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로망 자동차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현대의 디자인 정체성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글을 이어가다 보니삼성에 대해서도 쓰게 됐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삼성과 현대는 창업주의 배경과 시작이 달랐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기업 문화도 많이 달랐다. 이러한 차이는 기업과 관련된 모든 것에 연관되어 있다. 작게는 사무실의 가구, 탕비실과 화장실의 분위기부터 기업을 키운 주력 산업분야의 모든 제품과 그룹 사옥의 디자인에 까지 영향이 있다는 걸 알았다.
현대는 많은 시행착오 끝에 오늘날 대한민국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도 알아주는 자동차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지만 공교롭게도 삼성역시 자동차를 만들려 했었다. 형들을 제치고 아버지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삼성을 승계받은 3남 이건희는 유학시절에 자동차를 직접 분해 조립하고 중고차 거래까지 하던 자동차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개인적인 취향까지 더해져서 회장이 된 1987년부터 자동차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드디어 1995년에 삼성 자동차를 발족하였으나 불운하게도 1997년에 터진 외환위기로 결국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사업을 접게 되었다. 자동차 마니아이던 이건희 회장의 삼성이 자동차 회사를 계속해서 키워나갔더라면 현재 한국의 자동차 시장은 어떻게 달라져있을까? 모르긴 해도 아마 현대 자동차와는 결이 다른 명품 자동차 메이커를 한국이 품게 되었을 거라는 후일담이다.
자동차 광이라 알려진 고 이건희 회장
있는 집 자식의 취미활동으로부터 근원을 찾을 수 있는 삼성 자동차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삼성은 자수성가형 기업인 정주영의 현대와는 결이 다른걸 많은 곳에서 느낄 수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이 두기업을 분석한 자료는 이미 차고 넘친다. 특히 배경과 역사가 다른 점에 착안한 기업문화의 차이점에 대한 내용이 많다.
화장실과 병원 그리고 장례식장.
이건희 회장은 취임 후 본격적인 글로벌 시장 진출에 앞서 비즈니스를 위한 에티켓과 매너를 갖출 것을 강조하였다. 삼성 그룹 임원교육 과정에 부부동반으로 와인 교육을 넣을 것을 지시를 하기도 하였다. 또한 어려서부터 접했을식품, 의류, 금융 사업에 걸맞은 한국인의 의식주에 세심한 관찰과 배려가 돋보이는 지시를 하기도 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한국의 공중 위생과 장례 문화에 기여한 것을 꼽을 수 있다.
90년대에만 해도화장실은 재래식 화장실 (쪼그려 싸)이 여전히 많았고 청결에 대한 개념이 옅었다. 공중화장실이나 기업 (공장)에 있는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는데 화장실을 사색할 수 있는 창조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편안하고 청결하게 꾸밀 것을 지시하였고 삼성 관계사가 이용하는 모든 화장실에 신속한 개선이 이루어졌다. 내가 건축설계에 입문하는 초년생이었을 때는 화장실 평면에서 단 한 뼘이라도 허투루 쓰이는 공간이 있으면 선배로부터 혼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특히 다중이 이용하는 시설의 화장실들은 너무 빡빡한 화장실 평면보다는 조금 여유롭고 쾌적한 공간을 설계하는분위기로 바뀌었다.
좋은 것은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가는 한국 사회에서 삼성은 당시 경쟁 기업뿐 아니라 공직사회에서도 밴치마크가 되곤 했다. 오늘날 우리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날 수 있는 (음악이 흐르고 초록이 보이는) 감동적인 공중 화장실의 탄생은 삼성의 영향으로 앞당겨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망향 휴게소와 음성 휴게소 화장실
이러한 위생에 대한 관심에 그치지 않고 이건희 회장은 1994년 서울 강남 일원동에 삼성의료원 (서울 삼성 병원)을 세움으로써 한국 의료 및 장례 문화를 혁신하였다. 이미 선대에서 1968년에 고려병원(현 강북 삼성병원의 전신)을 세운 전력이 있던 삼성은 90년대에 이르러 당시 열악했던 환자와 보호자에 대한 서비스를 개선하고 환자를 고객으로 대우하고 의사 이외 전문 간호 인력에도 기업의 인사 제도 개념을 도입하는 등, 종합 병원을 기업 경영 마인드로 접근하여 국내 의료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러한 혁신은 제도의 개혁뿐 아니라 각종 첨단 시스템의 도입으로 가능했다. 당시 삼성의료원은 국내 병원 최초로 진료 예약제를 실시하였고 진료현장에서 처음으로 종이차트를 없앴다. 전산 시스템 구축뿐 아니라해당과로 천정 공간을 통해 사물을 전달하는 자동반송 장치는국내 수준에 머물지 않는 세계 최고의 병원 건축 설계를도입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이 역시 평소 문화와 공간에 아낌없이 투자를 하고 건축에 있어 진심인 삼성의 면모가 드러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삼성 병원
주택에서 아파트로 주거 문화가 옮겨가던 그 시기에도 장례식은 집(아파트)에서 치르고 장지로 출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아파트는 조문객 인파로 공간이 협소하여 아파트 주차장에 천막을 치고 장례를 치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불편을 격던 시기에삼성의료원(삼성서울병원)에 처음으로 청결하고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전문 장례식장이 등장했고 이는 곧 전국으로 퍼져 현재 한국의 전형적인 장례 문화의 표준이 되었다. 이처럼 국민의 일상과관습까지 섬세히 들여다보는 것이 삼성의 남다른 점이었고 이는 한국인의 삶과 문화를 들여다보는 기업총수의 섬세한 안목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화예술과 경영
삼성은 생활 속에 녹아든일상적인것들 뿐 아니라 전통과 문화 예술에도 관심이 컸다. 1970년대부터 이미 문화재단을 설립하여 각 예술분야를 지원하고 유물을 전시, 보존하는 활동을 하였다. 호암 미술관을 시작으로 로뎅 갤러리(프라토, 현재는 폐관) 그리고 리움에 이르기까지 그룹이 직접 건립, 운영한 미술관들이 있으며 이건희 회장의 각별한 자동차에 대한 사랑으로 만든 자동차 박물관, 그리고 삼성 어린이박물관도 건립하였다. 삼성의 이러한 문화행보는 경영 전략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재단과 오너 일가의 컬렉션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게 맞으나 문화와 예술이 기업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리기엔 충분했다.
삼성 리움 미술관. 뒤로는 하이얏트 호텔이 보인다.
삼성은 시대의 예술품을 품고 있을 미술관 그 자체도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고자 했다. 당대 세계 최고의 건축가 3인(장누벨, 램쿨하스, 마리오보타) 에게 디자인을 의뢰하여 10년의 인고의 세월을 거쳐 건립할 만큼 건축에도 아낌없는 투자를 하였다. 각각 현대, 고대, 컨템퍼러리 미술을 담은 3개의 건축물은 당시 한국 건축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디자인뿐 아니라 특별한 재료와 공법을 동원하여 만든 건축물로 큰 이슈를 만들었다. 다만 역시 초기에는 그룹의 컬렉션 성격이 강했으므로 미술관의 위치 선정부터 초기 기획, 운영까지 대중보다는 다소 삼성 중심으로 건립되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사회적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예술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상승하여 투자로도 의미가 있다. 가치는 명품으로 발현된다. 기업이 문화와 예술에 투자하는 이유는 명품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 때문일까? 이번엔 다시 현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