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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입문 Sep 01. 2021

5. 가을엔 홍차 같은 술, 술 같은 홍차

#양주입문 - 핫토디, 홍차와 브랜디, 양 웬리


9월이다. 요즘 매일 같이 비가 온다. 목이 칼칼한 느낌이 든다. 이런 날은 어쩐지 홍차다. 원래 홍차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홍차를 떠올리게 된다. 이 세상을 (그 세상은 카페인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홍차파와 커피파로 나누자면 나는 커피파다. 커피는 미국 드라마 같다.  중후한 매력은 없지만 실질적으로 일에 도움이 된다. 향도 깊은 맛은 없지만 부드럽고 향긋하다. 목 넘김도 부드럽고, 신맛도 있고 약간의 탄맛도 있어 마실 때마다 새롭다.


 홍차는 그에 비하면 예술영화를 닮았다. 중후한 멋이 있는 1970년대 남자 배우 같다. 문제는 70년대 영화처럼 다소 지루하고, 때때로는 넘기기가 힘들다. 맛은 깊이가 있지만 까다로워서 잘못 우리기라도 하면 쌉싸름해서 마시기가 어렵다. 향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복잡한 향이 난다. 색도 참 오묘하다. 묘하게 잔 속에 빠져 든다고 해야 하나. 향의 범위가 내 기준에서 커피에 비해 훨씬 넓다. 일반적인 홍차 향을 지정하기 어려울 정도다. 블랙퍼스트 티와 얼그레이와 아삼이 저 마다 다 다르다. 거기다 과일 홍차 쪽으로 가면 아예 다른 종류의 향이 날 때도 있다. 커피는 아무리 향과 맛이 다르다고 해도 ‘커피’ 안에는 있지 않은가? 커피를 마사다가 ‘딸기’라고 외치지 않지만 (잠깐 스트로베리 어쩌고 라는 커피집 메뉴에는 커피가 1도 안 들어간다.) 홍차는 때때로 스트로베리 블랙티를 마시면 바로 ‘딸기!’라고 외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니 홍차파인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의 근본은 커피이고 난 커피 파다.


일탈


그날은 나른한 가을날이었다. 지루할 일 밖에 없는 사무실에 예상치 못 한 무언가 좋은 향이 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편에서 홀짝홀짝 신나는 표정으로 ‘혼자’ 맛있게 홍차를 마시고 있는 자가 있었다. 지나치게 기분 좋아 보인다. 어쩐지 보는 내가 약이 다 오른다. 지금 마시고 있는 내 커피도 꽤나 맛난다는 커피인데 뭘까 이 패배감은?

 눈이 마주치자 “아 이거요. 드실래요?”라고 친절함이 도를 넘는다. 아, 저 친절함 마저 약이 오른다. 준다는데 거절할 건 또 뭐 있나. 그렇게 맛있으면 나도 한 잔 달라고 했다. 참 맛있었다. 좋네, 홍차도. 창 밖의 하늘도 파랗고 생각보다 일도 잘된다.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 비싼 홍차인가 싶어서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홍차 껍질은 익숙한 홍차였다. 오히려 내가 서랍에 쌓아둔 홍차가 훨씬 비싼 녀석들이었다. 뭣 때문에 저렇게 맛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예전에 홍차를 마실 때 차를 준 친구가 온도가 중요하고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둥 여러 가지 설명을 (귓등으로) 들은 적이 있다. 그건가? 만드는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뭔가 작은 은색 통을 꺼내 넣는다. 향신료인가 싶어서 봤더니.



“아, 이거 술이에요. 한두 방을 넣으면 향이 나서 더 맛있어요.”


술? 근무시간에 술이라니, 배운 사람이네. 흥미로워하며 지켜보니 나에게도 똑같이 만들어서 준다. 확실히 이번엔 아까 보다 향긋함에 깊이가 더해졌다.

조금 더 복잡한 향이 난다. 술이라니 어쩐지 학교 때 자습을 째고 도망 다닌 기억이 난다. 이 묘한 일탈의 기분.


은하영웅전설과 양 웬리, 그리고 홍차


술을 탄 홍차와 함께 신나게 홍차에 술을 타 먹는 이야기를 했다. 어떤 홍차를 쓰느냐. 술은 어떤 것이냐?  위스키이고, 홍차는 아마드다. 뭐 이런 것들을 물어보다가 문득 <은하영웅전설> 이야기가 나왔다. 그 만화에서  ‘양 웬리’가 매일 같이 홍차에 술을 타 먹었다.



"윗사람의 면전에서 너무 칭찬하면 안 된다.
상대가 연약한 인물이면 자만하여 망하게 만들고
융통성 없는 인물이면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놈이라고 싫어할지도 모른다."


양 웬리가 그저 홍차에 술을 몰래 타 먹는 대머리 부장님이었다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양 웬리는 살랑거리는 부드러운 머리에 샤프한 이미지다. 음, 공유를 닮은 듯도 하다. 그런 이미지를 가진 우주 전쟁 영웅이었다. 삼국지로 치면 제갈량에 준하는 포지션인데, 거기에 개인주의가 살짝 첨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력도 있으면서 높은 계급에게는 대항했고 아래로는 상냥했다. 존재 자체가 판타지다.





"저항할 수 없는 부하를 때리는 자가 군인으로 칭찬받을 만하다면
군인이란 인류의 치부 그 자체가 될 거다.
그런 군인은 필요 없어. 적어도 내게는 말이야."


군인이지만 역사책을 좋아하고 아쉽게도 체력은 별로다. 머리가 비상한 대신에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한계마저 매력적이었다. 집단에 무조건 충성하고 영광을 기다리는 그 시대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내일부터 갑자기 연금이 열 배로 오른다면 신을 믿겠다."는 어서 퇴역해서 퇴직 연금을 받고 살려고 하는 그의 꿈은 현실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유능한 그의 이른 퇴직 욕망은 카타르시스마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전략으로 전쟁은 양상이 바뀌었다. 우연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가진 신비한 능력 이 있는 사람이, 우연히 아버지로부터 받은 장비(건담)를 가지고 전쟁을 뒤집는 것과는 다르다. 태생이 어쨌건 간에 그가 노력해서 얻은 지적인 능력으로 신체적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벗어나 전쟁의 형국을 바꾸는 것이다. 매번 신선한 전략을 사용하는 전쟁도 재밌었다. 그리고 승리의 방향성도 놀라웠다. 참전하는 이들이 피를 흘리지 않는 최소 피해, 최대 승리를 노리는 방향이었다.


이런 여러 매력 때문인지 양 웬리가 마시는 홍차마저 멋있게 보였다. 그것이 브랜디에 홍차인지 홍차에 브랜디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평면적인 전쟁영웅에서 벗어난 자유로움, 놀라운 재치에 대해 찬양하며 한참 동안 대화했다. 그렇게 얄미운 자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몇 년이 지났다. 이제 와서 양 웬리의 홍차를 제대로 마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술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그 홍차가 향긋했다는 기억만 남아있다.



양 웬리가 애용하던 술은 브랜디였다.



브랜디는 과일주를 증류해서 만든 술이다. 브랜디  중에서 지역이나 재료 등으로 코냑, 아르마냑, 칼바도스, 피스코 등이 있다. 오히려 ‘브랜디’라는 장르 자체보다 이 세부 이름들이 유명한 경우가 많다. 코냑은 따로 위원회가 관리하고 있어서 품질에 신경을 많이 쓴다. 높은 품질을 유지하는 코냑이다 보니 이걸 그냥 군납 유령 브랜디와 한테 묶여서 ‘브랜디’라고 불리는 건 싫을 듯하다. 그래서 관광할 때 공항에서는 브랜디라는 명칭보다는 ‘코냑’처럼 특정 명칭이 더 자랑스럽게 걸려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핫 토디

홍차에 브랜디, 홍차에 위스키 등 따뜻하게 마시는 스타일을 핫 토디(Hot toddy) 라 부른다.

핫 위스키 토디, 핫 럼 토디, 핫 브랜디 토디 찾아볼 때마다 이름이 달라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만큼 레시피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어서, 대략 공통되는 부분만 추려봤다.  

핫토디(Hot toddy)


- 1.5oz 브랜디 or 위스키 (럼

- 0.5oz 설탕 or 각설탕 1개

- 레몬 슬라이스 1-2조각

- 정향(clove) 1-3개 or 시나몬 스틱 1개

- 뜨거운 물 컵에 맞게 적당히


한국적으로 간단하게 어레인지 하면…

유자차에 위스키를 넣는 느낌도 괜찮을 것 같다.

시나몬 스틱도 별로라 빼지만, 예쁘긴 예뻐 보인다.

 

예전에 마셨던 맛이 궁금해서, 얼마 전 얄미운 자에게 그때 마셨던 위스키 이름을 물어봤다. ‘카듀’라고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술은 뭐든 크게 상관없을 것 같다. 그저 본인이 좋아하는 것이면 뭐든.


반 고흐가 사랑했다는 압생트. 나는 무리였다. 보는 걸로 충분하다…


일본에서는 본 적이 있다.  각설탕을 티 스푼 위에 올려놓고, 살짝 브랜디를 뿌린 뒤(그땐 뭔지 모르는 양주였다.) 불을 붙인다. 멍하니 바라보면 캠프파이어의 기분이다.

 압생트를 마실 때 이런 방식으로 마시는 방법을 본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 녹색 음료는 고흐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마시기 어렵지 않을까?

홍차에도 불을 붙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몇 년 동안 변함없이 함께한 그 얄미운 자와 오래간만에 홍차를 마셔야겠다.

이왕이면 눈앞에 아른거리는 캠프파이어 같은 홍차에 술을, 술에 홍차를 타서 마셔야겠다.

시원한 바람, 술 같은 홍차를 홀짝 거리며 책장을 휘릭 휘릭 넘기기 좋은 계절이 온다.


p.s: 참, 집에서 불을 붙일 때는 꼭 소화기를 옆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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