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쉽게 넘는 허들이 유독 내겐 버거울 때
늘 머리 위에 먹구름을 얹고 사는 나에게 딱 하나의 복이 있다면 바로 인복이다. 한 명의 빌런을 견디지 못하고 퇴사해도, 남은 10명의 동료는 소중한 친구가 된다. 그리고 이 업계는 너무나도 좁고 좁아서, 전 직장 동료들이 현 직장 동료들이 되기도 하고 서로 밀고 끌어주며 계속해서 만날 일이 겹친다. 이제 최측근들은 친구들이 아니라 전 직장 동료들이 되었고 나는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때는 가까웠던 동료이자 친구가 회사가 달라지며 자연스레 멀어지기도 하고, 전 직장에선 데면데면하던 동료가 다음 회사에선 같은 팀 사수가 되며 가까워지기도 한다. 지금은 프리랜서 일을 하고 있지만, 의뢰를 받아 진행한 일이 알고 보니 전 직장 동료가 클라이언트 라던지, 프로젝트로 만난 다른 회사 사람들 사이에 꼭 한 명씩 일면식이 있는 건 이제 신기함을 넘어 그러려니 할 정도다. 이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착하게 살아야겠다.’ 그러다 이내 맘을 고쳐 먹는다. ‘아니, 잘해야 한다.’ 그래야 나 스스로도 떳떳할 수 있다.
전 직장 동료들, 한 때 친했거나, 데면데면 인사만 나눴거나 했던 사람들을 한자리에서 전부 볼 자리가 가끔 있다. 경조사다. 그럴 땐 우리가 함께 소속된 지난날을 추억하기도 하고 근황을 묻기도 바쁘다. 누군가는 잠시 쉬는 중이고, 누군가는 대기업으로 적을 옮겼으며, 누군가는 프리랜서로 자리를 잡았단다. 한 때 같은 소속으로 뭉쳐있었지만 이젠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내 위치는 지금 어디쯤일까, 계산해보게 되는 건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다.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해 대기업 커리어를 탄탄히 쌓고 있는 누군가는 ‘역시 다녀보니 대기업이 좋더라~’라는 말을 하는 동안, 나는 대기업을 들어갔음에도 회사 잔혹사로 별별 안 겪어도 될 일을 거치며 마음의 병을 얻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지? 프리랜서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걸친 백수다. 루저가 된 기분이다.
지금은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도 사실은 그간의 복잡한 사연이 있고 속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모두 그 회사를 떠났지만 SNS로 이어져있고, 네트워크가 겹치다 보니 들리는 말들로 근황을 다 알고 있다. 지금은 대기업 가서 잘 살고 있는 그들도, 그 사이 수많은 잔혹사를 겪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의 결과만 보면 모든 과정이 잊힌다. 누군가 말했다. 인스타는 남의 하이라이트와 나의 비하인드를 비교하는 거라고. 결혼식 같이 한껏 멋을 내고 모여 공작새처럼 자기의 겉치장을 드러내는 곳일 때면, 그들이 거쳤던 지난한 과정은 으레 생략한 채 지금의 결과만을 보게 된다. 그 과정이 얼마나 혹독한지 실시간으로 봐서 알고 있으면서도. 그럴 때면 어김없이 못난 마음이 든다. 시기와 질투가 난다. 같이 출발해서 왜 그들은 저 위에 가있고 나는 여태 제자리지? 그들에게도 분명 말 못 한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을 거쳐 결국 저기까지 간 거라고. 잊었던 사실을 스스로에게 명확히 상기시킨다. 그러니 너무 쭈그러들 필요 없다고, 나도 지금이 아닐 뿐 언젠가 올라갈 시기가 분명 있을 거라고. 다독이면서도 조금은 씁쓸한 맛이 혀끝을 감돈다. 못났다. 스스로 돌아본 꼴이 못나 우습기 짝이 없다.
존 리 듀마스가 말했다. 남과 비교하면 끝이 없다고. 그저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한 발짝 더 나간 거면 내가 이긴 거라고. 발전한 거라고. 그 말을 뼈에 새기듯이 꼭꼭 씹어 삼킨다. 그럼에도 작가로서 성공하고 싶은 나와, 타이틀이 중요한 내가 여전히 싸운다. 내 욕심은 내가 가장 잘 안다. 나의 욕망, 나의 허세, 나의 자존심, 그리고 나의 못남까지, 내 전부를 알고 있는 건 나다. 그래서 지하철 두 정거장을 걸으며 마음을 다독였다. 나의 때가 올 거라고. 다만 아직일 뿐이라고.
이번 퇴사를 알리고 나서 유독 재입사 제안을 많이 받았다. 감사할 따름이다. 퇴사했음에도 업무력을 인정받아서 다시 부름 받는 일은 짜릿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끝내 내린 결정은 '아무 곳으로도' 돌아가지 않았다. 퇴사할 때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잊었지만, 재입사란 마치 끝난 연인과의 재회와도 같아서, 첫 이별과 똑같은 이유로 종지부를 찍을게 분명하다. 그러니 내 의지로 퇴사한 곳을 굳이 다시 갈 이유가 없다. 그렇게 원했던 모 대기업의 면접도 공황 때문에 못 간 판에. 굳이.
업계에서 만난 많은 팀장님들과 거래처 동료 분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지만 건강을 문제 삼아 전부 거절했다. 그러다 오늘 첫 직장의 재입사 면접을 다시 봤다. 그곳은 이제 사명도, 대표도, 소속도 전부 바뀌어 재입사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오래 다닌 사람들 몇 명만 손에 꼽을 정도로 남고, 그 사이 입사한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사람들이다.
'면접'이란 단어만 들어도 공황에 맥박이 170까지 솟을 정도로 트라우마였는데 심지어 아침 일정을 무난히 끝내고, 다음 회사 대표님과의 미팅을 기다리며 이 글을 쓴다. 작은 회사에서는 팀장으로 데려가고 싶다고 난리인데, 정작 내 맘은 콩밭에 가있다. 스타트업에 하도 학을 떼서 이제 중견기업 이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해 무너져도, 하는 거라곤 그냥 이렇게 글 하나 공들여 쓰고 발행하는 것뿐인 하루가 더 소중하다. 그럼에도 구직에 슬금슬금 발을 걸치면서 쿨링팬이 멈춘 머리에 자꾸 열을 올리는 건 점점 떨어지는 잔고 때문이겠지. 나도 내 속을 모르겠다.
나는 왜 여전히 비슷한 언저리에서 머무르는 걸까, 혼자 라이벌이라 여기며 열폭하던 동료이자 친구인 누군가는 이미 저 멀리까지 치고 나가 더 이상 나 따위가 질투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아무리 걷고 나아가도 내 꽃길은 보이지 않는다.
열폭하지 말자, 조급해하지 말자, 마인드 컨트롤을 해도 먼저 꽃 길을 걷기 시작한 그들이 부럽고 배가 아픈 건, 어쩔 수 없이 천성이 못나서 그런가 보다.
*누군가에겐 너무도 쉬웠던
일이 늘 내겐 어려웠어
머물고 있어도 그곳에 없었고
세상은 신기루 같았어
외롭고 외로워라
날 둘러싼 모든 게
점점 더 날 혼자이게 해
괴롭고 괴로워라
내 앞에 놓인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아
But I'll hold on
이 순간을 잡고
놓지 않겠어 너와 나
우린 달랐을 뿐
잘못되진 않았어
(*넬 - Dream catc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