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주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 이놈아!" 하며 수많은 인파틈사이로 어떤 사내를 쫒고 계셨다. 무슨 일인가? 하고 눈여겨보는데 그 사내는 계단실에 꽉 찬 인파로 빨리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툭 발 앞으로 떨어뜨렸다. 지갑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조건 반사인지 무조건 반사인지 모를 만큼 짧은 순간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이 소리를 지른 것이다. 게다가 이미 내 두 손은 그 수상한 아저씨의 어깨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때는 아마도 IMF의 상처가 다 아물기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아마도 20대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던 즈음이었던 거 같은데 한국에서 보기 힘든 체격 (키 190cm)의 사내가 그것도 계단 한 칸 위에서 자신의 어깨를 찍어 누르며 소리를 지르는데 아무리 닳고 닳은 소매치기라도 조금 쫄지 않았을까?
그 순간.
아주머니는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냉큼 주으며 "이 나쁜 놈!" 한마디를 남기시곤 휙.. 군중으로 사라지셨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주 빠르게..
나는 여전히 그 아저씨의 어깨를 찍어 누르고 있었고 그 많던 인파는 서서히 옅어져 점점 결국 둘만 남게 되는 형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아저씨는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는 않고 있었던 거 같다.
'아.. 이런 시련이... 이제 어쩌지?'
피해자도 가해자도 증명할 길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형국.
뭐... 별 수 없지 않나? 하고 결국 잡았던 어깨를 스르륵 풀고 어색하게 나는 뒤로 돌아 조용히 오르던 계단을 다시 올랐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그래서 원래 가려던 출입구 쪽으로 가지 않고 긴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건너아주 멀리반대편 출입구로 향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이 아저씨가 그 먼 입구 계단 쪽에서 또 나타났다. 그 역시 당황하는 기색이었는데 옆엔 파트너로 보이는 다른 사내가 한 명 더 있었다. 역시나.. 영화에서 본 대로 그 들은 혼자 다니지 않는다. 갑자기 주머니에 면도칼 하나쯤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며 겁이 났다.
순간 나도 모르게 마치 내가 죄를 지은 사람인양 눈을 깔았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어렴풋이 들렸는데 그들 역시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져서 뛰어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을 수 있었다.
지금도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나서서 그 위험한 인물의 어깨를 두 손으로 찍어 눌렀던 용기(객기?)따위.. 분명 두 분도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었을 테니 그대로 방생(?) 한 것도 나쁘지 않았던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