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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평 Jul 25. 2022

식집사의 밤은 길다

가끔 드라마에 회장님이 한 손에 분무기나 손수건을 들고서 아끼는 난초를 가꾸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식물을 키우기 전, 상상했던 식물 집사의 루틴도 비슷했다. 드라마 속 회장님처럼 여유롭게 공중 분무를 해준 뒤, 식물들이 따사로운 햇볕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도록 창문을 활짝 열고 아침을 맞이하는 그런 상상.


하지만, 현실의 식물 생활은 기대했던 여유로움과는 달랐다. 아침잠이 유난히 많은 나는 아침이면 늘 정신없이 출근 준비를 하는 편이다. 분무기를 들고 여기저기 지나가는 동선에 따라 손을 바삐 움직여가며, 출근 준비와 공중 분무를 동시에 해결한다. 창문을 최대한 열어두어도 생각보다 빛이 잘 안 드는 공간이 많다. 집 안 이곳저곳에 비치된 식물등을 급하게 켜고, 가방을 챙겨 바삐 집을 나선다.


퇴근 후에는 무엇을 특별히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자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밤 열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 좀 보다가 까무룩 잠에 들려는 찰나, 문득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나의 여인초가 떠오른다. 


‘여인초에 물을 준 게 언제였지…?’ 


나 지금 떨고 있니...?



깊이 심호흡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조명을 켜고, 여인초를 살피러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수분 측정기를 꺼내 여기저기 화분 속을 찔러본다. 예상대로 여인초는 속흙까지 포슬포슬하게 말라있다. 무거운 여인초 화분을 화장실로 겨우 옮겨 물을 준 뒤 화분 속 물이 충분히 빠지길 기다린다. 동시에 물이 필요한 다른 식물들은 없는지 순찰을 돌고, 물 주기가 필요한 수십 개의 화분을 더 추려 화장실로 데려와 물을 준다. 식물에게 물만 줬을 뿐인데… 시간은 어느덧 새벽 한 시가 넘어버렸다. 


나의 식물 생활은 결코 태평하지 않다. 


드라마 속 회장님의 식물 생활은 평화롭기 그지없으나, 나의 식물 생활은 그리 평화롭지도, 또 필명처럼 태평하지도 않다. 이런 일거리가 단 한 번도 귀찮은 적이 없었는지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사실 귀찮은 적도 많다. 생각보다 그들을 챙기다 보면 시간을 많이 할애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챙기는 이 소소한 일거리가 나쁘지 않다. 미션을 성공해 낸 기 분에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고, 챙겨줘서 고맙다는 듯 하루 하루 성장하는 식물을 지켜보는 건 해준 것에 비해 많은 것 을 받는 기분이 들기도 하니까! 

가끔은 바쁘다는 핑계로 식물들을 잘 챙기지 못하는 나는 식물들 입장에서 그리 좋은 집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잔병치레 없이 잘 자라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식물은 햇빛을 받으며 일을 하므로 밤보다 아침에 물을 주는 게 더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젠 아침에도 물을 줄 수 있도록 가끔은 알람을 한 시간 일찍 맞춰보도록 해야겠다. (또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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