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우리 '우리' 이야기 (2)
"한밤중에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는데 결국 신장염으로 입원해서 2주간 있었어.
처음에 의사는 이틀에서 삼일 정도면 된다고 했는데 말이야."
어린 시절의 입원기를 덤덤히 이야기했다. 친구들에게 흔치 않은 꽤 드라마틱한 뭐 그런 류의 무용담이랄까? 적당히 따뜻하고 맑은 봄날 한강 둔치였다. 오랜만에 만난 '예쁜 딸을 키우고 있는 친구'와 수다 중이었다. 친구는 가녀린 체구를 갖고 있지만 단단한 성품을 가졌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엄마에게 둘 도 없이 든든한 맏딸이고 남동생 둘을 살뜰히 챙기는 요새말로 K장녀 같은 친구였다. 그리고 현재 알뜰살뜰 딸을 키워내는
엄마였다.
"어린애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그랬을까?"라고 안타깝게 이야기했다. 지금은 엄마인 친구가.
한밤중의 응급실도, 신장염도 나에겐 무용담이기만 했는데, 어린 내가 몰아치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결하기는커녕 알아차리지도 못해서 몸에 병이 난 것이라는 방향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엄마가 된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바로 알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엄마 아빠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많이 싸울 때였고 급기야 이혼을 하던 바로 그때였다. 몸은 고장이 나서 입원했지만, 처음 예고된 입원기간 이틀을 훌쩍 넘기고 일주일이 넘게 퇴원을 못 했던 그때도 나는 잘 웃었고 퇴원 후 163? 164 정도의 키(초 5였다)에 39킬로를 찍어 친구들에게 귀신이라는 별명이 잠깐 붙었었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하는 새로운 경험이 생긴 것도 친구들에게 없는 나만 겪어본 일이라서 모험을 해본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그때는 싸우는 엄마 아빠가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당사자인 두 사람의 갈등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되는 것 같아서 그게 좀 부끄러웠을 뿐이다. 어린 나의 병치레는 엄마 아빠를 충분히 놀라게 했고 끙끙대며 아파할 때는 대신 아프고 싶다고 안쓰러워했지만 그래도 그 소동이 엄마 아빠를 화해시키긴 역부족이었다.
벌어질 일들을 하나도 막지는 못했으니까.
우리 ‘우리’는 2017년 11월에 우리집으로 왔다. 2018년에 심장병인 걸 알게 되었고 2019년 6월에 강아지별로 갔으니까 그 시간은 내 인생에서는 그저 찰나이다. 하지만 한용운 시인이 말하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내가 온전히 책임지고 기른 첫 강아지, 똑똑하고 의젓한, 아픈 우리 ‘우리’는 날카롭다 못해 찢어지는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자극을 받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너무 덥거나 너무 추울 때는 산책도 피하는 게 좋고
너무 큰 소리, 지나친 장난도 피하셔야 합니다."
라고 분명히 의사가 말했는데 우리 강아지가 아픈 시절, 그러면 안 되는데 나와 남편은 종종 싸웠다. 성격이 불같은 남편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참지 않고 같이 악을 썼다. 나 뿐 아니라 남편도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우리는 스트레스와 슬픔에 무너지는 그냥, 아직 철도 심하게 없는 부족한 인간이었다.
'우리'가 오고, 그 까만 눈을 보는 것만으로, 나아가 함께 산책하고 함께 먹고 자고 여행하면서 집안에 웃음이 둥둥 떠다니는 날들, 치유와 힐링의 시간이 계속된다 안심했었다. 하지만 마치 삼재라도 되는 듯, 그때는 계속 시련을 받아야 하는 시기였나 보다. 우리를 비롯해서 많은 강아지를 구조하고 보호하던 '케어'에서는 분명히 건강검진을 했고 아주 건강하다고 했었는데 그렇게 튼튼하고 활기찬 강아지가 어떻게 그렇게 아플 수가 있는지, 그리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슬프고 화가 나고 혼란스러웠다.
강아지는 아파도 아픈 티를 내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앓던 심장병은 기침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기침을 심하게 한다는 정도? 그래서 함께 있는 동안 아픈 우리를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일보다는 병원에 갈 때마다의 영수증이 더 가시적인 시련이었다. 어릴 때부터 쭉 강아지를 키워왔지만 그 애들은 참 건강하기도 했다. 강아지 키우면 다 돈이다라는 체감을 못하고 개들과 살아왔는데 우리'우리'를 키우면서 동물병원비의 사이즈를 제대로 체감하게 되었다. 갈 때마다 적게는 50만 원, 많게는 200만원 130 160 80, 말이 그렇지 2주에 한 번은 그런 식으로 병원비가 나가니까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현실적인 고통에 남편과 나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고 말 한다미만 곱지 않아도 고깝게 받아들였다.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맞이했던 강이지 입양이 더 큰 고통으로 돌아오게 될지는 알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큰 소리도 안 좋다고 했는데 소리 높여 다투게 되고 그렇게 다투게 되는 게 '우리'에게 미안하고 미안한 만큼 남편이 미워서 더 다투게 되었다. 우리가 오기 전 오랜 투병 후 돌아가신 것 부터 시작해서 모든 나쁜 일들이 손에 손을 잡고 표정 없이 둥글게 둥글게라도 하는 듯 했다. 그 안에 갖혀서 숨이 막혔다.
한 번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우리'를 안고 나갔다. 그럼 천천히 다정하게 쓰다듬고 좋아하는 산책로를 걷다 오면 될 것을 '우리'를 안고 참을 수 없이 울음을 토해냈다. 의젖한 '우리'는 꼬리를 흔들고 눈을 맞춰주고 내 손을 핥아주면서 명랑하게 나를 위로해 주었다. 자기 심장이 어떤지는 상관도 없는지 그저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썼다. 지금 남편과 내가 내는 날카로운 큰 소리가 얼마나 자기를 아프게 하는지 모르고 말이다.
너그럽고 사랑이 많은 우리'우리'는 그렇게 서투른 엄마아빠를 끝까지 사랑하다가 갔다. 2019년 1월에 아무래도 아이가 상태가 안 좋아서 24시간 진료를 보는 청담동의 병원을 갔는데 지금 당장 숨이 멎는다 해도 전혀 이상한 상태가 아니라고 했다. 며칠을 입원해 있는 동안 매일 병문안을 갔다. 병원에서는 잠을 안 잔다고 했는데 우리가 가자마자 남편과 내 사이에서 '우리'는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똥도 안 싼다고 해서 병문안 간 중 허락받고 잠깐 산책을 시켰는데 근처 나무 아래 바로 예쁜 똥을 싸주었다. 그런 '우리'라서 급한 위기만 넘기고 집으로 데려왔다. '우리' 옆에서 함께 자면서 약 먹이고 재우고 며칠이 지나니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었다. 날이 따뜻해지고 점점 더 활기를 찾은 '우리'는 봄이 오자 올림픽공원을 활보하며 제일 활력 넘치던 때처럼 장난도 치고 예쁘게 놀았다. 6월의 어느 날 1시간 반을 올림픽공원을 구석구석 다 돌고 지나가는 친구들에게 장난도 다 걸고 에너자이저처럼 신나게 놀고 들어와서는 강아지별로 떠났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강렬하게 엄마 체험을 한 시간이었다. 너무 사랑하고 너무 행복하고 그래서 너무 마음 아팠던 시간들. 함께 하는 동안 후회되는 것들이 사무쳐서 '우리'가 떠나고 오랫동안 후회만 했던 거 같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떠나기 전 그 활기 넘쳤던 마지막 산책에서의 신나는 우리의 모습, 그게 '우리'가 나에게 또 남편에게 주는 메시지겠거니 생각한다. '우리'도 그래도 보호소의 장에서보다는 진심으로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겠지. 우리 부부가 저지른 많은 실수들을 그렇게 스스로 그럴 수도 있지,라고 면죄하려고 하는데 딱 하나 '우리' 앞에서 큰 소리로 다툰 그 몇 번의 시간들은 면죄가 되지 않는다. 왜 자제하지 못했을까?
엄마라도 아빠라도 사람이다. 본능적으로 사랑하겠지만 부모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그냥 여자고 남자고 혈기도 왕성한 청춘이고 말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 같은 강아지라도 결국, 타인이다. 지금 내가 내 문제로 괴로울 때 내 인생이 처참할 때, 현실적인 고통에 빠져들 때, 자식도 결국 남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힘들어서 자식을 대함에 후회가 있다면 주었던 상처가 오히려 부모의 마음에 더 깊게 남을지도 모른다. 우리'우리'를 너무 사랑했지만 내가 힘들고 아플 땐 참지 못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고 '우리'에게 준 그 상처는 내게 더 깊숙히 남아있다.
아픈 '우리'와 다르게 어린 나는 신장염을 이겨내고 건강하게 잘 컸다. 밝고 씩씩하게, 물론 어두운 부분도 있지만 너무 빠져들지 않고 낮잠이라도 푹 자고 일어나면 툴툴 털어지는 리프레시되는 성격으로 자랐다.
어린 시절의 시련은 잘 이겨내니 영혼의 영양제처럼 내게 남았다. 우리'우리'는 심장병을 이겨내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신나는 산책의 기운 그대로 강아지별에서 뛰어놀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