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입문 - 필요한 장비들, 지거, 바스푼, 글랜케런
마음이 급할 때 오는 병이 있다. 급체는 아니다. 그건 그냥 급하게 먹어서 생기는 병이다. 이 병은 몸 보다 마음이 급할 때 온다. 마음은 급한데 지식과 몸은 따라오지 않을 때 심해진다.
장비병이다. 몸은 단단하고 싶지만 단단하지 못할 때 장비가 내 몸을 가려준다. 장비 덕에 어쩐지 단단해진 기분이 든다. 더 강해질 수 있나 싶어서 다른 장비를 구경한다. 장비는 나라는 본체의 약함을 가려주고, 강한 부분을 (돈으로) 강화해 준다. 이렇게 약해져 있을 때를 노리고 들어오는 야비한 상품이 있다. 애증의 스타터 팩. 원가가 전체 구매가의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저질 상품을 묶는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실제로 나은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럴싸해 보인다.
스타터 팩은 공통점이 있는데, 음식이건 운동이건 분야를 막론하고 보면 볼수록 별로라는 점이다. 언젠가 그 분야를 꽤나 빠삭하게 알게 된 후 다시 보면 헛웃음이 다 난다. 초보 때는 전혀 필요 없는 물건들로 가득하다. 아마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대중이 갖고 있는 ‘이미지’ 그대로를 팔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애석한 진실을 처음 마주하게 된 건 사실 오래되었다. 중학교 때 다닌 어학원이었다. 나는 네이티브와 대화하는데 막힘이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나름 고수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이때쯤 되면 여기저기서 물어본다. “어떻게 그렇게 잘해요?” 그다음에 따라오는 정해진 질문이 있다. “혹시 어떤 사전을 써요? 무슨 책을 봐요?”다.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보다 어제는 뭘 했는지 오늘은 뭘 했는지 보다 나를 구성하는 마법의 아이템이 어디 숨어 있는지를 십중팔구 궁금해했다.
누구나 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매일 같이 나에게 맞는 방법으로 꾸준하게 연습했을 뿐이었다.
한 골목에 장사가 잘 되는 고깃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 집에 숨겨진 비밀은 그저 끈질기게 힘줄을 잘라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가게 점원들은 진짜 맛집의 비밀을 숨기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정말 힘줄을 잘라 내는 것 밖에 없었지만, 믿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진실을 깨달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들은 그 가게를 떠났다. 매일 같이 힘줄을 제거하는 수고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가게 주인 뿐이었다. 그 말을 나는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그저 매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기처럼.
이 작은 깨달음을 간직하지 못하고 금세 잃어버렸다. 다른 재미있는 분야가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장비병이 활화산 마냥 타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애석하게도 늘 많은 장비를 요구했다. 나는 그 요구에 충실한 종 이었다. 요요를 시작하면 가장 좋은 요요가 갖고 싶었고, 검도를 시작하면 죽도가 아니라 목검부터 사고 싶었다. (목검은 죽도 파트를 거의 마스터하고, 단을 딸 때쯤에나 살만한 자격이 주어졌다.) 카메라에 빠지면 카메라와 렌즈, 필름을 싹 쓸어오고 싶었다. 수영은 장비가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물안경에 오리발까지 이것도 시작하면 끝이 없어 보였다.
끝판왕은 이거였다. 야구. 축구는 맨 몸에 운동화, 공만 있으면 되는데 정작 나는 장비가 잔뜩 필요하고, 공부와 연습이 오랫동안 필요했던 아주 번거로운 스포츠를 좋아하고 말았다. 미친 공놀이는 모든 파트가 장비로 가득했고, 이미 병이 도진 나에게 끝도 없이 살거리를 제공했다. 타자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보호구가 있다. 헬멧, 팔 보호구도, 다리 보호구도 원하면 자신에게 맞는 것으로 구할 수 있다. 당연히 공을 치는 배트도 있다. 나무나 알루미늄 재질마다 다 다르니, 재료 수만큼 배트 종류가 있고 브랜드가 있다. 그리고 수비할 땐 글러브. 얼핏 보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저 글러브가 소가죽이다. 가격도 브랜드도 소가죽 가방 브랜드 수만큼 많다. 게다가 ‘맞춤’까지 있어서 이거야 말로 리스트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팀에서는 스포츠 백 안에 아이템들을 합쳐서 최소 100만 원이 족히 나가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지난한 성공과 실패의 연속의 시간이었다. 술의 세계에서 만큼은 거기까지 가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나는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친구들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2만 원짜리 8종 칵테일 스타터 세트를 사고서 (조주사 자격증 딸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라 적혀있다.) 술에 입문을 시작했다. 이 스타터 세트는 그래도 50% 성공했다. 들어있는 8종의 모든 제품을 한 번씩 사용해보기는 했다. 각각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취미 삼아 이것저것 레시피를 만들며, 재미로 만져볼 수 있었다.
하지만 50%는 뼈저린 실패였다. 8종 중에 3번 이상 사용한 도구는 3종뿐이었다. 지거, 바 스푼, 얼음 집게가 전부다. 지거도 오래 사용하지 못했다. 먹다 보니 쇠맛이 났다, 용량도 10ml라 칵테일 만들 때마다 4번, 10번씩 부으니 힘들었다. 마무리가 날카로워 아주 살짝 손을 베이기 까지 했을 때 나는 중국 지거에게 안녕을 고했다. 대신에 지거를 지르는 세계에 입문하고 말았다. 사고 싶은 것도, 종류도 사치품 마냥 많았다. 티파니 앤 코에서도 지거가 나온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 이왕이면 실용성을 겸비한 이 지거가 혼수용으론 딱이라 본다.
수많은 지거 중에 나에게 맞는 건 재패니즈 지거(Japanese jigger)였다. 적당한 길이와 무게 중심이 나에게 딱 맞았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용량인 1.5oz(45ml)가 기본 값으로 되어있어서 편리했다. (지거로 연필 돌리기 재미있음!) 그리고 동그란 지거(bell jigger)는 예뻤다. 갖고 싶었지만 역할이 겹쳤기 때문에, 초보에게 용량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다층형 지거(multi-level jigger)로 구매했다.
8종의 각 제품은 칵테일을 만드는 기법들과 관련이 있다. 내 레벨은 기본적인 기법 (물론 이것도 절대 마스터했다곤 볼 수 없으나) 붓기(build), 섞기(stur)를 사용했다. 이 외의 기술을 쓸 일은 별로 없었다. 셰이크(shake)는 터지기 일 수였기 때문에 치우기가 귀찮아 잘 쓰지 않게 되었고, 내가 데일리로 마시고 싶은 칵테일은 셰이크까지 필요 없었다.
만약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칵테일 세트를 산다고 하면 8종은 사지 않을 것 같다. 어차피 때가 되면 8가지가 다 모이게 되어 있다. 하나씩 차례대로 마스터해나가다 보면 내가 마음에 드는 걸 적당히 좋은 걸로 사게 된다. 마니아가 되어도, 앞으로 쓰게 될 총비용을 따져보면 이 편이 오히려 낮을 것이다. 마니아가 아니라면 필요한 만큼만 쓴 거라 경제적인지 않은가. 아이고 지금에 와서야 드는 생각이다.
그러면 초보 -붓기와 섞기만을 하는 자로, 하이볼과 간단한 수준의 칵테일만을 필요로 하며, 가정에서 양주를 다양하게 즐길 자- 에게
스타터 팩엔 없지만 필요한(할 법한) 도구는 어떤 게 있을까?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지거였지만 스타터 팩의 지거는 아니었다. 앞에도 말했지만 쇠맛도 나고, 날카로웠다. 용량도 10ml씩 재니 번거롭다. 보통 1~1.5온즈 (30~45ml) 정도 넣으니 칵테일에 3종류씩 들어가면 거의 10샷씩 넣어야 한다. 불편했다. 한잔 만들 때야 그나마 괜찮은데 친구들이라도 오면 인원수만큼 (3 샷 x 3종류 x5명=45샷…)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데 각자 다른 칵테일을 원한다면 저 전체에 그 수만큼 곱해야 한다. (45샷 x 원하는 칵테일 종류 수) 어차피 지거도 종류별로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여분도 필요했다. 재패니즈 지거(japanese jigger)랑 미리가 잘 보이는 멀티 레벨 지거(multi-level jigger) 2가지 타입을 구매했다. 벨 지거(bell jigger)도 둥글고 귀여워서 탐이 났지만 인고의 노력으로 참아냈다. 하지만 동그랗고 귀엽기 때문에 여전히 갖고 싶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바 스푼(bar spoon) 처음엔 왜 이렇게 과한 스푼을 써야 하는지 의문이 많았다. 길고 구블구블한 바 스푼은 어쩐지 겉멋의 진액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큰 오해였다. 바 스푼에게 심심한 사과를… 가장 많이 필요했다. 우리는 섞는다는 표현을 할 때 휘휘 젓는 모습만 떠올린다. 비중이 다른 음료를 섞을 때는 위아래로 저어줘야 하는데 그럴 때는 얼음을 들썩거리며 섞어야 한다. 이 때는 일반적인 얕은 수저로는 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옴폭 들어간 숟가락 부분도 다르다. 밥 먹는 숟가락은 면적이 넓어 겨우 층층이 쌓아놓은 (빌드 build) 칵테일이 마구 섞인다. 얇은 바 스푼은 그 면적을 최소화해서 그럴 일이 적어진다. 게다가 바 스푼으로 믹싱 컵에 섞는(stur) 연습을 하고 나니 얼음을 깨지 않고, 음료는 차갑게 만들 b 수 도 있다. 아이스커피에, 칵테일에 안 쓰이는 데가 없는 배구팀의 리베로 같은 존재다.
이게 또 굉장히 필요 없을 줄 알았던 아이다. 굳이 이런 걸 왜 여기다가 넣어서 8종을 채웠을까 생각이 들었다. 여름엔 얼음 소모가 많아져서 작은 냉장고로 얼리면서 먹기에는 부족했다. 대형슈퍼에서 한 봉지 씩 단단한 얼음을 샀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얼음을 컵에 적당량 빼려고 하니 매번 손을 넣기가 그랬다. 그렇다고 게다가 큰 스푼으로는 얼음을 한 개씩 넣거나 하기 어려웠다. 붓다가 넘치거나, 놓치거나. 이럴 때 얼음을 콱 집을 수 있는 집게가 유용했다. 굳이 세트 안에 것이 아니더라도, 동네 생활용품점에 훨씬 더 편하고 얼음이 잘 집히는 제품이 즐비하다.
칵테일에는 얼음이 많이 사용된다. 집에 얼음 메이커가 있다고 방심해서는 안된다. 얼음 메이커 얼음은 단단함이 부족해서 막상 칵테일이나 양주를 마실 때는 좋지 않다. 고전적인 냉장고에 얼려둔 얼음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큐브 얼음과 동그란 얼음이 있으면 좋다. 큐브형은 빠르게 식혀서 먹고 싶을 때, 구형은 천천히 오래 먹고 싶을 때 쓴다. 구형은 저렴하게 냉장고에 아이스메이커를 넣어서 만드는 방법이 있다. 투명함에 대한 집착이 있다면 투명한 얼음 만드는 용기를 살 수 있지만 냉장고 면적을 많이 차지한다. (하지만 냉장고 자리가 남아돈다면 이걸로만 냉장고를 채워두고 싶다.) 면적만큼의 투명도로 만족감을 높여준다. 그저 예쁨. 편의점에서도 판다고 한다.
칵테일은 만드는 과정도 보는 재미가 있다. 요리도 아닌데 혼자서 슥슥 만드는 것보다는 친구의 취향을 물어가며 만드는 과정도 하나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만드는 과정에 사용되는 칵테일 바는 물을 흘려도 괜찮게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우리네 집에는 이런 조리용 바는 잘 없다. 이럴 때. 의외로 손쉽게 '바'로 만드는 싸면서 효율적인 도구가 있다. 바로 ‘바 매트’다. 이게 생기면 부엌이 아니라도 아예 다른 책상에서 칵테일을 즐길 수 있다. 깊이가 낮아서 이게 한 컵 쏟으면 난리 나겠다 싶었다. 의외로 높이는 낮아도 면적이 넓어서 액체를 꽤 많이 쏟아도 넘치지 않았다. 신기해.
라임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 머들러로 빻는 방법도 있다. 그렇지만 이게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게다가 때때로 스트레이너(채 같은)로 걸러줘야 하는 때가 있다. 그 과정이 재미라면 재미지만 번거롭다. 집에는 오렌지용 스퀴저가 있어서 유용했다. 오렌지용이라 뭔가 레몬과 라임에는 딱 맞지 않아서 면적이 많이 남는다. 그래도 기능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가위 모양으로 된 라임과 레몬 사이즈 스퀴저도 있다. 레트로 한 매력은 떨어지지만 손쉽고 편해 보인다. 둘 다 있으면 레몬과 라임 술을 같이 동시에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6-2. 레몬/라임 주스
스퀴저로 비싼 라임과 레몬을 계속 짜지 않고도 유사한 맛을 만들어낸다. 동네 마트 수입코너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 쓰는지 전혀 알 수 없었던 동그란 과일 모양의 소스통. 결국 한 친구에게 받아서 잘 쓰고 있다. 레몬이 조금 모자란 긴급한 순간, 나를 구해주는 미원 같은 존재다.
찬장에 적당한 컵이 생각보다 없다. 사이즈가 맞아도 불투명하거나, 모양이 그려져 있는 컵은 막상 만들어보면 ‘보는 즐거움’이 떨어진다. 만드는 과정과 보는 즐거움이 있는데 아쉽다. 원가 계산해보면 이 한잔이 얼마인데- 보는 재미도 놓치지 말고 챙기자. 칵테일 용량에 맞는 컵들로 구색을 맞추면 한층 만들어 먹기 편하다. 올드패션드 잔에 온 더 락을 먹는 즐거움, 텀블러 잔에 예쁘게 올라온 하이볼을 마시는 즐거움. 글랜 케런 잔에 미끄러지는 위스키를 보는 즐거움은 다 다르다. 그리고 이왕이면 컵이 미끄러지지 않게 코스터도 준비해두면 좋다.
이렇게 소개해보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기준의 ‘초보’다. 감히 초보를 붓기(build)와 섞기(stur)만 하는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사실 자신에게 필요한 스타트 팩은 철저히 내가 좋아하는 술에서 기인해야 한다. 만약에 내가 칵테일 ‘코스모폴리탄’의 열혈 팬이었다면 다른 걸 몰라도 셰이커(shaker)만은 매일 쓸 것이기에 연구를 거듭해서 좋은 걸 골라 샀을 것이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고 싶다. 미안하지만 실패를 피할 수는 없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실패할 가능성은 조금씩 줄어든다. 하지만 본인의 취향이 뭔지 모를 때는 무엇이든 마셔봐야 한다. 그리고 어떤 도구든 써봐야 한다. 그래서 실패할 걸 알면서 가는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 성공인지 실패인지 알아낼 방법은 마셔보는 수 밖엔 없기 때문이다. 그저 실패하더라도, 다시 해본다. 수많은 시도 끝 어딘가에 성공이 숨어 있을 것이기에. 그러다 모든 양주가 실패라도 상관없다. 그럼 이제 동양주가 기다린다. 아니 애플주스일까?
3. 물 타기 해볼까 - 미즈와리,워터드랍, 트와이스업
4. 장비병. 정답은 없다 - 필요한 장비들, 지거, 바스푼, 글랜케런
5. 가을엔 홍차 같은 술, 술 같은 홍차 - 핫토디, 홍차와 브랜디, 양 웬리
6. 내 취향의 위스키를 찾아서 - 위스키지도, 위스키아로마휠
7. 내 취향의 양주를 찾아서 - 위스키,진, 럼, 브랜디, 보드카, 테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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