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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자녀 디자이너 Nov 25. 2023

신용카드와 도서관

브랜딩의 시대

다시 2000년대의 '현대'의 움직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엔 현대 자동차가 아니고 현대 카드 이야기이다.


Y2K(밀레니엄버그)로 세상이 뒤집힐 것만 같던 2000년이 밝았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 4강을 절정으로 한국은 국운이 치솟는 듯했고 뭔가 큰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역시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2008년 어느 날 TV에는 중독성이 강한 Hook 광고가 등장했다. 신용카드의 앞면과 뒷면을 보여주다가 "옆면 옆면 옆면.." 하는 기계적인 음성이 나오면서 그 당시까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카드의 옆면을 칼라풀하게 보여주는 광고였다.



생각해보래.. ㅋ (2008년 현대카드 광고)


아니 신용카드에 웬 디자인 광고?

겨우 85.6 x 53.98mm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황금비율이라고 한다)의 다 똑같은 크기의 카드. 조그맣고 반듯한 사각형 카드에 도대체 무슨 디자인에 대해 할 말이 많은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이후에 혜택을 많이 주지도 않는 현대카드를 빗대어 사람들은 '카드 디자인이 최고의 혜택'이라는 말을 게 된다.


현대 자동차를 살 때에 포인트 혜택 등을 받기 위해 만드는 신용카드로 인식되던 현대카드는 2003년 정태영 사장이 부임할 당시 점유율이 1.8%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그의 부임 후 7년여 만에 16.3%까지 끌어올려지게 된다. 정태영 부회장은 현대가의 '정'씨로 보일 수 있지만 한자가 다른 나주 정 씨이고 현대가의 아들이 아닌 사위이다. 이분 역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금수저인데 전공은 다르지만 디자인에 정말 진심인 경영자였다.



정태영 부회장은  SNS로 소통을 즐겼다고 한다.


똑같은 플라스틱 조각에 알록달록 금박을 인쇄하는 정도? 종류도 많고 매년 달라지는 홍보물 디자인이나 다름없다 여겼던 신용카드가 TV 광고 전면에 내 세운 것이 연회비 면제나 각종 혜택이 아닌 디자인이라니? 2002년 현대카드는 자동차와 배우를 클로즈업하면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자동차 광고나 다름없는 마케팅을 했었는데 갑자기 디자인 광고라니! 정말 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드 앞뒷면도 기존과 차별되는 미니멀한 디자인이었으나 현대는 0.8mm 두께의 옆면을 활용한 디자인을 하였다. 무채색의 전면과 대비되는 강렬한 칼라를 옆라인에 입혀놓고는 '잘 보이니까!'라고 했다. 맞다! 카드가 꽉 찬 지갑을 열면 현대카드가 제일 잘 보였다. 이런 독특한 카드를 만들기 위해 단순 페인트칠을 한 것이 아니라 재질이 다른 (컬러코어) 재료를 사이에 넣어 만들었으니 디자인을 광고 전면에 내세울만했다. 카드 제작도 점점 발전하여 2014년에는 구리 합금 신소재인 코팔(Coppal, Copper+Alloy)을 사용하기 이르렀다.


현대카드 여의도 사옥 - 카드 처럼 네모 반듯한 박스 건물 입면 디자인도 쉽지않다.


게다가 2015년에는 서울에 있는 현대카드 본사에 카드 공장을 옮겨놓아 신용카드 제작 과정을 소비자가 직접 볼 수 있게 하였는데, 무형의 금융상품이 소비자의 선택에 의해 실체화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상품에 스토리를 입히고 가치를 높여나가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이름하여 '카드 팩토리'는 여의도 본사 9~10층 두 개층에 위치해 있는데, 이 여의도 본사도 건물 생김새를 보니 신기하게도 현대카드의 미니멀한 디자인을 닮았다.


이전 글 현대 자동차편에서는 디자이너가 리더가 됨으로써 상품을 혁신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었다. 그런데 현대카드의 정태영 부회장은 디자이너 출신도 아니었고 현대카드라는 금융회사도 디자인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었다. IC 칩이 박혀 있는 단순 플라스틱 쪼가리였던 신용카드에 어떻게 디자인을 입히고 제작에 공을 들여서, 또 그것을 만드는 공장을 서울 한복판 오피스 건물에 들여놓는 발상을 하여 기존 금융업계와는 차별되는 마케팅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현대 카드를 조사하면서 '기업 브랜딩'이란 용어를 접하게 되었다.


스타벅스는 문화를 팔고 나이키의 광고에는 제품이 부각되지 않는다. 요즘 아이돌 기획사는 음반 판매로만 수익을 내않는다. 팬덤을 형성하고 문화를 만들어 결국 수익으로 이어지는 마케팅 전략 중심에 기업 브랜딩이 자리 잡는다.


정태영 대표가 보여준 기업 브랜딩은 디자이너의 역할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디자인라는 전문 영역에서는 정부회장은 결국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찾아보니 디자인 에이젼시 '토탈임팩트'의 오영식이란 분이 나온다. 10여 년간의 작업을 'Hyundai Card Design Story'라는 책으로 내서 사람들이 알게 됐다. 자신들의 작품을 자꾸 다른 사람들 꺼라고 해서 스스로 홍보의 필요성을 느껴서 낸 책이라고 한다.(그 '다른 사람들'은 혹시 현대 사람들이 아닐까..?)


토탈임팩트의 책 (2015) vs 현대카드 디자인 아카이브 (2013~ 총 3권) 같은 성과에 대한 다른 견해가 없을지 궁금하다.


정태영 회장이 보여준 기업 브랜딩은 디자인 행위에 국한되지 않은 기업을 대표할 수 있는 '페르소나'를 찾는 작업으로 이를 증명하듯 현대카드는 카드 디자인뿐 아니라 음악을 포함한 문화와 공간연출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모든 분야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는 곧 마케팅과 접목되어 매출 증가로 이어지며 실질적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경영자로서의 그의 능력을 반증하였다.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팬덤을 형성하여 괄목할만한 수익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애플의 행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브 잡스 역시 제품의 기술, 디자인, 마케팅까지 사업 모든 분야의 구심점이 되었던 실질적인 디렉터였다. 관련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면 애플에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켄시걸 (Ken segall)'이라는 이름이 검색되는데 이분이 과연 실질적으로 얼마나 애플에 영향력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2014년 발간된 '미친 듯이 심플'(Insanely Simple)이라는 책은 2011년에 작고한 스티브 잡스가 볼일이 없었던 점으로 봐서 나는 왠지.. 아직 클라이언트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을 때 책을 낸 토탈임팩트 오영식 님? 에게 점수를 더 주고 싶다. ;)


스티븐 잡스가 정말 정태영 부회장에게 동기부여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정태영 부회장 역시 디자인을 도구로 기존 금융기업의 관행의 틀을 깨고 문화사업까지 영역을 확장하여 기업을 브랜딩 하고 성공으로 이끌었다.


신용카드와 스마트폰 (2007년 아이폰)

(재미 삼아) 신용카드와 핸드폰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둘 다 사람이 늘 휴대하고 손에 잡힐만한 크기에 (아이폰이 나오기 전 셀룰러폰은 신용카드만큼 소형화가 되어있었다.) 전형적인 사각의 굴레라는 제약을 안고 승부를 걸어야 하는 디자인이라는 점이다. 현대 카드도 로고 등을 위한 워드마크 타입(폰트) 디자인부터 변화를 시작했는데 이 점 역시 스티브 잡스의 성공담과 묘하게 겹친다. 스티브 잡스는 대학교를 중퇴하고 캘리그래프 수업을 청강하면서 폰트 디자인에 눈을 떴고, 이후 잡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폰트를 가진 컴퓨터 매킨토시를 개발(1984)한다. 이후 애플의 Mac을 전 세계 디자이너가 가장 애용하게 된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슈퍼콘서트와 문화 사업

'CEO 가 챙길 때 브랜드가 공고해집니다.' 어느 인터뷰글에서 본 정부회장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무나 기업 브랜딩을 직접 챙길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정부회장은 1960 생으로 앞서 기업인의 문화적 소양과 에티켓을 강조했던 이건희 회장 (1942년생)에 비하면 신세대라고 할만하다. 훨씬 다양한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디자인과 문화 분야에 그의 이름이 키워드로 자주 떠오르지만 정작 본인은 스스로 철저한 금융인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그는 코로나로 잠시 소강됐던 2021년 전후만 제외하고 2007년부터 1년에 3~4회 이상 꾸준히 현대카드 슈퍼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관람석에서 같이 공연을 즐기는 정 회장 목격담도 있는 걸 보면 그것은 분명 자기가 좋아서 벌인 일이다.


'슈퍼콘서트'는 어린 시절 낡은 LP판으로 듣고 좋아했던, 아직 살아 계신지도 확신이 없는 전설 같은 뮤지션부터 (폴 매카트니, 휘트니 휘스턴, 스티비원더, 스팅, 퀸 , 메탈리카 등) 뉴욕이나 유럽에 가야 만날 수 있을 법한 당대의 슈퍼스타 (마룬파이브, 콜드플레이, 비욘세 등)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무대였는데 나는 '정말 이게 되는구나' 싶었다. 한마디로 '꿈같은 상상이 현실로' 되기에 어쩌면 이보다 쉬운 방법이 없었다. 물론 열성팬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 일지 모르나 그 팬의 수가 국내에 적지 않았다.



The way we build

예전 같으면 시공사나 설계사의 포트폴리오처럼 보이는 이 책은 2003년 그의 취임 후 지난 20여 년 동안 정태영 부회장과 현대카드가 만들어온 건축과 문화 콘텐츠를 담고 있다. 책 표지의 'Build'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카드는 건축적으로도 그동안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실제 많이 지었다.  Library라는 키워드로 디자인, 뮤직, 트래블, 쿠킹 라이브러리 시리즈를 건설고 근처에 바이닐 앤 플라스틱, 스토리지, 캐슬오브스카이워커스 같은 브랜드 스페이스, 그리고 가파도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철학과 페르소나를 응집한 29개의 건축과 공간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다.



'스페이스 그 자체가 미디어이자 중요한 브랜드의 표현방법 중 하나가 된 시대'

공간을 미디어로 보는 발상에 이어 UX - User Experience 경험 디자인 (WEB 개발에 사용되는 용어)으로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다. 실제 물리적인 공간에서 이동하는 사람들의 동선을 IT 기기에서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에 견주어 사용자를 헤매지 않게 하고 효율을 높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아냈다.


클라이언트의 공간을 창출하는 능력 혹은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는 늘고 있다. 지구라는 한정된 물리적 공간에서 인간은 결국 자신의 자리(Space)가 필요하고 여기에는 가치가 따른다. 현대에 풍족한 재원으로 마음껏 자신의 공간을 연출할 수 있는 적임자는 바로(대) 기업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가들이 귀족이나 부호의 지원으로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불가역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디자이너들은 대기업의 투자로 공간을 연구하고 새로운 가치를 찾고 문화에 기여하고 수익을 창출한다.



The way we build 와 NHN의 디자안북


너의 개념(Concept)이 무엇이냐?  

수님의 질문 중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질문이었다.  Concept이라는 단어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이 많았다. 현업에서 실무를 해보니 프로젝트마다 요구되는 Concept은 너무도 온도차이가 컸다. 좋은 건 다 갖다 붙인 거 같은데 뭔가 새로운, 다 알고 있던 거 같은데 다르게 보이 경우도 다.


현대카드는 금융회사다. 돈 놓고 돈 먹는 이자와 수수료로 수익을 창출하는 냉정한 현실을 무대로 돈을 버는 회사이다. 그런데 디자인과 문화로 시선을 돌리고 그것으로 매출을 더 올렸다. 아는 길은 누구나 쉽게 찾아가지만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은 찾기 어렵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Concept이다. 세상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냉철한 분석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스스로 몰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아무 연관 없어 보이던 지점을 이어 로운 길을 만들고 기회를 찾는다.



제임스 터렐을 모티브로 만든 컨벤션 홀


나는 처음 현대카드 정태영 부회장의 발자취를 찾아보면서 '역시 디자인은 주인을 잘 만나야 된다.'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과연 건축가인 나는 그동안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고 있었나 하는 자문을 하게 되었다. 돈과 목적을 가진 클라이언트 그리고 제작으로 이어지는 실체의 물건(건물) 사이에 우리는 '디자인' 혹은 '설계'라는 과정만이 존재하는 시대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한편으로는 진정 디자인과 설계에 나는 얼마나 몰입했었는지 그러지 못했더라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자문을 하게 됐다.


그중 하나는 디자이너 혹은 건축가가 과업 초기 단계에 마주치는 모호한 Client의 Requirement에 있다. 이 책의 도입부터 다뤘던 개념 없는 디자인의 발원지인 회장님(결정권자)의 그릇된 결정에는 처음부터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해답의 어려움이 있다.


기획(브랜딩)의 Concept 이 확고해야 이를 시각화하는 디자인이 바로 갈 수 있기에 이 어려운 Concept을 정립하는 과정과 역할은 꼭 필요하다. Client의 요구(Owner Requirement)와 디자인 제작으로 이어지는 결과물 사이에 기획자 혹은 플래너, 마케터, 코디네이터, 브랜드 컨설턴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지는 역할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중에서도 Concept의 방향키를 잡고 진두 지휘 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역할은 CEO 본인 스스로 직접 수행(현대카드, 애플), 혹은 CDO (현대자동차) 같은 능력이 있을 경우에 결과가 성공적 이라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많은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방향 설정조차도 불분명한 제품 생산의 1차적인 도안을 그려내며 컨셉이 모호한 Client를 감당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이 책의 화두는 디자인이 필요한 모든 업역에 있어 Client와 Designer 사이에 처음부터 분명 별개의 영역으로 존재해야 하는 어떤 역할(!)에 관한 것을 쓰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019년에 찾았던 한남동 뮤직 라이브러리와 바이닐엔 플라스틱. 관련된 글을 쓰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업이 문화와 예술에 돈을 쓰는 것은 후원과 투자로 나뉠 수 있다. 문화에 직접적인 '투자'를 하는 것은 기업의 이익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문화의 힘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이 디자인과 상품개발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더 크고 포괄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업 브랜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현대카드를 통해 들여다보았다.


- 다음글 '겔럭시와 아이폰'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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