받아들였는지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의 양심앞에서 아니라고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조선의 초기 선교사들의 대부분이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들의 파송모토는 "떠나라, 그리고 돌아오지 마라"는 것이었다. 초기 천주교의 슬픈 선교의 역사에 이처럼 딱 들어맞으면서도 장엄하고도 비장한 모토가 있을까. 떠나서 마침내는 돌아갈 곳 없는 사람들의 공소는 그렇게 이상을 담는 장소이며 행복을 실현하는 자리였다. 죽음과 박해를 피해 깊숙한 곳까지 흘러 들어온 그 길은 역설적이게도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길이었다. 고독과 침묵은 더욱 단단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흔히 있는 박해받은 자의 저항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다만 자리를 피해 스스로 은둔의 공간을 자처했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의 공간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신념이 없는 자들은 신념을 결코 죽일 수 없었다.
되재성당(전북완주) 앞에 도착하면 묵직하고 듬직한 나무종탑이 처음오는 이를 맞는다. 가죽갑옷을 입은 장수같이 크고 우람한 모습이다. 영화에 나오는 파수대 같은 모습이기도 한데 목재탑으로된 종탑은 처음 보는 것이라 특이했다.
되재성당은 한강이남에 세워진 첫 성당이다. 병인박해의 모진 고통을 피해 이곳으로 들어온 신자들의 교유촌이 되재성당의 시작이다. 여러 신자들이 모여 땅을 돋우고 굵은 나무로 대들보를 올려 서까래를 얹고 기와를 올린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때가 1895년이니 무려 130년전이다. 한국전쟁의 포화로 전소된 성당을 1954년에 다시 세운 공소건물이 지금의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전쟁의 참화가 끝나 어렵고 힘든 시기였지만 바로 공소건물을 세운 그들의 신심이 느껴진다. 이후 2006년에 복원사업을 거쳐 2009년에 축복식을 했다한다. 오래된 시간에서 묻어나는 깊이와 그 간절함이 곳곳에 스며있어 보는 이로하여금 진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굵은 대들보와 서까래가 보인다. 회중석은 이랑식인데 특이하게도 좌우를 나무로 칸을 세웠다. 분리된 공간엔 남과 여가 각각 서로를 보지 못한채 전례를 행했다. 그저 좌우의 자리만 구분한 것이 아니라 아예 칸으로 막아 남과 여를 엄격하게 구분하였다하니 지금으로서는 피식 웃음이 난다.
어두은 좌중에 상투를 튼 사람, 갓을 쓴 사람도 있고, 겨울이라 잘 씻지 못해 얼굴이 얼룩한 사람과 무명옷을 입은 사람과 비단 옷을 입은 사람, 남녀가 구분된 자리에 앉아 미사를 드리는 모습, 시간의 길이는 저 멀리 아득했지만 그 때의 신자들의 삶을 상상했다. 그 때와 비교하면 너무나 편한 신앙생활인데 작은 불편함도 견디지 못하는 내 삶이 못내 죄스럽다. 성당순례는 그렇게 게으른 신앙을 스스로에게 질타하고 있었다.
되재성당을 나와 곧바로 어은 공소(전북진안)로 향했다. 약 75Km 정도 거리이지만 시골길이라 그런지 1시간이 넘게 걸린다. 해발 1000m 정도 되는 어은마을, 이 곳도 산중이지만 좌우의 골이 넓어서 그런지 그렇게 깊은 산골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동하는 내내 굵은 눈발이 날리더니 도착해서는 그저 쌓인 눈들만 보인다. 돌너와로 된 지붕위의 하얀 눈이 한폭의 그림같기도 했다. 검색해서 본 이미지들은 겨울이 아니라서 생동감 있게 보였지만 지금은 엄동설한의 겨울이라 잎사귀 하나없는 나무들이 추운 날씨속에서 파르하게 떠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되재 성당에선 그나마 성당을 찾은 외지인들이 보였는데 어은공소는 찾는 사람이 없어 적막하기만 했다.
어은 공소 역시 되재성당처럼 오랜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1909년에 지어진 전통한옥으로 특이하게도 돌너와로 지붕을 덮었다. 외진 산골, 어은공소도 이지역 공소들처럼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천주교 신자들의 교우촌이다.
목골 사이사이의 흰색 벽이 깨끗한 인상이다. 마치 교육기관인 향교같은 느낌도 있다 싶었는데 주임신부였던 김양홍신부님이 사랑채에 교실을 열고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가르쳤다하니 그런 느낌도 그저 드는 것이 아닌가 보다 했다.
어은공소가 있는 어은동은 평화로웠다. 두터운 구름의 그림자가 마을을 어둑하게 했지만 그 어둠이 그렇게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구름틈새를 비집고 내리는 빛들이 앏게 깔린 눈을 비추면 은은하고 푸른 빛들이 사방에 퍼지는 듯했다. 어은동마을은 영화 동막골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평화롭고 순박한 사람들의 마을. 자신이 믿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고향을 떠나와 이곳에 정착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한것 자유했을 것이다.
장수군의 수분공소(전라북도 장수)는 절제되고 기품이 있어보인다. 길고 넓게 마당까지 나온 처마의 모습이 마치 선비의 품세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다. 하나 떼어내 입속에 넣고 싶었다. 차고 깨끗한 공기가 확하고 얼굴에 닿는다. 공소의 마당에 얇게 쌓인 눈이 세상의 소리를 흡수한 듯 고요하고 공기마저 경건한 듯했다.
문고리를 잡고 열어본다. 한옥 공소는 문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잠겨있을 것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다행이도 삐그덕 세월의 소리를 내며 어렵지 않게 열린다. 오래 묵은 내음이 확하고 다가온다. 오래된 목조들이 내 뿜는 냄새다. 구불구불한 서까래와 대들보 기둥들이 기분을 좋게 한다. 오래된 회중석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제대쪽 가까운 곳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눈을 감으면 묵상하기 좋은 곳이 이런 한옥공소다. 몇일 묵으며 어지러워지고 게을렀던 신앙을 고해하고 싶어졌다.
공소라는 건물이 주는 특별한 위로와 안식은 성당이 주는 그 화려함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한지 문살에 비치는 은은한 빛은 스테인 글라스 이상이다. 마치 이곳은 어둠이 존재할 수 없다는 듯 실내를 조용히 밝히는 흰색의 빛들이 따뜻하다. 온몸에 묻은 죄를 씻기는 듯 침례의 기분도 든다.
오래된 액자에 빛바랜 14처를 묵상하며 먼지 같은 나를 위해 기꺼이 성육신하여 십자가를 감당하신 예수님을 떠올린다.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를 사랑할까? 용서와 사랑에 무슨 조건이 있을 것인가? 구원엔 그 어떤 조건도 해야할 노력도 없다. 다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셨으니 세상의 평화가 이를 믿는 자들에게서 나오지 않겠는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내한때 "기억의 지킴이가 되어주십시요"라는 말씀을 남기셨다한다. 작은 공소들을 순례하면서 박해의 아픈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신앙에 빚진자 되었으니 그들의 신앙을 공경해야하지 않을까? 쉽게도 포기하고 쉽게도 냉담에 드는 신자의 삶에 그들을 향한 기억이 항상 마음에 남아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