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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자녀 디자이너 May 04. 2024

마지막 가르침

인생시계

단톡방에 알람이 울린다.

수십 명이 모여있지만 누구도 먼저 말을 잘 꺼내지 않는 50대 중년들이 모여있는 방엔 부고장이 정적을 깨곤 한다. 이젠 친구의 부모님 장례식장에서 얼굴을 보고 서로 안부를 전해야 하는 그런 인생의 시기를 보내는 중이다.


젊어서는 결혼식을 우선하고 장례식은 잘 챙기지 않았었다.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그런가 했지만 그것보다 나는 진정 가족의 '죽음'에 대한 그 슬픔에 대해 제대로 공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문상을 드리고 상주와 인사를 건넬 때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눈만 껌벅거릴 때가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장례식만큼은 꼭 챙기려 노력한다.


어머니가 힘든 병마와의 싸움 끝에 결국 돌아가시고 나니 죽음이 무엇인지 그제야 알게 된 거 같다. 인생이 그렇게 슬프고 허무할 수가 없다. 이후로 한동안 어머니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나고 다른 어머니의 영정사진 마주해도 울컥했다. 그리고 이제야 진심 어린 위로 비슷한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도 부모님 중 어느 한분이라도 건강이 좋지 않은 친구들이 꽤 있다. 아직 한창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아이도 챙겨야 하는데 부모님이 갑자기 쓰러지시고 치매가 오시고. 시간적 정신적 경제적인 어려움도 한꺼번에 같이 밀려온다.


어머니를 먼저 보낸 입장에서 나는 친구에게 지금 무리 힘들어도 '나중에 후회가 지 않도록 해라.'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결국 나는 '후회하고 있다.'고백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2021년 8월 6일 오후 11시 30분. 어머니를 영면으로 모시는 길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 어머니를 죽음으로 이끈 것과 다름없던 코로나 바이러스는 어머니가 임종하고 나서도 가시는 길을 방해했다.


분당서울대 병원 장례식장을 알아봤는데 장례식장 수속을 밟으려니 다른 병원 장례식장으로 시신을 옮기려면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죽어서도 또 코로나 검사를 또 받아야 하다니..'


자정이 되어 사망 선고를 받으신 어머니의 시신을 이송차에 태우고 새벽에 거리로 나서서 장례식장과 병원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나서야 겨우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안성의 천주교 묘지에 안장을 하고 어머니를 차가운 땅에 묻고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부터 멈추지 않던 눈물은 그 후로도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흘러내렸다. 


이후 성당에서 59제를 드리고 생신에도 1주년에도 어머니를 추도하는 예를 드렸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다닌 성당에 의지해서 제사대신 계속 연도 미사를 드려도 됐으나 마음에 있지도 않은 하느님이란 분께 무단으로 얹혀 계속 돌아가신 어머니께 체면 치례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1년이 지난 뒤부터는 아예 연도 미사도 올리지 않게 되었다. 다행히 결혼 후 신앙을 꽃피워낸 제수씨 덕에 동생네 에서는 계속 미사를 올렸다고 한다.


부모님이 가톨릭 신자였던 지라 집에서 한 번도 제사를 지내는 걸 본 적이 없는 나는 이제 와서 신도 귀신도 믿지 않는 입장에서 내 안에 있지도 않은 신앙을 핑계로 종교예식을 계속 따르기도 어려웠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선 언제부터인가 틈틈이 고민을 하긴 했었는데 막상 닥쳐도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전통 제례를 유튜브라도 보며 익혀야 하나 하는 고민을 다.


그러다가 기일이 오면 뭐라도 하긴 해야 해서 부모님이 하시던 천주교 제사 방식에서 연도를 읊는 것만 생략, 대신 조용히 묵념하는 것으로 하고 그래도 돌아가신 분께 절은 해야 할 거 같아서 영정 사진을 앞에 두고 아이들과 내방식 대로 제사를 치렀다.


다음 해가 됐을 땐 집에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과일 몇 가지도 올려놓고는 같은 방법으로 절하고 묵념하고 그렇게 예를 치렀다. 뭔가 많이 부족하고 모자라 보여 어떻게 추도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앞으로도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적어 내려가는 어머니에 대한 회고의 글들이 혹시나 부족한 정성에 대한 위안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타인의 경조사에 대한 나의 태도는 달라졌다.

마음의 표현에 대한 어색함이 덜해졌다고 해야 할까? 예상했던 만큼 혹은 예상하지 못했던 지인들의 조문과 지원 (우리가 부조라고 부르는 그것)의 힘은 내가 게으르게 혹은 기계적으로 표현하던 그것들과 반대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게 하였고 전혀 다른 차원의 무게였다는 깨닫게 하였.


나는 혼자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결코 가볍게 무시할 수 없는 끈끈한 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처음 현미경이나 관측 망원경으로 발견하듯이 실제적인 현상으로 인식하게 된 것 다름이 없었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피부로 와닿은 나라는 놈의 한계 그리고 삶의 허무함이 부작용처럼 약간의 느슨함 혹은 관대함으로 발현이 되어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느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일까?


타인의 실수에 대한 그러려니 하는 반응. 사람은 결국 완벽하지 못하고 궁극적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는 것을 더 절실히 느껴서 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죽음이 마치 내 씻을 수 없는 과오 혹은 죄처럼 느껴져서 일지. 아직 잘 모르겠고 과연 언제 깨달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아니 알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나는 그동안 시달려온 강박이라는 증세에서 조금 벗어난 것처럼 그저 세상에 대한 약간의 관조 혹은 관용이 생긴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모 중 한 분의 죽음으로 깨닫게 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당연하고 평범하고 굳이 어 말하기도 쑥스러운 그런 일들이 많았다. 모두 아니라고 부정하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들이다. 어쩌면 부모의 죽음은 모자란 자식을 깨우치기 위한 마지막 가르침 일지도 모른다. 그런 비슷한 많은 우화나 동화들이 그저 상상으로 태어난 이야기들은 아닌 모양이다.


자식이란 놈은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든 부모에게서 뭐라도 하나 얻어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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