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는 작든 크든 사물을 역사에 편입시킨다.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런던 중심에 명품 상점가이기도 한 본드 스트리트를 지나가고 있었다.
2005년. 당시 런던에는 한국 문화원이 없었다. 대신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의 한국 커뮤니티 센터 (Korean Anglican Community Centre)가 있어, 각종 자원봉사자 파견부터, 한국 유학생들의 어려움을 돕기도 하고, 그 연계로 Culture and Entertainment를 줄인, CnE가 ‘런던 코리안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한국어 교육을 하며, 한국문화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술사를 전공했던 나는, 이 ‘런던 코리안 페스티벌’ 행사를 돕는 한편, 소더비 경매소 부근의 고미술품 골동품 하우스에서 파트타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앤티크 상점이 즐비한 이 길을 자주 오갔다. 대학교 졸업 후 인턴생활을 했던 소더비 경매소와 약 100미터가량의 거리를 두고, 같은 길에 본햄스 경매소가 있다.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2대 강자라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는 경매소이기도 하다. 이 경매소의 쇼윈도에 은색의 카탈로그가 눈에 들어왔다.
‘20세기 현대 도자’ - 20th Century Contemporary Ceramics
표지에는 책 이름이 쓰여있고, 도자기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 경매소 안으로 들어가 카탈로그를 손에 집어 들고 안을 훑기 시작했다.
작품은 작고한 영국과 유럽권, 일본 작가의 도자기 작품부터 살아 있는 일본과 영국 도예가들의 작품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천 파운드에서 수 만 파운드까지. 이 다양한 작품들을 이어주는 작가이자 계보의 중심은 ‘영국 도예의 아버지'라는 늘 수식어가 따라붙는 버나드 리치(1887-1979)였다.
그는 일본과 영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며, 스튜디오 포터라고 하는, 즉 공방에서 도자기로 작품을 만드는 예술 활동을 피력한 이이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시발점이었던 만큼 도자기도 산업 도자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웻지 우드 (Wedgewood) 도자기 회사 역시 그중 하나다. 웻지우드가 한국도자기 회사였다면, 버나드 리치는 우리나라의 도자기 ‘작가' 였을 것이다.
79년까지 살아있던 그의 작품과 일본 작품들이 어우러져 컬렉터들의 소장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까지 시장이 형성돼 있음이 놀라웠다. 또 다르게 말하면, 이 경매 도록은 전 세계 컬렉터들에게는 하나의 쇼핑 카탈로그 이면서도 약 100여 점의 작품이 “현대 도자"라는 군 아래 미술관/역사에 진입할 수 있는 ‘장 (field)’인 것이다.
그런 상징적인 이름이 내 눈에 띄었기 때문일까?
(버나드 리치는 한국 도예사를 공부한 사람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역사가 얽히고 얽혔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영박물관에 버나드 리치가 사랑한 조선의 달항아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거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경매 카탈로그 표지 뒷면에 적힌 부서장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도록을 든 채 그 자리에서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나 지금 일 층에 있고, 네가 잘 알고 있듯이, 이런 조선백자와 한국 도자를 계승한 한국 현대 도자 작품들을 영국에 가져오면 경매에 포함시켜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리고 이 경매와 전시는 좀 더 큰 제4회 런던 코리안 페스티벌의 일환이 될 것이라 설명했다,
“버나드 리치가 한국 백자를 사 와서 영국에 가져온 건 아시죠? 지금 대영박물관에 있는 백자가 바로 그가 사 온 작품이죠.
그 백자를 이 카탈로그에도 포함된 루씨 리 여사(Dame Lucie Rie)에게 줬어요. 한국 현대 도자 작품의 뿌리들은 지금 이 경매 도록에 있는 작품들과 깊은 연관이 있어요.”
벤 윌리엄스는 물론 이 역사, 혹은 계보를 알고 있었고, 내게 아래 이 레터를 써준다.
이 편지는 펀드레이징을 할 때 꼭 필요한 <사업 확정 동의서>이다.
편지에는 엑설런트 한 프로포절 고맙고, 제4회 런던 코리안 페스티벌에 행운을 빌며, 우리 본햄스가 한국 도예에 영향을 받은 영국 작가 작품들을 많이 경매하기에, 특히 버나드 리치와 같은, 너의 전시에 우리 작품들을 대여해 줄 수 있다고 쓰여있다. 또한... 한국 현대 작품들이 오면, 그 작품들 중 일부를 경매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쓰여있다.
이 편지로 명분이 - 왜 런던에서 대규모 한국 현대 도자 전시 및 경매를 해야 하는 - 어느 정도 섰지만, 좀 더 기관의 힘도 실렸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또 때 마침 나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게서 “제1회 한국의 날”을 기획할 수 있는지 의뢰받았다. 그 편지는 훗날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짧게 V&A라고 부른다)의 부관장이 됐던, 당시 아시아 부서장 베스 멕킬롭에게서 온 편지이다.
편지는 '제4회 런던 코리안 페스티벌 일환으로 한국의 문화의 날을 V&A에서 2006년에 하고 싶다는 프로포절을 흥미롭게 보았고, 너의 단체가 기획하는 종일 행사의 개최를 허락한다'라는 내용이다.
1-3회까지 성공적으로 런던에서 한국문화 페스티벌을 치렀던 단체에 소속이 됐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나는 이 두 편지를 갖고 한국에 펀드레이징을 하러 간다. 그 길에는 성공회 신부님 두 분과 당시 기획을 하던 오태민 팀장이 힘을 실어줬다.
2005년 9-10월. 두 달간 정말 안 만난 사람이 없는 거 같다. 마치 보험판매원처럼 경매 및 페스티벌 후원 계획서를 들고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그사이 차 마시는 시간을 끼워서 일간지 사업부부터, 관공서, 기업들까지.
운이 좋았다. 경기도에서 마침 세계 도자기 엑스포재단을 창립한 지 5년 차였다. 건너, 건너 소개로 재단의 강재영 큐레이터님을 소개받고 처음 국제 전화로 통화한 게 기억난다. 그리고 경기 도자박물관의 최건 관장님과 이은실 큐레이터님을 만나러 갔던 것도 기억난다. 친구 차가 길을 자꾸 잃어서, 경기도 당시 황준기 기획관리실장님을 뵀을 땐 약속 시각보다 두 시간이 더 늦어졌었다.
“세계"라는 이름에 걸맞게 재단의 명분과 내가 제안한 한국 현대 도자 전시 및 경매의 명분이 맞았던 덕에 4천만 원의 후원금이 확정됐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자랐다.
지인의 후배의 아버지가 또 영국 삼성전자에 다니신다고 소개를 받게 되었다. 김인수 사장님과 영국 법인으로 김석필 상무님이 계실 때다. 처음 들어선 삼성전자의 영국 지점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컸다. 그리고, 큰 원탁이 있는 룸에 들어가니, 첼시의 조세 무리뉴 코치와 삼성 간부들이 찍은 사진이 액자로 걸려 있던 게 기억난다.
*2005년 당시, 약 2년 전 첼시는 러시아의 석유 재벌인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1억 4천만 파운드에 매각되었고, 선수단의 개편을 위해 1억 파운드의 돈을 썼고, 조세 무리뉴를 영입한, 프리미어 리그의 가장 핫한 팀이었다.
상무님은 당시 핸드폰의 일인자였던 노키아를 재끼고 첼시 구단의 후원을 맞게 됐다 했다. 누구보다 문화마케팅에 관심이 있으셨던 때였다. 그리고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는 한국관이 삼성의 후원을 받고 있었지만, 중국관과 일본관에 비해 초라하다는 이야기도 나눴다.
식사하고 한번 다시 오라고 이야기를 듣고, 다시 프레젠테이션을 한 후, 삼성 후원까지 확정받는다.
그렇게 기획과 펀드레이징을 1년,
2006년 6월, 런던의 에어 갤러리에서 한국의 12명 현대도예가의 36점과 영국 도예 역사의 큰 한줄기가 나란히 전시된다. (처음에 거대한 크레이트, 즉 나무상자, 4개가 도착했을 때, 어이없이 2 밀리미터의 차이로 갤러리 안에 들어 올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보도에서 나무 상자를 뜯고 36개의 작품을 날라야 했다.
위층 쇼윈도에는 박영숙의 달 항아리가 놓이고
나머지 전시관에 청자, 백자, 본청, 그리고 연리문/도기 36 작품을 여러 작품대를 이용해서 진열했다.
아래층에는 본햄스에서 대여해 온 버나드 리치, 루씨 리 등의 작품과 내가 직접 컨텍한 영국 현대 도자의 중요한 작가들 - 에드먼드 드 발, 임마뉴엘 쿠퍼, 김혜정, 등이 전시됐다.
이 중 에드먼드 드 발은 이제 세계 최고의 작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2009년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는 그의 작품이 돔 안에 영구 전시된다!)
그렇게 전시를 마쳤지만 경매는 11월!
그 전까지 홍보를 열심히 해야 했다. 여러 기획 기사, 전시에 대한 리뷰를 하며 11월까지 또 달리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어쩌다 보니 큐레이터가 돼있었다.
추신: 많은 작품들 중 박영숙 작가의 달 항아리는, 경매가 끝난 지 몇 달 후에, 대영박물관에서 구입 연락이 온다. 당시 한국관 큐레이터였던 제인 포탈 큐레이터가 주도했을리라. 그리고 그 달항아리는 대영박물관에 영구 소장된다. 지금도 대영박물관에 가면 버나드 리치가 가져온 조선의 백자 옆에 나란히 박영숙 선생님의 달항아리가 전시되어 있다. 내가 꽉 껴앉고, 가끔은 절망했던 그 작품은 이제 진열장의 유리 속에서 만질 수도 없지만, 나를 큐레이터로 만들어준 거로 기쁘다.
그리고 이렇게 경매 카탈로그가 곧 아카이빙이 되고, 나중에는 미술관과 도서관에 편입됨으로써 '공공 지식'의 일부가 되는 그 과정을 목격함은, 그리고 국공립 박물관과 독립큐레이터의 3단계를 거친 인연은 20년 후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내가 꿈을 꾸던 그 연결고리는 희한하게, 맞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