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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안 Oct 03. 2021

덕질이 나를 사람으로 키웠다

나는 비현실에서 살기로 했다.   그리고, 비현실을 팔기로 했다.

우리 아빠는 서른둘에 나를 낳고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는데 내가 이제 그 나인데 난 여전히 철딱서니가 없다. 역시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고. 더쿠의 피는 어디 안 간다. 이렇게나 여전히 덕질을 갈망한다.

2년 전, 그러니까 전전 회사를 퇴사하고 생긴 공백기에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2004년에서 2007년까지의 나를 소환했다. 그때의 내가 빙의라도 된 것처럼 미친 듯이 과거 덕질 추억팔이를 했다. 음악회사를 다닐 적에 항상 듣던 질문은 학생 때 어떤 아이돌 좋아했어? 였다. god야 신화야?

나는 홀로 '클릭비요!' 대답하곤 했다.


반에서 절반이 신화고 절반이 god였을 때 클릭비 팬은 나 혼자였다, 많아도 나 포함 둘셋 정도였다. 클릭비에 정말 지독하게 미쳐있었다. 중1 짜리가 인천에서 일산까지 지하철 세 시간을 타고 공방 뛰러도 다녀보고 팬미팅이 선착순이란 말에 1월 한파에 패딩도 없이 코트 하나 걸쳐 입고 노숙도 해봤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부모님께 말도 안 하고 팬미팅을 간다며 대전 당일치기도 해봤다. 




2013 넬콘
2014 넬스룸
2015 에픽하이 전설의3인조 콘
2016 넬스시즌
(중간 생략) 가장 최근인 2021 넬스시즌


넬이나 에픽하이는 20년째 리스너로서 팬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리스너와 덕질은 결이 약간 다르다. 리스너로서의 팬은 뜨겁지도 식지도 않는 은은한 온돌방 같다면 덕후로서의 활동은 스파크가 팍팍 튀는 불꽃같다. 인생에서 가장 미쳐있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를 쫓아다녔던 순간을 택할 것이다. 중3 때부터 고3 때까지는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 리그가 날 살게 했다. 학원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던 고3 때에도, 오직 선수들을 보면서 버텼다. 자기 자신과 싸우고, 경쟁 상대와 싸워 이기며 매번 성적을 내며 버텨야 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그래, 공부가 뭐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픈 몸으로 집중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 순간엔 내 아픔도 현실도 다 잊을 수 있었다. 그만큼 선수들이 좋았고 게임이 좋았고, 경기장의 분위기가 좋았고, 오프닝으로 등장하는 록 음악이 좋았다. 게임판 자체가 좋았다. 경기장에서 번쩍거리며 떨어지던 조명과 팬들의 함성소리, 중계진들의 열띤 목소리와 날카롭던 선수들의 눈빛, 모든 게 청춘드라마 같았다. 아팠던 이유로 야자를 안 했고, 그 덕에 친구들 야자 할 때 호롤로 사복 챙겨 코엑스로 퇴근했다. 두 시간 걸리는 거리를 버스를 타고 가서 저녁 내내 직관했다 (....) 프로리그 토일 월화수 스타리그 금요일. 그때 공부를 했으면 대학이 달라졌을까? 별로 그렇게 생각은 안 한다. 항상 죽음이 목전이었던 나는 미래 설계를 그렇게 촘촘히 한 편이 아니라 그냥 그 순간을 살았다. (그리고 죽지도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내가 있지) (그 업은 오늘날의 내가 열심히 살면서 갚고 있다.) 어쨌든 내 인생의 8할은 덕질이다. 첫 직장에서는 직장 자체를 덕질했다. 콘텐츠 만드는 일이 사는 최대의 즐거움이었으니까. 일요일엔 빨리 회사 가고 싶어서 집에서 일했다. (첫 직장의 날카로운 기억.........)


덕질 좀 한다는 학생들은 전부 만들었다는 문구류들
첫 직장에서의 덕업일치는 희열 그 자체였다.



하여간, 아픔과 덕질로 점철된 격동의 10대를 보내고, 20대 때는 마지막 수술을 끝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건강을 되찾고서는 현실로 돌아오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해야만 했다. 미뤄뒀던 현실에 적응하느라 10년을 다 썼다. 바빴다. 남들을 따라잡기 위해, 남들처럼 취직 준비를 하고, 돈을 모으고, 독립을 하고,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갔다. 그렇게 덕질에 한 눈 팔 새 없이 20대를 보내고, 30대 초반으로 들어온 최근, 일을 관뒀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며칠 전부터, 자연스럽게 스타를 다시 보고 있다. 현실에서 집중해야 할 게 사라지니 어쩌면 원래 기질로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여러 가지 말이 생각난다. 관성이라든지,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는 말이라든지. 그때 그 선수들이 지금은 뭐하며 사는지 궁금해서 밤마다 나무 위키를 찾아 읽고, 유튜브라도 하는 사람 찾아내면 그냥 봤다. 밤을 새워 마구 봤다. 게다가 최근엔 클릭비의 멤버인 유호석과 오종혁도 결혼했단 소식을 듣고는 또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한참 싱숭생숭해하며 추억팔이 한바탕 했다. 과거를 들춰보면 그때가 그리워져서 조금 서글프다. 그립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그 시절과 그때의 순수한 내 모습. 내가 기억하는 나의 과거는 온통 아픔과 비참함 뿐이지만, ‘덕질’이란 키워드에 필터링을 걸고 나면 반짝이고 행복하던 때가 분명히 있다. 

그렇다는 것에 감사하고 애틋하다. 아프기만 한 줄 알았던 내 삶에도 반짝이던 순간이 있었단 사실이. 회사를 관둔 서른한 살 때는 덕질을 하고 싶어도 할 게 없어서 심심했다. 30대나 됐는데 아직도 덕질 거리를 찾고 있다니. 다만 과거를 갉아먹는 것 말고, 현재를 사는 덕질을 하고 싶었다. 추억팔이는 어젯밤 꾸었던 좋은 꿈과도 같아서 빠져들수록 현실이 힘들다. 그러다 서른한 살 딱 중간이 되던 때, 교통사고처럼 아이돌에 빠졌다. 세븐틴이었다. 첫 회사 재직 당시 갓 데뷔했던 그들이 인사차 방문했지만 그때의 난 몰랐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헤비한 덕후가 되어있을지. 미래의 내가 알려줬더라면 그때 더 유심히 보고 열심히 일했을 텐데. 그들의 음악이 지금의 나를 위로하고 살게 했다. 예전부터 음악은 좋게 들었지만, 입덕은 항상 예고 없이 벌어진다. 지금은 팬클럽도 가입하고, 모든 유료 콘텐츠를 소비하는 어른 팬이 되었다. 학생 때는 항상 부모님의 용돈을 모아 앨범 하나 사는 일도 손이 떨렸는데, 어른이 되니 내 돈 벌어하는 덕질이 최고라는 걸 깨달았다. 덕질을 안 했더라면 지금쯤 3,000만 원은 더 모았을 테지만, 아마 그 돈을 모으기도 전에 난 더 이상 살 이유를 찾지 못하고 이 생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에겐 덕후 DNA가 있는 게 분명해
조만간 n차를 찍을 도겸의 뮤지컬 엑스칼리버

적어도 덕질을 하는 순간엔, 현실을 다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들의 음악, 그들의 가사, 그들의 무대, 무대 뒤의 숨은 노력, 그들의 모든 것들이 나를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나이에 나에게 새로운 꿈을 찾게 해 준 것도, 그들의 덕이 크다. 그렇게 나는 비현실 안에서 살았다. 비현실 안에서만큼은 숨을 쉴 수 있었다. 앞으로도 나는 비현실에서 살기로 했다. 그리고 나 역시,

비현실을 팔기로 했다.


그리고 이건 최근에 본 사주와도 일맥상통하는데, 다음 글에 이어서 발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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