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고, 듣는 것만큼 꿈을 꾼다.
초등학교 일기장을 보다가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나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파티를 할 거야.”라고 쓰여 있던 것이다.
외국 한 번 나가본 적도 없는 내가, 겨우 9살짜리 꼬마가 어떻게 그럼 꿈을 갖게 되었을까?
80년대 서울 출생에게 88년은 서울 올림픽 개막식의 불꽃놀이를 옥상에서 볼 수 있었던 해이고,
AFKN 방송이 세계와의 유일한 창이었던 시기였다.
그런 꼬마가 어떻게 이런 발상을 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게는 세계로의 창구가 되어준 아버지가 계셨다.
나는 6살 될 때까지 엄마가 읽어주시는 아버지의 편지들을 들었다.
“나는 지금 카리브해를 지나고 있어.”
“나는 어제 파나마 운하를 지났단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인가, 나는 미술학원에 취미를 붙이고 있었다.
선화예술중학교는 입학시험이 있는 미술, 음악, 무용 전공자들의 학교인데, 이때 미술을 전공으로 덜컥 합격했다. 그리고 학교 정문에는, “이 문은 세계로 통한다”라는 교훈이 붙어 있었다.
이는 내게, 주술이자 다짐이었다.
중학교 생활 내내 외국에 보내 달라 부모님을 조르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뉴질랜드에 간다. 학교생활은 아무래도 한국과 정반대. 한국에서는 말이 너무 많았다면 고등학교 때는 너무 말이 없었다. 영어로 말해야 했기에..
그리고, 고등학교 때 런던엔 소더비 경매소에서 운영하는 학부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듣고, 덜컥 입학 지원을 했다. 그렇게 오게 된 98년 겨울의 런던, 혼자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지나, 런던에 와서 인터뷰에 합격한다. 하지만, 오클랜드 법대에 합격했던 차라, 이를 한 해 들어보기 위해 다시 돌아간다. 오클랜드 법대와 미술사 전공 1년을 다니는 내내 나는 늘 런던 타령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2000년 1월 런던에 왔다.
그리고 2020년 1월 막 동이 틀 때, 나는 어느새 지나버린 20년 세월이 믿기지 않았다.
아직도 철이 안 든 나였기에 내 나이가 믿기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이 긴 시간 동안 런던에서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나는 박사과정 중이었고, 한국 회사 슬리퍼스 써밋 법인의 대표로서 어깨가 무거웠다. 빨리 수장 역할을 하려면, 박사과정을 빨리 끝내야 했기에 20년 세월의 소회를 추억하며 감상에 젖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중 코로나까지 겹쳤다.
첩첩산중.
20년의 런던 생활 중, 상상도 못 한 8개월의 록 다운을 겪었다. 그렇게 코로나 기간 집에 처박혀서 박사 학위를 마쳤다. 그사이 큰 가족사 변화도 있었고, 큰 수술도 두 번 하다 보니 이제는 조금이나마 나의 삶과 일에 대해 정리를 하고 가고 싶다. 그리고 나누고 싶다.
이 글의 목적은 첫째, 왜 ‘전시’를 하는지, 전시를 만드는 이유와 목적을 뚜렷하게 밝히는 것이다.
둘째, 연관성이 없는 듯한 일련의 전시들을 모아서, 내 기억과 함께 여러 매체 안에 기록된 나를 정리하고 싶다.
그리고, 셋째, 위로 하여금, 나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정리해보고 싶었다
내 인생의 다음 스텝을 위해서, ‘곤조' 있는 책으로 세상의 멋진 기획자들과 만나고 싶다.
20여 년의 여정을 지나온 이 시점에서, 이제 살짝 갈무리를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김승민 큐레이터 (슬리퍼스 써밋 & 이스카이 아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