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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자녀 디자이너 Oct 01. 2023

회장님과 디자이너

디자이너가 리더가 된다면?

앞의 글 '자동차와 유니폼'에서 당시 자동차나 농구 유니폼이나 90년대에 모두 만족스럽지 못했던 원인은 디자이너의 역량뿐 아니라 그것을 결정하는 과정문제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을 해 보았는데 이후 현대의 행적을 보면 얼추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Designer vs client

디자인이란 작가가 직접 빚어내는 창작행위뿐 아니라 최종안을 결정하는 과정까지를 포함해야 한다. 특히 디자인을 구매하는 클라이언트가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나의 직업인 건축에서도 건축가의 역량뿐 아니라 어떤 마인드와 안목을 가진 클라이언트(건축주)를 만나느냐가 성과물의 큰 변수가 된다. '결정'이라는 중요한 과정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것도  결실이다. 그 후 현대는 디자인 혁신의 방안을 찾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는다.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피터 슈라이어의 등장.

방법은 바로 외부수혈. 기존 조직이 각성 만으로 스스로 환골탈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현대는 디자인 결정 있어 중요한 판단을 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실력 있는 전문가를 영입한다. 모든 중요한 결정을 회장님의 안목에 의지 하던 한국 기업문화에서 디자인 실무 경력에 바탕을 둔, 그것도 외국인을 최고 경영진으로 영입한 것은 신선했고 곧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끌어 낸다.


CDO (Chief Design Officer)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다. 1953년생 독일 아우디 출신 디자이너로 2006년 기아로 오게 될 당시 이미 50대였으니 한국 기업 풍토에선 은퇴할 나이를 대상으로 파격적인 인사를 한 것이었다. 보수적인 한국 조직에서 이런 파격적인 인사를 감행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내부적으로도 새로운 경영인이 등장 함으로써 가능했다.


당시 언론에 나온 피터슈라이어와 그를 불러들인 정의선 (정몽구 회장의 아들)


변혁은 어쩌면 외국인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자동차 선진국인 독일에서 활약하던 디자이너쯤 되어야 기존 박혀 있던 돌들의 견제와 질시 그리고 관행과 위계에 갇히지 않고 전혀 다른 프로세스와 시스템을 도입해서 판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디자이너에게 상무나 전무도 아닌 부사장급의 직함을 달아 줬으니 현대의 결단이 대단했다. 경영진으로써 실무를 직접 하지는 않더라도 방향 제시뿐 아니라 책임지고 추진할 수 있는 축적된 디자인 역량을 갖춘 인재를 찾은 것이다.


피터 슈라이어 영입의 성과는 그가 부사장 직을 맡았던 기아에서 바로 드러났다. IMF의 여파로 1999년 현대자동차로 인수된 이후 신차를 내보낼 때마다 맥락 없이 이리저리 차를 베끼기에 급급 했던 기아차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당시 소형 SUV였던 스포티지 R은 독일 폭스바겐 티구안과 견줄 만큼 균형 있는 비례와 세련된 디테일을 갖고 태어났는데 그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기아에서 연이어 나온 모든 차들이 드디어 한 집안의 DNA를 물려받은 듯이 정체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K5, K7, K9 체급별 세단의 진용을 갖추고 SUV까지 패밀리 룩을 연출하면서 드디어 '보잡 디자인'에서 벗어나기에 상당히 짧은 시간이었다. 그때부터 기아는 성공작을 줄줄이 내놓으면서 '디자인 기아'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점차 각인되었다.



2010년 K5 1세대와 스포티지R

 


디자인 파워로 인한 기아의 괄목상대할 성장에 힘입어 그는 2013년 부임한 지 7년 만에 현대자동차 그룹의 디자인 총괄 사장으로 승진한다. 이후 그가 영입한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 루크동커볼케가 뒤를 이어 현대차의 디자인 총괄이 되었고 곧 제네시스 G80 같은 수작을 뽑아낸다. 현대는 시행착오 끝에 디자이너에게 경영진급의 책임과 권한을 내어 주고 글로벌 마켓에서도 이제 디자인을 좀 할 줄 아는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된다.


2020년 제네시스 G80과 현대 아이오닉5


특히 현대가 고급브랜드를 론칭하기 위해 2003년도부터 준비한 제네시스는 이제 독일의 명차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아름다운 맵시의 디자인을 갖추었고 특히 실내 인테리어는 타깃이었던 독일이나 일본의 경쟁사들보다 한 급 더 위의 고급을 장착했다는 평을 받았다. 전기차 아이오닉 5는 세단도 SUV 도 아닌 독특한 세그먼트로 나왔는데 1975년 현대 자동차의 첫 독자생산 모델이었던 포니를 성공적으로 오마주 한 것이다. 아이코닉한 이미지에 친환경 소재까지 더하여 수입차의 무덤이라고 하는 일본에서 2022~2023년 '올해의 최고의 수입차'를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 이룩한 이런 성과에도 나는 아직 현대차 디자인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었다.

세계의 시장에서 경쟁하는 유명 브랜드들과는 달리 현대(제네시스 포함)에게는 아직 없는 것. 그것은 바로 현대차에서 H 로고와 명찰을 떼버리면 무엇이 현대의 정체성 인지 디자인만 봐서는 아직 알기 힘들다는 이었다.


나 현대라구! 신차 앞뒤 램프에 H를 넣어버린 현대 (2023년 산타페)

기아는 피터슈라이어의 '호랑이코 그릴'패밀리 룩이 점차 진화하여 최근 대형 SUV 전기차인 EV9 에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피터 슈라이어가 먼저 호랑이코 그릴을 만든 것은 아마도 독일차의 영향인 듯하다. 모두 알다시피 BMW의 키드니 그릴과 3줄의 굵은 수평라인의 밴츠 그릴(요즘은 거의 사라진) 역시 럭셔리의 상징이었다.


이 그릴의 역사는 처음엔 기능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차의 얼굴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이젠 그릴의 기능 필요 없는 전기차에도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는 걸 보면 얼굴부터 확고한 컨셉을 두어 기아의 정체성을 다진 피터 슈라이어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고 보여진다.


BMW 와 기아 전기차의 전면. 과거 키드니(콩팥)와 호랑이코 그릴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릴과 같은 한 두 가지의 아이템 만으로 디자인의 정체성과 헤리티지를 갖고 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밴츠는 이미 전통적인 그릴을 버린 지 오래지만 여전히 멀리서 봐도 가까이 봐도 틀림없는 밴츠다. 랜드로바는 2차 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여전히 실내에 있는 공조 다이얼 하나만 봐도 랜드로버이고, 고급으로 온몸을 휘감아도 여전히 오프로드에 최적화된 메커니즘이 그대로 체형에서 드러나는 랜드로버다. 한마디로 뼈대 있는 유럽 자동차 명가의 신차는 처음 봐도 뉘 집 자식인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어떤 점을 빼닮았는지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러한 디자인을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내려진 위대한 유산으로 해리티지와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지켜내는 것이 생존 경쟁에서 얼마나 큰 힘인지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을 닮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물처럼 진화하는 디자인, 미천한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물건일지라도 DNA가 박혀있는 디자인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 다음글 '한 줄과 두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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