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기행#46
익산의 나바위성당은 1882년 공소가 설립되고 1888년에 본당이 되었습니다. 초대 주임신부였던 베르모렐신부님이 1906년에 공사에 착공하여 1907년에 완공한 성당입니다. 설계는 명동성당과 전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님이십니다. 익히 알고 있다시피 나바위 성지는 177년전 김대건신부님이 강경을 거쳐 이곳 나바위에서 잠시 사목활동을 하신 곳으로 최초의 사제 서품과 신부님의 입국을 기념하는 성지입니다. 그래서 성지 어느 곳이나 김대건 신부님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많습니다.
강경성당에서 이 곳 나바위성지까지는 4km남짓한 거리인데 순례길의 중간쯤에는 라파엘호의 모형이 전시되어있습니다. 영화 탄생에 쓰였던 배를 보수하여 전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바위성지 뒤쪽 나즈막한 산에는 1955년 성김대건신부님의 나바위 상륙 110주년 시복30주년을 기념한 기념탑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시복되어 복자였지만 1984년 교황요한바오로2세의 방한때 시성되었습니다. 올해 로마의 바티칸 성베드로대성전에 김대건신부님의 대리석상이 설치되어 기념탑을 바라보는 감회가 새롭기도 하였습니다.
김대건신부님은 177년전 하느님의 섭리로 밖에 이해될 수 없는 여러 험란한 과정을 겪고 이 곳 나바위로 오셨습니다. 중국에서 출발할때 정한 처음의 목적지는 인천이었지만 박해의 시대에 바로 잡혀서 죽을 수도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중간지점인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로써 성직자가 없던 시절에 성직자들이 복음의 씨엇을 뿌릴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도록 하였습니다. 나바위 성당의 설립도 또한 하느님의 섭리로 당시 3대포구중 하나였던 강경에 성당을 짓는 것이 당연하였지만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며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곳에 성당을 지으므로 복음의 뿌리가 더욱 안전하고 넓게 내릴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나바위성당의 전면은 고딕식이지만 뒷쪽의 모습은 기와를 얹은 한옥식 건물로 서양식건물양식과 한옥식 양식이 절묘하게 어루러진 아름다운 성당입니다. 양측면에 측랑을 두어 건축미 또한 뛰어납니다. 나바위성당의 성전은 이랑식으로 가운데 기둥을 기준으로 길다랗게 회중석이 두줄 있습니다. 당시 남녀의 구분이 엄격해서 왼쪽은 여자 오른쪽은 남자가 앉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오래도록 생활하신 신자분들은 아직도 습관이 남아 성별에 따라 자리에 앉곤 한다고 합니다.
나바위성당의 특이한 점은 보통은 제대가 1개이지만 나바위성당의 제대는 7개였다고 합니다. 벽보고 드린 제대가 3개 회중석과 마주보면서 드린 제대가 1개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제대가 3개가 있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제대는 성석이라고 합니다. 성석은 이동용 제대로 당시 나바위성당의 관할 지역이 넓어서 각 공소나 미사전례를 할때면 사제가 반드시 가지고 가서 미사전례를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가지고 가야할 성석이 3개나 되었으니 나바위성당의 전교활동과 사목활동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성석중 한개는 소실되어 지금은 2개만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성석은 오늘날에는 사라진 용어이기도 하고 성석을 보관하지도 않지만 나바위성당엔 잘 보존되어 미사가 끝나고 신부님이 보여주셔서 직접 볼 수있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이곳 나바위성당은 역경과 고난속에서도 함께해주시고 살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곳입니다. 당시 김대건 신부님은 험난한 과정을 격고 강경으로 올 수가 있었습니다. 배고품과, 추위, 풍랑, 그로인한 무서움, 두려움 그 엄청난 고통을 과연 신부님은 어떤 힘으로 견딜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사제에게 하느님께서는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도록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 씨앗이 강경과 나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수많은 신자들이란 열매를 맷었습니다.
짊어질 십자가는 늘 가까이 있습니다. 가벼운 십자가였으면 좋겠고 내 삶에 아픔과 상처없이 살았으면 좋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물위를 걷다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손을 내미신 예수님의 손을 꼭 잡은 것처럼 어렵고 힘든 삶중에도 예수님을 의자하고 하느님께 메달리면 기쁨가운데 아픔과 상처를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