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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안 Sep 11. 2021

붙잡아 뭐해 마음만 더 아프게

모든 것들이 결말을 향한 복선이었다.

고작 열 살이었다.


상실 - 그런 단어가 있다는 걸 배우기도 전에 느껴버리기엔 너무 어린 나이 아니었나. 지금 돌아보니, 

너무

어렸는데.

어른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동안 나는 집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검은 양복 무리의 친척들이 갑자기 전부 우리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이 안방에 빙 둘러앉아 넋두리를 하는 걸 귀동냥으로 눈치껏 알아차렸다. 엄마가 이제 이 세상에 없구나. 눈이 벌건 어른들을 등지고 게임에 열중하는 척하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내가 엄마 돌아가셨다고 울 줄 알아요?

어른들은 퉁퉁 부은 눈으로 웃었다. '다 컸네'

우리 혜지, 다 컸네.

그 말을 들은 이후 나는 정말 다 큰 것마냥 굴었다. 젠장, 말의 힘이란... 몇 날 며칠을 베란다에 나가 문을 닫고 술에 취해 엉엉 우는 아빠, 시도때도 없이 무너지는 아빠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내 역할은 그의 마른 등을 토닥이며 ‘일어나, 들어가서 자’ 부축하는 첫째 딸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정말로 다 큰 줄 알았다. 내 슬픔의 통은 작고 얕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리니까, 몸집이 작으니까. 그에 비해 어른들의 슬픔의 통은 너무나 크고 깊어서, 그 커다란 통에 슬픔이 차고 넘쳐 내 슬픔은 비교적 작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참을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빠는 울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내 나이답게, 아이답게 울 수 없었다. 엄마 보고싶다고 생떼 한번 부린 적도 없었다. 그 때 참았던 것들이 부풀고 부풀어 지금에서야 이렇게 펑 터져버린 걸까. 아니면 이제 나도 진짜 어른이 되어 그 지랄맞은 슬픔의 통이 넓고 깊어져 기어이 넘쳐버린 걸까.

퇴행.


캔디나 하니가 되고 싶진 않았다. 운명이라느니 불행이라느니 그딴 것에 심취한 비극의 여주인공 놀이를 하긴 더더욱 싫었다. 세상에 나만 슬프고 아픈 것도 아닌데, 모두가 힘든데, 라는 말로 나의 아픔과 슬픔을 계속 외면했다. 이 플로우 -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원하지 않아도 내가 모르는 어딘가로 자꾸만 떠밀려 흘러가게 되는 밀물같은 인생의 흐름.

빠져나오고 싶었다. 외면하는 것으로 도피할 수 있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모르는 척 하면 잊게 되길.

잊은 척 하면 없던 게 되길.






넌 내가 가진 슬픔에 대해 물었고, 나는 대답했지.

'나의 상처가 이윽고 아물어 괜찮아지면, 그때 아무일 아닌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덤덤하게 얘기해줄게.'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괜찮아지면 얘기해줄게.

라는 말은

애초에 틀렸다.

머잖아 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도 결국 그런 날이 영영 오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20년이 지났는데도 오열하며, 20년이 지났는데도 그 사건 한 복판에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네게 고통을 토했다.

상처는 이윽고 아물지 않고, 여전히 대수롭다.

'꿈을 꿨어. 어떻게 그토록 오랜시간을 잊고 지냈는데 이렇게 무심하게 나타나서는, 얼굴도 안보여주고 등만 보여주다 멀어질 수가 있어? 어떻게 그래.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이 안나는데. 한번은 뒤돌아봐주지. 꿈에서나마 좀 보여주지.'

몇 년 전인가. 갑자기 잠에서 깨 오열하던 내게 너는 그저 아무말 없이 내 등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며 노래를 불러줬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가수가, 가장 좋아하던 트랙.






3일 전.

코인 빨래방에서 돌아가는 빨래를 기다리며 폰을 보다가 우연히 나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아이의 글을 읽었다.

프로과몰입러는 오만데 과몰입하고 다니느라 온종일 정신이 피곤하다. 그런데도 그 순간 왈칵, 감정이 이입되어 글 읽기를 멈추고 폰을 잠시 내려놨다.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돌이켜봐도 참 드라마틱했지.

빨래방에 켜져있던 라디오에서 DJ가 뭐라뭐라 떠들더니 별안간 그 노래가 시작될 줄이야.

우연한 글에 내 과거가 플래시백 되던 순간에

눈물이 터져나오려던 순간에

몇 년 전 네가 불러줬던 그 노래를 빨래방에서 듣게될 줄이야.




사실은 그래, 흩어지는데
붙잡아 뭐해. 마음만 더 아프게.
근데 이렇게 살아지는게
또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 싶긴 해.

넬 - 그리고, 남겨진 것들







그 새벽, 그 때의 너와 내가 다시 펼쳐진다. 당신의 뒷모습,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는 목소리와, 닿지 않는 손, 한번을 돌아봐주지 않고 멀어지던 당신의 작은 등. 멀어진 시간만큼 내가 잊고 지낸건지, 깨고 나서도 얼굴이 한참 기억이 안나 더 서러웠던 꿈이.

너와 헤어진 것도 벌써 몇 년인데 아직도 기억은 생생해서 이렇게 연결 짓고 의미부여 하는 건데. 잊어야 할 일은 잊지 좀. 비눗방울처럼 방울방울 샘솟는 생각들을 퍽퍽하게 눌러 터트리며 건조가 끝난 빨래 더미를 들고 돌아왔다.






2일 전.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닌데 아침 일찍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울렸다. 침대에 누운 채 불안한 예감으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넘실거리던 슬픔이 넘쳐 흘러와 이윽고 나까지 덮친다.

이모야. 오랜만이네. 외할머니 돌아가셨다. 올 수 있으면 와.

그 한마디에 순간

모든게 무너진 사람처럼 목놓아 울었다.

전날 있었던 일들이 복선처럼 느껴졌다. 왜 갑자기 그 노래가 나왔는지, 왜 갑자기 몇 년 전 꿈이 떠올랐는지. 왜 갑자기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그렇게 많았는지.






고작 열 살이었다. 아빠는 날 엄마의 장례식에 데려가지 않았다. 아빠는 1년 만에 재혼했고, 엄마 얘길 꺼내는 걸 싫어했다. 마지막 인사조차 못하고 떠나보낸 엄마. 그렇게 생이별해버린 외가쪽 식구들.

만났던 시간보다 더 오래 만나지 못했던 내 가족들.

부르기에도 뭔가 어색한 직계가족 경조사연차를 냈다. 그리고 직계가족이란 사람들을 만났다. 20년 만에. 외할머니의 빈소에서. 엄마의 빈소는 가보지도 못했는데, 이젠 어른이 되어 장례식장도 갈 수 있고, 직접 국화를 놓고 향을 꽃을 수도 있다.

엄마의 막내 동생인 작은 삼촌은 빈소에 들어선 나를 보자마자 누나의 이름을 부르며 주저앉아 울었다. 누나.. 복희누나..

네가 복희 딸이구나. 많이 자랐네. 길에서 보면 못 알아보겠어. 등을 시작으로 할머니의 빈소에서 생전 처음으로,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친엄마의 이름을 들었다. 엄마의 엄마가 돌아가신 자리니까. 엄마의 친인척들이 모두 모였으니까. 그래, 엄마 이름이 복희였지.

과거의 어느 날엔 갑자기 엄마의 이름조차 생각이 나지 않아 혼자 펑펑 운 적이 있었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도무지 기억 나지 않는 이름. 같이 있었던 시간보다 헤어진 시간이 더 길어 어느새 잊혀진 이름. 그래, 복희였지.


오만가지 감정으로 조문을 하고 잡일을 도우려는데, 큰 외숙모에게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20년 만에 만난 가족이라도 가족이기에 당연히 해야할 도리라고 생각했던 일인데, 와줘서 고맙다니. 우리는 남인걸까.

고맙단 말 한마디에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 되었다.

내가 느꼈던 그리움, 반가움, 애틋함, 슬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감정이

전부

피로해졌다.




그들은 알까,

그날 그 전화를 받자마자 3일치의 각오를 하고 빈소에 갔다는 걸.

그러나 나를 향한 낯선 손님 대우에 머쓱해져 몇 시간을 못 채우고

'발인날 다시 올게요.' 라는 말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걸.

3일의 경조사 연차를 얻었지만 비어버린 휴가 이튿 날엔 자취방 침대에 혼자 웅크리고 누워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는 걸. (빈정대자면 덕분에 푹 쉬었고, 솔직하자면 슬픔의 늪에 외로이 잠겼다.)








발인.


2017년 10월 17일. 엄마의 기일은 기억조차 못하는데, 그날의 잔흔은 이렇게 인스타에 남아있다.


새벽 네시에 출발해 빈소를 정리하는 일을 돕고 추모 예배와 화장지까지 함께 했다. 그들은 할머니를 화장하는 내내 대기실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기를 반복했다. 눈물 짓는 이는 없었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온 가족이 바닥에 엎드려 오열하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묘한 괴리감이 들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눈물이 나는 건 나 뿐인가 보다. 20년 만에 재회한 나만.

화장이 끝나고 유골함이 나왔다. 발인지로 이동할 차례였다. 또다시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발인지까지 같이 가려던 마음을 접었다. 이제 가라는 말처럼 들려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더럽게 막혔다. 마치 내 명치 끝처럼. 그 길 위에서 느꼈던 숱한 감정들은  어떤 단어로 형용해야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슬픔을 먹고 자란 사람처럼 내 뼈에 살점에 슬픔이 들러붙어있었다. 떼어낼 수도 없게. 덕지덕지.

1년 365일 슬픈 건 아니다. 사실 잊고 사는 날이 더 많았다. 엄마의 빈자리는 새엄마가 채우고 있었기에, 내가 ‘엄마 없는 아이’로 산 건 고작 1년 남짓 뿐이다.


모르는 척 하면 잊을 순 있다.

하지만 잊는다고 해서,

사실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말라 비틀어져 사라진 줄 알았던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슬픔이, 다시금 그 커다란 대가리를 쳐든다. 순수 그 자체의 슬픔을 마주하는 일은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고개를 떨군다. 내 발목에 운명이 묶어놓은 길고 무거운 쇠사슬이 보인다.

무겁다. 나아갈 수가 없다.

무려 몇 년동안 내 프로필의 타이틀이었던 말, '나아가자'

깨닫는다.

나는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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