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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안 Oct 01. 2021

글 쓰는 게 무서워졌다

누군가의 심장을 치는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문창과 출신도 아닐뿐더러 글을 배운 적도 없지만 늘 글을 쓰고 싶었다. 글로 유명해지는 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시작된 꿈이었다. 내 시절엔 문창과 가면 굶어 죽는다며 부모님이 뜯어말리는 바람에 성적에 맞는 과로 진학했는데, 세상이 이렇게 변할 줄 알았나. 다행히 콘텐츠 마케터로서 커리어를 이어왔고, 이번이 아니면 다신 없을 기회라 사활을 걸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 에세이, 작사 가리지 않고 썼다. 데뷔 준비가 생각했던 것보다 길어지고 있지만 글 쓰는 건 항상 나를 살 수 있게 했고 필력 또한 누구에게든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퇴사까지 하고 글 쓰는데 매진하다 보니, 글 쓰는 게 무서워졌다. 워드 창의 흰 화면이 나를 집어삼키는 느낌이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결국 내 한계에 부딪혔을 때, 무너지는 나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방금 뮤지컬을 보고 나왔다. 15만 원 상당의 표 값이었는데, 덕후로선 내 아티스트의 공연을 라이브로 보고 온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곳곳에서 스토리의 엉성함이 보였다. 그래서 객석을 나오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텁텁했다. 좋은 작품을 봤단 개운함이 없었다.

최근 개봉한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도 말이 많았다. 타이틀을 언급할 수 없지만 호불호는 차치하고서라도, 완성도에 대한 논란을 몰고 온 몇 가지 작품이 있었다. 나는 이런 작품들을 만나며 조금씩 의기소침해졌다. 프로로 데뷔해 작품을 세상에 내보이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취향을 떠나 완성도만으로 독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여운이 남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김종완이나 이지훈처럼 두고두고 곱씹게 하는 가사를 쓸 수 있을까? 적어도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어도 듣고 나서, 읽고 나서 어딘가 엉성한 느낌에 뒤가 텁텁한 글은 되지 않아야 할 텐데. (김은희 작가님의 드라마도 호불호가 있을 순 있지만, 완성도를 가지고 논란이 된 적은 못 봤다.)







지난 퇴사에서는 글에 들어가기 앞서 한 달 동안 생각을 전부 비우고 게임에만 몰두해 엔딩을 봤다. 성취라면 성취였다. 그 이후로는 싱가포르와 영국을 돌며 한 달을 보냈고, 그 후 세 달은 외주 소설을 납품하며 돈을 벌었다.

글쓰기에 한 껏 폼이 올라왔을 때 재취업을 했다. 그때 그 선택이 잘못된 거였을까. 무의미하게 1년 반을 허비했다. 살리고 싶은 커리어도 아니었고, 연봉을 무지하게 올린 것도 아니었다. 1년을 밤낮 주말 없이 갈려가며 일했고, 6개월은 복수하듯이 월급루팡을 했다. 그 마저도 지겨워질 때쯤 다시 퇴사를 했다. 이미 계약된 원고가 있어 퇴사하자마자 매진할 생각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에, 눈 깜빡할 사이에 두 달이 지났다. 이 전 퇴사의 두 달과 지금의 두 달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이렇다 할 성과가 도무지 없다. 그때는 게임이라도 엔딩을 봤지, 지금은 게임을 해도 집중이 안되고, 글도 써지지 않는다. 화만 늘었다.


이쯤 되니 죽는 것보다 루저가 되는 게 더 싫어졌다. 이렇게 죽긴 억울하다. 죽어도 작품 하나는 발표하고, 곡 하나는 내고, 데뷔해서 이름 한 번은 날려봐야 내 원혼이 억울한 악령이 되어 구천을 떠돌지 않을 것 같다. 이를 악무는데, 맘과 달리 써지지가 않는다. 매일이 마감인데 하루를 미루면 글도 그만큼 쌓인다. 이미 두 달치가 밀렸다.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그저 책상 앞에 앉아 밍기적 댈 뿐이다. 공부를 하려면 하든가, 아니면 그냥 빨리 잠이라도 자든가. 루저는 잘 자격도 없다며 인풋을 핑계로 밤새 영화와 드라마 시리즈를 봤다. 바이오리듬은 당연히 깨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회사를 다니면서는 사이드 잡을 세 개씩 하고 운동도 했다. 잠을 세네 시간씩 자도 거뜬했다. 자그마치 1년 6개월을 그렇게 살았다. 맷돌행 직행열차에 몸을 싣고.

개구리만 한 손으로 꾸역꾸역 막아둔 둑 빠진 항아리가 이제야 터지고 만 걸까. 지금은 12시간을 자도 아무런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메모 앱의 브런치 초고 폴더에는 한 문장짜리 쓰레기들만 쌓여간다.

미완의 초고만 늘어가고, 끝을 맺지 못한다. 퇴고는 엄두도 못 낸다.

일을 병행하며 글을 썼던 때보다 오롯이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인데 오히려 그때보다 생산성이 떨어졌다. 약속을 깨는 건 유리 깨는 것보다 쉬워서 병원 예약도 자꾸만 노쇼를 한다. 결국 추석 연휴를 약 없이 버텼다. 약은 규칙적으로 먹는 게 중요한데 자꾸 들쭉날쭉 돌려 막기 하듯 먹어대니, 리듬이 깨지면 부작용은 더 크게 온다. 불안감과 화가 극에 달하는 걸 느끼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과 함께 연휴가 끝나자마자 바로 병원을 찾았다. 대중교통을 탈 수 없어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이사를 해서 병원을 옮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미 1년 반이나 봐온 선생님과 형성해온 라포를 새로운 곳에서 다시 형성할 자신이 없었다.


선생님도 책 내셔서 아시겠지만, 한 시간 짬이 난다고 해서 한 시간 동안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로 시작된 나의 고충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혜지 씨는 스스로 슬럼프임을 인정해야 해요. 생산성이 떨어지는 날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사람이라면요. 생각했던 보다 훨씬 길어질 수도 있어요. 너무 조바심 갖거나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어떤 날은 두 줄만 썼더라도 내가 해냈단 마인드로 자신을 칭찬해주세요. 지친 걸 인정하세요. 여기서 더 채찍질하면 안 돼요. 죄책감 갖지 말고요.

또 영혼 없이 ‘네’ 대답을 하고 진료실을 나섰다. 선생님은 항상 내 말에 공감해주고, 같이 눈물을 흘려주기도 하고, 자책하지 말라며 나보나 나를 더 다독여주는 다정한 분이지만 이번만큼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내 포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내가 그만큼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 상황을 인정하기 어려웠고 받아들이기 한심했다. 내 존재 자체가 한심한데 하물며 내가 쓰는 글이 만족스러우랴. 자꾸만 의기소침해졌다. 작사가 선생님의 ‘혜지 씨 표현력은 이제 뭐 건드릴 게 없어요’ 란 말도 기쁘지 않다. 같은 반 기수들 중에서 눈에 띌 뿐이지, 프로 데뷔는 아직도 멀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김이나 작사가님이나 서지음 작사가님, 김은희 작가님이나 정유정 작가님 같은 필력을 가진 사람은 못 될 것이다.


그렇다고 관둘까. 이쯤 했음 됐다고, 내 소중했던 어릴 적 꿈아, 고생했어, 이젠 가, 잘 가, 작별을 고하고 훠이훠이 날려 보낸 뒤 다시 회사로 돌아갈까. 아니, 그럴 수도 없다. 이번 퇴사는 죽기 살기로 한 결정이었다. 굶어 죽더라도 글 쓰다가 죽을 거라고.

그런데 이건,

상상도 못 했다.

아무리 계산을 했어도 이런 경우의 수는 생각도 못했다. ‘글이 안 써지’는 상황은. 나는 글을 써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인데, 글이 안 써진다니.


‘이런 가사를 도대체 어떻게 쓰지?’ 감탄하며 꿈을 키우던 곡들이, 이젠 다른 의미로 ‘이런 가사를 도대체 어떻게 쓸 수 있는 거지…’ 좌절감과 패배감으로 나를 덮친다.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울릴 가사를, 도저히, 쓸 수 없을 것만 같다.


우스운 일이다. 15만 원짜리 티켓의 뮤지컬이 만족스럽지 못한 게 내 잘못도 아닌데 자괴감을 떠안는 건 나라니. 세상에 망할 줄 알고 개봉하는 영화가 어디 있고, 호평만 기대하며 출간되는 책이 어디 있을까. 아직 데뷔도 못한 조무래기 주제에 미리 겁부터 집어먹는 나도 웃기고 한심하다. 이럴수록 더 써야 해, 심기일전하라고.

선생님 말과 반대로 다시 나를 채찍질한다.

내게 남은 건 실타래 같이 가느다랗고 엉킨 마음 하나뿐이니까.

그저 잘하고 싶은 맘.

취향이 갈릴 순 있어도, 지혜지 글 잘 쓰는 건 인정이지, 그 단 한마디 듣고 싶은 맘.


그래서 무섭다.

누군가의 심장을 치는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무섭고 두려운 마음을 안고 오늘 새벽도 또 키보드와 싸운다. 싸우다 보면 알게 되겠지. 내가 결국 치게 될지, 아니면 신나게 두들겨 맞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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