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입문 - 여름이 가기 전에 하이볼
더운 날엔 시원한 게 마시고 싶다. 커피를 마셔도 아이스를 고르게 된다. 술도 시원하게 들이킬 수 있는 무언가 마시고 싶다. 이런 날은 맥주, 아니면 하이볼이다.
하이볼을 주문하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모양의 잔에 시원한 음료가 나온다. 이름은 산토리 가쿠빈 하이볼이다. 일본어 ‘가쿠빈’ 은 각이 진 병이라는 뜻으로, 산토리사의 네모난 병에 담긴 ‘산토리 위스키’를 뜻한다. 그 위스키로 만든 거라 위스키 하이볼이라는 말 대신 ‘가쿠빈 하이볼’ 일본에서는 줄여서 ‘가쿠하이’라고 부른다. 처음 하이볼을 마시기 시작할 때는 어딜 가도 가쿠빈 하이볼만 나와서 하이볼은 맥주잔에 레몬맛 나는 연한 술을 뜻하는 거라는 인식이 박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것이 ‘동아시아인’의 고정관념이었구나 하고 느끼기 시작했다 여행을 다니며 여러 나라, 다양한 지역에서 같은 주문을 했다. “하이볼!” 주문은 같았다. 하지만 내어주는 술은 나라, 지역, 가게마다 달랐다. 주로 일본으로 출장 다닐 때는 가쿠빈 하이볼 밖에 못 마셨지만, 서구권 나라에 갔을 때는 콜라나 사이다 같은 하이볼이 나왔다. 가쿠빈 하이볼처럼 노란색 하이볼도 있지만, 하얗거나 까만 하이볼도 있었던 것이다.
어느 바에선가 하이볼은 ‘칵테일의 개별 이름’이 아니라 ‘제조방법’ 중 하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기본 술에 얼음과 탄산수를 넣어서 만드는 스타일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러니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기본 술 종류의 개수와 모든 탄산수의 종류를 곱한 만큼 가짓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니 가는 곳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오히려 가쿠빈 하이볼만 여러 번 만났던 지난날들이 신기할 정도가 아닌가 싶다.
먼저 누구나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진토닉’이 떠오른다. 쌉싸름하고 상큼해서 참 깔끔하다. 세상 간단한 ‘잭콕’ 콜라와 버번위스키를 섞는다. 휴양지가 떠오르는 ‘모히또’ 화이트럼에 라임과 민트 마무리로 탄산수를 넣어 만든다. 그리고 민트 빼고 음료만 바꿔서 콜라를 넣으면 ‘쿠바 리브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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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종류가 많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술인 하이볼은 사실 자주 무시당한다. 소주나 맥주처럼 대중에게 친근한 술은 쉽게 업신여겨지기 쉽기 때문일까. 하이볼 무 시론자의 발언들은 요즘 뉴스를 보며 심심찮게 보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떠오르게 한다.
“위스키에는 물을 타 먹지 않는다. 위스키에는 얼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위스키는 그저 있는 대로 (니트 neat) 마시는 게 최고다.”
비싸고 향이 좋은 위스키를 마시는 근본주의자들은 그대로 먹는 방법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가장 높은 농도로 비싼 술을 낭비 없이 마실 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이볼은 탄산수 비중이 크니 베이스가 되는 위스키 맛을 느끼기가 어렵다. 싫어할 수밖에 없다. 선택의 여지없이 그런 주장을 듣는 쪽은 상당히 불편하다. 회사에서 우리 팀 사람이 다른 팀에서 욕먹을 때 기분과 비슷하다. 욕먹을 짓을 했으면 모를까, 들어보면 한 것도 없다. 왜 욕을 할까 싶은데 그 자리에서 반론하면 관계가 어그러질까 부담스럽다. 어정쩡하게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묵묵히 있다가 간다. 지나고 나서야 왜 그때 반론을 하지 못했을까 분해한다. 그러다 이제 와서 글이라도 써본다. 이런 말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그 사람, 하이볼 씨 괜찮은데 하고 말이다. 투명하고 길쭉한 투명한 잔에 얼음이 잘박 잘박 한가득 들어있다. 휙휙 저어주면 얼음 소리가 챙챙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탄산수 속에 싱그러운 녹색 라임 조각이 동동 떠있다. 더위 때문에 잔 밖에 이슬이 잔뜩 맺혀있다가 똑 떨어진다. 여름에 마시는 음료란 이런 게 있어야지 싶다.
휴양지가 떠오르는 ‘모히또’ 화이트럼에 라임과 민트 마무리로 탄산수를 넣어 만든다. 그리고 민트 빼고 음료만 바꿔서 콜라를 넣으면 ‘쿠바 리브레’가 된다. 쿠바의 럼과 미국의 콜라가 만나서 자유를 외치는 건가. 의미는 아무래도 좋다. 럼, 라임, 콜라가 기분 좋게 합쳐지면서 마실 때는 달콤한 청량감이 목을 시원하게 넘어간다. 취기가 살짝 올라올 때는 휴양지에서 푹 쉬는 기분이 든다.
하이볼씨는 다른 좋은 점도 많다. 일단 그는 오픈 마인드다. 초보자, 입문자 모두에게 다가가기 쉽다. 마실 때는 매우 강한 기주(기본 원료가 되는 술)의 맛이 강하지 않아 누구나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다.
처음부터 그냥 마시는 위스키가 맞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센 술은 바로 맛을 느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것으로 이 사람의 호불호를 알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수영을 처음 하는 사람에게 얕은 풀이 아닌 올림픽 수영장 3m 풀에 보내면 어떻게 될까? 무섭고 두렵고 힘들 것이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퍼덕거리다가 지쳐서 물 밖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이 결과로 이 사람은 수영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수영을 싫어하는 것일까?
럼은 사탕수수로 만들어져 있다. 설명만 들으면 달달할 것만 같다. 자세히 병을 보면 어쩐지 캐리비안의 해적 떠오른다. 그렇다. 이건 해적들이 마시는, 선원들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센 술이다. 하바나 클럽 3년, 술의 도수는 40도나 된다. 바카디 151은 75도에 이른다. (주로 불쇼에 사용한다.) 요즘 소주가 18도인데 그 두 배인 술을 처음부터 그냥 마시는 걸 추천하는 건 수영 초보를 올림픽 수영장에 던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수영을 처음 시작할 때는 힘들다. 늘 물에 빠지는 기분이라 재미도 느끼 기기가 쉽지 않다. 낮은 물에서 부력이 있는 판을 잡고 발구르기만 하면서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힘들어서 재미를 느끼긴 어렵다. 그래서 싫어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닌 기분으로 연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발로 물을 찰 때 어느 순간부터 몸이 앞으로 밀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발목의 스냅으로 몸이 앞으로 스윽 밀리는 것이다. 그렇게 물 안에서 몸이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하는 걸 느끼면 재미있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한 레일씩 깊은 곳으로 이동한다. 어느덧 오리발도 신고 올림픽 수영장도 왔다 갔다 하는 재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늘 선수처럼 레일만 돌 수는 없지 않은가? 때때로 스노클링도 하고, 바다를 즐겨야 한다.
니트 근본주의자들에게 외치고 싶다. 올림픽 메달을 따기 위한 훈련처럼 치열하게 니트를 마시며, 각자의 술 지식이 높은걸 자랑하기보다 그저 술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스노클링 하듯 둘러보면, 그 과정에서 여유를 즐기면서 새로운 발견 할 수 도 있지 않을까. 니트로 먹었을 때는 몰랐던 의외의 향이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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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하이볼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칵테일 바에서 한 잔 하면 좋겠지만 그러기 쉽지 않은 요즘이다. 생각보다 이 스타일은 집에서 해 먹기 쉽다. 도구도 있으면 과정을 즐길 수 있어서 좋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이 바로 하이볼이다.
칵테일을 만드는 제조 기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하이볼에서 사용하는 기법은 기본적인 두 가지를 주로 사용한다. 기본 중에 기본인 부어서 넣기(빌드 build), 그리고 저어주기(스터 sturr) 면 끝이 난다. 하지만 마음먹고 하이볼 레시피를 보면 어쩐지 어렵게 보인다. 하지만 이건 착시다. 착시가 생기는 첫 번째 이유는 계량 단위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용하는 재료가 어색해서다. 하지만 김치찌개와 다를 게 없다. 사실 엄마 김치랑 고기 넣고 적당히 끓이면 되는 게 김치찌개인데 어쩐지 레시피로 보면 뭐가 많이 들어가고 복잡한 요리처럼 보이는 것처럼.
그리고 나머지는 간 맞추기다. 커피 아메리카노의 샷 조절하듯이 기본이 되는 술(기주 base)의 양을 조절하고 마무리로 설탕, 라임이나 레몬을 취향에 따라 짜 넣거나 그냥 잘라 넣으면 된다.
그렇다. 어떻게 넣어도 다 칵테일이다 된다. 진과 탄산수에 라임을 잘라 넣으면 진토닉, 라임을 짜서 넣으면 진리 키, 레몬을 짜서 넣으면 진 피즈가 된다. 그런데 이걸 외울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도 저렇게도 넣어보다가 본인이 좋아하는 맛을 찾으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전체 양은 누구다 똑같이 1컵이다. 한 컵 안에서 조절할 수 있는 건 밸런스다. 취향이나 컨디션에 따라 자유롭게 조절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늘 같은 농도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아침에는 아메리카노에 에스프레소 3샷을 넣는데 밤에는 1샷 정도만 넣어서 연하게 마실 수도 있다. 밤에는 자야 하니까.
내 생각엔 술도 마찬가지다. 술이 잘 받는 날이 있는가 하면 안 받는 날도 있다. 기본 레시피에는 1.5oz(45ml)인데 연하게 마셔야 하면 1oz(30ml)만 세게 먹고 싶으면 2oz(60ml)를 넣는 거다. 그러다 레몬즙이 너무 들어가서 시다 싶으면 조금 마셨다가 다시 탄산수와 설탕을 더 넣어서 희석하면 된다. 어차피 파는 것도 아닌데, 오늘의 한잔은 나만을 위한 즐거움인데 실패하면 또 어떤가.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따는 것도 아니고, 전문 바텐더도 아닌데 굳이 시험 치듯이 양을 재서 먹을 필요는 없다.
실패하더라도 직접 칵테일을 만들어 먹어보면 가게에서 먹을 때 보이지 않던 디테일이 보인다. 어떻게 레몬을 자르는지, 얼마나 넣는지, 탄산수는 어떻게 넣는지. 결과적으로 내가 만든 것보다 얼마나 맛있는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야구든 어떤 스포츠든 해본 사람이 어떤 동작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만든 거친 맛을 기억하기에 바에서도 세밀한 차이를 느끼는 재미를 볼 수 있다.
입문자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탄산수와 설탕량을 전부 조절하다 보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탄산수의 종류가 많아 호불호가 있고, 설탕량은 취향을 탄다. 쉽게 너무 많이 혹은 적게 넣어 밸런스가 무너진다. 이 실패를 줄이기 위해 익숙한 콜라, 진로 토닉워터, 사이다 등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이미 검증된 적정 비율의 설탕과 탄산수 조합이기에 실패가 적어지는 것이다. 그 콜라로 수십 년간 돈을 벌고 있는 회사도 있지 않은가.
콜라를 넣는 하이볼 중에 가장 유명한 조합은 ‘잭콕’이다. 잭콕은 어쩐지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고상한 느낌도 아니고, 그렇다고 익숙한 느낌도 아닌 이 술이 여행하는 느낌이 나는 건 아마 예전에 여행하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대학생 때 쪼들리는 예산을 가지고 게스트 하우스를 전전하며 여자 혼자서 여행을 했다. 돈도 없는데, 저녁엔 어쩐지 술 한잔 마시며 놀고 싶었다. 친구도 딱히 없고 술을 마실 돈도 없었다. 그때 부엌 저 끝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헤이 너도 먹을래?” 그 말을 듣고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언니들이 해준 이야기들이 모락모락 생각났다. 소문은 무성했다. 이태원이랑 가까워서 그랬는지 주로 무서운 이야기들이었다. 외국인들이 모이는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마약을 한다, 마시면 훅 가는 술을 줄 수도 있으니, 이물질이 들어갔는지 늘 확인하고 조심하라는 이야기였다.
그 게스트 하우스는 하얀 조명이 너무나 밝은 분위기였다. 카운터에서 직원도 보이는 자리였다. 공용 식탁을 둘러싼 면면들도 친근감이 들었다. 그래도 나보다 덩치가 3배나 큰 형님들과 술을 마신 다는 건 용기가 필요했다. 그들이 권한 건 갈색의 술들이었다. 어떤 걸 좋아하는지 묻길래 그냥 맥주라고 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걸 느꼈는지 놓여 있던 새로운 까만 병을 꺼내서 뜯기 시작했다. 새로운 병, 그 말인즉슨 당연히 이물질은 안 들어있다는 표현이었다.
나는 “술을 못해서 이렇게 센 술은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걸 묵묵히 듣더니 콜라캔을 집어 든다. 이것 역시 새 캔이니 이물질이 들어 있을 수는 없다. 컵에 콜라를 콸콸 부으면서 “이제부터는 아닐걸” 이라며 씩 웃었다. 그게 남들은 시시하다고 하는 잭콕(Jack coke)과 만난 첫 번째 날이었다. 잭콕은 버번위스키인 잭 다니엘과 콜라를 섞어 마시는 하이볼이다. 그걸 열심히 마시며 못하는 영어로 온갖 대륙에서 모인 친구들과 밤새 이야기했다. 그런 시간이 즐거워서 매년 여행을 갔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보면 역시 이건 하이볼을 위한 변명이 아니었다. 하이볼을 좋아하는 나를 위한 변명이 맞다. 물 타도, 얼음 타도 맛있다. 여름이 가기 전에 한 잔 더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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