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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희 Oct 30. 2023

명랑한 아이

종로 익선동 원더랜드 골목 성장기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웠다. 

드라마에서 보면 부모님이 다툴 때 어린 자식이 울면서 말리거나 혹은 똑소리나는 애교로 말리기도 하던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엄마와 아빠가 싸울 때 나는 꽁꽁 얼어버렸다. 머릿속으로는 이렇게 말려볼까? 아니면  저렇게 말려야 하나 생각도 했지만 정작 나는 입술 1미리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도 동네에서는 '어린애가 말을 참 잘한다' 는 이야기를 종종 듣던 아무한테나 종알종알 수다 떨던 꼬마였는데 유독 엄마 아빠가 싸울 때는 실어증 걸린 아이 마냥 입이 쩍 붙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빠가 소리 지르는 모습과 엄마가 울고 불고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한 것을 보면 아마 지켜보고는 있었던 것 같다. 마치 깬 채로 가위눌린 것처럼 손가락 하나를 까딱하지 못한채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어서 그 모습을 정주행 했었겠지.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명랑한 아이였다. 

언젠가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 내가 집 앞에서 놀다 길을 잃어 몇 시간 미아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엄마가 혼비백산해서 온 동네를 찾아다니다가 내가 없어 울고 불고 거의 사색이 되어서는 옆 동네 쯤인가 파출소에 왔는데 거기서 내가 경찰아저씨에게 달싹 붙어서 까르르 까르르 웃어 넘어가면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그 모습이 어찌나 기가 막혔는지 아직도 종종 그때 이야기를 하신다. 


그때 우리 집은 멋들어진 한옥집은 아니었지만 한옥의 구조를 갖고 있던 집이었다. 나는 튓마루에 걸터앉아서 책을 보거나 색칠공부 등을 하며 시간 보내기를 좋아했다. '이제 그만 나가서도 좀 놀아라' 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종종 들을 정도로 집에 앉아서 책 보는 걸 좋아할 때였다. 그때 좋아했던 책들은 60권이 넘는 위인전기세트나 만화 서유기 등이었다. 어릴 때는 내가 ‘위인’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낯선 이국의 이야기들이 재밌었던 것 같다. 머릿속에서는 ‘서프라이즈 세상에 이런 일이’처럼 재연 배우들이 우리나라 세트에서 외국인인 양 찍는 정도의 그림이었겠지만, 자라면서 외국어 배우기를 좋아하고 외국에 나가 살아보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들은 어릴 적부터 동경해왔던 60여 명의 외국 위인들 때문이 아닐는지.


내가 능력 밖의 일을 멋지게 해낸 날이 한번 있다. 

모처럼 엄마와 아빠가 함께 외출한 밤이었다. 농구를 하며 자주 합숙훈련을 했던 오빠도 집에 없었다.  암튼 엄마 아빠 오빠도 없는 집에서 여러 번 읽은 책들을 뒤척거리며 혼자 있는 밤은 참 시간이 안 갔더랬다. 

그날 밤은 유난히 기분이 안 좋았다. 비도 오고 엄마 아빠는 집에 없고 배도 아팠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기분 나쁜 통증으로 배가 아팠는데, 바로 그날 밤 초경을 만났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초4 때 이미 키가 160센티가 넘어서 반에서는 웬만한 남자애들 보다도 컸고 어른스러운 얼굴이어서 고등학생이냐, 중학생이냐 질문을 종종 듣던 때였으니까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지만 가까운 친구들 보다는 3,4 년 이상 빨랐다. 붉은 초경을 처음 보자마자, 얼마 전 걸스카웃에서 여자의 생리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루하고 심심하던 혼자 있는 밤,  갑자기 우주에서 놀 거리를 하나 뚝 떨어뜨려 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난생처음 겪는 일이고 또 다른 것도 아니고 피를 보는 일이니까 두렵기는 했다. 

덜덜덜 떨리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 낯선 일에 흥분도 되었다. 

나는 곧장 걸스카웃에서 나눠준 책을 찾아봤다. 여자는 생리라는 것을 하게 되고, 그럴 땐 평소 보다 위생에 신경 쓰며 생리대를 부착해야 한다 등의 내용이 쓰여있었던 것 같다. 엄마의 화장대를 뒤졌다. 나는 그때 이미 엄마만 쓰던 미스테리한 물건, 생리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피 묻은 속옷 말고 새 속옷을 갈아입고 엄마의 생리대를 붙였다. 만약 요즘 세상이었다면 유튜브에서 #초경, #여자의 생리, #생리 때 조심할 것 등등을 찾아보았겠지만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었다. 걸스카웃에서 나눠 준 책자의 '여자의 생리 부분' 만 읽고 또 읽으면서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엄마를 기다렸다.


‘나 피 나 엄마’

엄마와 아빠가 싸우면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에게 나의 초경 소식을 알리자 분위기는 완전히 전환되었다. 내가 아무리 키가 크고 고등학생처럼 생긴 아이였다고 해도 엄마 눈에는 그냥 아이였을 텐데 그 당시로는 흔치 않게 초등학교 4학년에 초경을 한 것이 크게 놀랄 일이었나 보다. 엄마 아빠는 나의 초경 소식에 가히 압도되었다. 그리고 혼자서 속옷도 갈아입고 생리대까지 찾아서 부착하며 걱정할 것 없이 깔끔하게 처리한 모습을 보고는 다들 기뻐했다. 대견해하고 신기해했다. 나는 우쭐대는 마음이 들었다. 걸스카웃에서는 같은 학년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나보다 언니들을 위한 순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생리에 대해 배워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처럼 셋이 함께 웃고 난 잔뜩 추켜세워지는 으쓱한 기분에 스스로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날 밤만은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집안의 화목을 담당하는 똑똑하고 귀여운 막내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옛 골목에 힙플레이스가 공존하는 바이브로 명소가 된 곳, 내 고향은 익선동이다.

교동초등학교를 다녔다. 친구들도 대부분 근처에 살았고 아직도 건재한 낙원아파트가 지금 모습 그대로 있었다. 초등학교 때 찍은 사진에서는 운동장에 서있는 학생들 뒤로 낙원아파트가 떡 버티고 있다. 물론 기억 속에도 생생하다. 단성사피카디리극장에서부터 교동초등학교 조계사 교보문고를 둘러 종각역 쪽으로 나아가 종로서적을 지나 맥도널드를 거쳐 다시 낙원아파트까지 오는 커다란 반경이 내 어린 시절의 신나고 드넓은 놀이터였다. 매장의 상호명은 바뀌었어도 구조는 그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도심 중에서도 도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일 친한 친구가 낙원떡집을 하면서 낙원아파트에 살았었는데 그 집을 자주 놀러 갔었다. 

그 꼬맹이 시절부터 20대를 넘어서까지도.


도심 중에 도심이라고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찾아보면 주택가 라인이 있다.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더 좁은 골목이 이리 저리로 뻣어나갔다. 여기가 지금의 익선동이다. 최근에 그 익선동을 다시 가본적이 있다. 굵직한 구조는 변하지 않았지만 작은 골목들은 합쳐지기도 넓혀지기도 한 듯, 어린시절 거의 매일 숨바꼭질을 하던 첫째 골목, 둘째 골목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친구네 집 대문 앞에서 장군처럼 서서 "문 여얼어 주우세요 (리듬을 실어서)" 목청껏 문 열어라 노래를 부르면 친구가 나오고 그렇게 만난 친구랑 또 다음 친구네 집 대문 앞에 서서 또 다른 친구를 부르고 하던 그 골목이 지금은 온갖 젊은이들이 놀러 오는 카페가 되고 펍이 되어 있는 게 신기했다. 내 친구네 집 골조는 그대로 두고 거기다 카페를 차린 격이니까 말이다.


많이 더운 여름밤이면 조르르 붙어있는 골목 안 엄마들이 나와서 앉은뱅이 의자를 두고 주욱 앉아 골목 한 켠에 신문지를 깔아 아이들을 재웠다. 돗자리를 깔 수도 있었겠지만 돗자리로는 그렇게 순식간에 얼어붙듯 시원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작은 골목에는 차들이 다닐 수도 없었으니 덥다고 칭얼대는 꼬마들을 함께 재우며 엄마들은 수다를 떠는 1석2조의 순간이었지 싶다. 요새야 열대야에 한강에서 돗자리 깔고 그렇게들 잔다는데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어렴풋이 눕자마자 순식간에 '아이고 시원해' 란 말이 절로 나오며 스르륵 잠들던 익선동 구석 골목의 정겨운 여름밤이 스쳐간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공간 중에 손꼽는 '극장'과 '서점'은 그렇게 어린 나의 고향이었다. 단성사 옆에는 만두랑 칼국수를 파는 교자집이 있었는데 어린 나에겐 최고의 외식 장소였다. 피카디리극장 조금 안쪽에는 초동교회(아직 있는지 모르겠다)가 있었고 그 안에는 유치원이 있었다. 나는 초동 교회에서 하는 초동유치원을 나오고 중학교 때는 초동교회 안에 있는 독서실에서 공부도 하고 그랬다. 가족이 처음 외식을 했던 곳도 당시로서는 엄청 고급스러웠던 레스토랑도 피키디리 극장 바로 옆에 있던 에스엠이었다.


동네 안에서 뱅글뱅글 돌던 어린 시절이지만 그 동네가 종로였기 때문에 내 어린 시절, 고향의 기억을 떠올리면 전원일기  음악 말고 시티팝 장르의 BGM이 흐른다. 어쩔 수 없다. 장면 장면이 시끄럽고 소란하고 빠르고 다양하고 활기 넘쳐흐르는 그야말로 '시티' 이기 때문이다. 숨바꼭질 같은 놀이를 하지 않아도 골목을 조금만 벗어나서 그냥 뛰어만 다녀도 영화 속으로 혹은 드라마 속으로 지금이라면 넷플릭스 속으로 뛰어든 것 처럼 온통 새로운 것들이 넘쳐났다.





어느 겨울밤, 반짝반짝 영롱한 보석들이 골목 바깥 세상, 큰 도로에 가득했다.

친구들과 뛰어다니다 대로변까지 나오게 되었는데 하늘에서 보석을 쏟아부었는지 거리에 투명하고 반짝이는 보석이 가득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 광경에 놀라 멈춰서서 입만 쩍 벌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보석을 가까이 가서 만져 본다던지 하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직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저게 아마 다이아몬드라는 게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다.  엄지 손가락 만한 다이아몬드가 2차선 도로 가득 떨어져 있다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던 꼬마였으니 할 수 있는 생각이었겠지만. 어쩐지 무시무시한 다이아몬드라고 추정하는 바람에 다가가거나 만져볼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중에 첫 밤바다를 보고 하얀 파도가 넘실대며 다가올 때 그 밤, 그 거리의 다이아몬드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쯤엔 그게 다이아몬드가 아니고 교통사고로 박살난 차의 유리창 파편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였다. 그래도 그때는 살짝만 만져도 피가 철철 나게 될 위험한 것이였지만 어린 내 눈에는 그저 반짝반짝 아니 번쩍번쩍, 종로 거리의 네온 사인과 함께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도심에서 자란 아이의 추억의 단상으로 이보다 근사할 수 있을까 싶은 위태롭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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