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은 영어로 Identity. 전통에 어울리는 단어로는 Heritage 가 먼저 떠오른다. 위대한 디자인 유산. 유산이란 뜻에는 Heritage 외에 Legacy라는 단어도 있는데 'Legacy는 정신적인 것 Heritage는 손에 잡히는 물질적인 유산에 가깝다'는 해석이 있다. 또한 '브랜드에 있어 헤리티지는 오랜 세월 한 브랜드가 만들어낸 탄탄한 유산이며 가치이므로 쉽게 만들어 지지도 않고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현대 자동차에게 있어 쉽게 만들지도 지워지지도 않을 Design Identity와 Heritage는 과연 무엇일까?
2000년대에 들어서 현대자동차는 6 각형 핵사고날 그릴(아우디랑 비슷)을 전면에 내 세우다가 어느 날 Fluidic Sculpture라는 컨셉이 나오더니 요즘은 로보캅을 연상시키는 Seamless Horizon Lamp를 신차에 적용하고 있다.차가 출시 될 때마다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을 하다 보니 30년 넘게 같은 이름을 쓰는 쏘나타나 그랜져와 같은 스테디셀러도 신차가 나올 때마다 전작의 후속임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디자인 변천에 맥락이 없게 되다 보니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진 디자인 인지, 이것이 현대차 인지조차 알아보기 어렵다. 혹시 현대는 전통이 없는 것을 전통으로 삼으려 하는 건가?
제네시스 두줄 현대는 한줄. 혹시...계급장?
꽤 멋지긴 하지만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디자인의 근본을 알기 어렵다는 것은 어쩌면 100년도 지나지 않은 근대에 침략을 겪으며 대가 끊기고 망가졌던과거의아픔에서 아직 다 회복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마음이 안 좋다. 어쩌면 폐허가 됐던 국가의 생계를 짊어지고 산업역군으로서 앞뒤 가릴 것 없이 달려온 국민기업의 진정한 정체성 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현대 자동차에게 남부럽지 않을 Identity와 Heritage 가 생기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1986년 일본 미쓰비시와 함께 자체 개발한 고급 세단 그랜져는 현대의 독보적인 플래그쉽(Flag ship)이었다. 따라서 당대의 디자인 및 기술력의 정수를 쏟아부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는 1996년 대우 자동차 아카디아의 대항마로 그랜져의 플랫폼에 차체만 키운 다이너스티를 만들게 됐고 이후 에쿠스, 제네시스, 아슬란 까지 연이어 출시하면서 그랜져는 점점 플래그쉽에서는 멀어지는 체급으로 내려오게 됐다. 그러나 단종되지는 않고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며 2022년에 7세대 그랜져 까지 출시되었는데, 최근새내기 그랜져 신차가 36년 전 1세대 그랜져의 디자인 헤리티지를 계승하겠다고 한다. 왜 갑자기?
1세대 각그랜져와 7세대 그랜져의 뒷태. C필러 부분을 닮으려 한거 같다.
그랜져는 길을 잃었었다.
현대의 기함 자리에서 밀려난 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행에 편승해 이리저리 휩쓸리다 보니 문득 '나는 누구인가 지금 여긴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랜져는 국내에서도 세계에서도 어중간한 포지셔닝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미국 시장에서 쏘나타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되던 세계 최강 도요타 캠리와 경쟁하기 위해 그랜져가 나서게 됐었고 이후디자인도 캠리를 따라가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랜져 5세대 (2011~2014)와 캠리 (2011식)
남의 눈치를 보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뒤를 따라다닌다는 것은 여전히 고유한 정체성과 헤리티지가 희박한 문제로 여겨진다. 어떤 물건이 잘 팔리는지 눈알을 굴리며 이리저리 모방과 답습을 해야 하는 상황 역시 문화적 자신감이 없는 기업의 리더십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이제야 자각을 하기 시작한 현대는 급기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1세대를 떠올리는 마케팅으로 현대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고 있다.
포니를 닮은 N비젼74 - 현대도 자신들이 부족한게 무엇인지.알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현대는 또 맥락 없는 신차를 내놓았다. 갑자기 상남자스러운 이 각진 SUV가 싼테페라고? 이 어설픈 랜드로버 짝퉁 같이 생긴 게 싼타페라고? 차라리 '갤로퍼'라고 하지!! (아.. 산타페 1세대의 영광이여..) 해드램프 DRL (Daytime Running Lamp)을 굳이 H로 새겨 넣고 이차는 현대라고 알아봐 달라 애썼다는 건 알겠다. 그래도 이건.. 싼타페라는 이름을 붙여 놓기에는 과거 산타페의 헤리티지가 아깝다! 마치 과거 쌍용이 이상한차들을 줄줄이 내며 코란도라고 우겼던 것처럼!!
각진 디자인의 산타페 5세대 (2023)와 토레스 (2022)
최근 한국에서는 각진 스타일의 SUV가 인기를 끌고 있다. 패션이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하듯이 자동차도 역사를 보면 유선형과 직선 어느 쪽이 더 최신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트렌드가 계속 달라져 온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싼테페의 직각 급선회는 당황스럽다. 최근 메기 얼굴로 혹독한 시련을 격은 쏘나타와 싼타페는 자신감을 잃고 호불호가 없는 믿을만한 디자인(람보르기니와 랜드로버)에 편승하여 서둘러 탈출하려는 느낌이다.
유행을 따라가는 것이 문제일까? 꼭 그렇진 않다. 고유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브랜드도 유행과 기술의 발전에 맞추어 어느 정도는 트렌드를 따라간다. 페라리와 람보르기니가 결국 SUV를 만들게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SUV는 누가 봐도 페라리이고 람보르기니이다. 평생 납작하게 깔린 스포츠카만 만들던 회사가 얼마나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이 확고하면 이렇게 장르를 바꿔도 그대로 정체가 드러나는지 부러울 뿐이다.
페라리 푸로산게 (2022)와 람보르기니 우르스 (2018)
그런데 현대 자동차 디자인의 더 큰 문제점은 혼란스러운 정체성뿐만이 아니다.
갑자기 확 바뀐 신형 싼타페의 가까운 미래를 예측해 본다면 앞으로 3년 후에는 또 '신차급 페이스리프트!'라는 홍보문구가 나올 것이고 5년만 지나면 또 전혀 다른 모습으로 풀체인지를 하고 나타날 것이다. 이제까지의 현대의 전형적인 시나리오를 따른다면 말이다. 아이덴티티와 헤리티지를 논하기 전에 현기차(현대와 기아)를 살 때 가장 우려되는 한 가지는 아이돌 가수들의 패션보다도 더 빨리 유행이 지나 신차가 나오는 순간 몇 년 되지 않은 전 모델은 너무도 다른 디자인의 구형차가 된다는 점이다. 수천만 원이 넘는 자동차를 마치 동대문에서 5만 원에 소비되는 패션과 견줄 만큼 짧은 주기로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바꿔버리는 정책은 스스로 영원히 싸구려에 머물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두줄 페밀리룩으로 세그먼트를 완성시킨 제네시스. 과연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이런 빨리빨리 확 바뀐 신제품을 내놓아 안목이 낮은 소비자들의 구매욕을 자극하여 판매량을 유지시키는 전략은 어쩌면 그동안 국내에선 현대만의 플렉스(Flex) 였을 수도 있다. 시장 점유율이 작고 자금 여력이 안 되는 타 경쟁 업체에서는 신차 출시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고 현대에 비해 성공작을 한번 내면 크게 바꾸지 않고 오래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국내엔 경쟁사라고 해봐야 위태위태하게 고비를 넘기고 있는 KG 모빌리티:구 쌍용차 가 유일한 순수 국내 자동차 제조 업체인 셈이다.)현대가 신차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나 나아가는 방향이 많이 아쉬웠다.
같은 플렛폼과 외형을 공유하는 2002년식 렉스턴(전면 우)과 렉스턴 W (2012~2017)
우리 집엔 20년이 넘은 2002년식 쌍용 렉스턴이 한대 있다. 이차를 오래 몰면서 느꼈던 점이 많지만, 그중 좋았던 점 한 가지를 꼽으라면 회사가 어려움을 겪는 바람에 무려 15년가량이나풀체인지 없이명맥이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회사로써는 안타까운 이야기 일 수 있겠지만 렉스턴 디자인을 좋아하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이는 물론 렉스턴 초기 모델이 무려 15년이 지나도 약간의 디테일 변경만으로도 버틸 만큼 출시 당시 시대를 앞서가는 뛰어난 디자인이었다는반증이라고 생각한다.지극히개인적인 의견일 수 있다. 안타까운 쌍용의 이야기도 기회가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