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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희 Nov 13. 2023

날리던 털만큼 웃음이 흔하던 시절

나의 사랑하는 우리, '우리' 이야기 (1)

"얘는 지금 심장병을 앓고 있어요. 자극을 받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

의사는 아직 작은 '우리'의 심장이 작은 자극에도 멎을 수 있다고 했다.

오늘, 혹은 내일 갑자기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너무 빠르게 달려도 너무 뜨겁거나 너무 추운 날씨도 강아지 '우리' 에겐 안 좋다고 했다.

특히 감정적으로 굉장히 동요하는 아이이기 때문에 놀라게 하거나 큰 소리를 내는 것도 위험하다고 했다.

안정 안정 안정이 최우선이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 집 강아지의 이름입니다. 고유명사 우리와 헷갈릴 수 있으니 강아지 '우리'는 이렇게 작은따옴표를 얹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처음 만난 건 유기견을 구조하는 자선단체의 홈페이지에서였다. 

복슬거리고 새까만 털을 가진, 눈이 동그랗고 귀여운 우리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아이를 입양하겠다는 절절한 의지를 담아 정성껏 쓴 입양신청서를 보고 센터는 바로 수락했고 우리와 가족이 될 수 있었다. 새까만 털이 너무 귀여워서 '우주'라고 부를까 했는데 남편은 '우리'라고 제안했고 듣는 순간 딱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그때부터 바로 우리라고 불렀다. 순하디 순한 우리를 처음 만나러 동물보호센터에 간 날이 생생하다. 유기견 보호센터들 마다 시스템이 조금씩 다를 텐데 충무로에 있던 그곳은 2층으로 된 장이 짜져 있었고 한 칸마다

한 마리의 개가 있었다. 많이 좁지는 않았고 뜬장처럼 바닥 구멍이 숭숭 뚫린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열악한 것은 맞았다.


센터에 문을 여는 순간 그 안에 있는 열댓 마리의 강아지들이 일제히 왕왕 멍멍 월월 짖어댄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홈페이지에서 본 '우리'를 바로 알아봤다. 입양을 신청하고 센터를 찾아가면 우선 서로 탐색하라는 의미인지 함께 산책을 다녀오라고 한다. 하네스를 단단히 하고 '우리'와 근처 장충단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처음 본 낯선 사람들과의 산책이라 우리는 아무 감정 표현은 없었지만 길을 기가 막히게 알아서 안내했고 횡단보도 앞에서는 빨간불에는 멈춰 서고 기다렸다가 파란불에 건너가는 장기를 뿜어냈다. 산책 중에 잠깐 쉬면서 '우리는 가족이 될 거야, 센터에서 허가하는 대로 바로 데리러 올 거야. 오랫동안 지켜봐 왔어. 함께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등등 댓 구 없는 '우리'에게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 쓰다듬었다. 그리고 원래 2주 후에 입양이 가능한데, 이미 결정이 났다면 하루라도 더 일찍 데리고 오면 안 되겠냐, 이미 가족이라고 생각하니 그런 열악한 환경에 있는 것이 너무 속상하다 졸라서 10일쯤 되었을 때 다시 우리를 데리러 갔다. 한 열흘 후쯤 '우리'와 우리는 재회를 했다. '우리'는 우리와 잠깐 산책을 했을 뿐인데 다시 센터에 들어갔을 때 역시나 모든 강아지들이 소란스레 짖어대는 와중에도 장안에서 똑바로 일어서서 짖지도 않고 눈도 감빡이지 않은 채 나를 쳐다봤었다.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때 가족이 될 거라고 했던 그 사람이다, 따뜻하게 만져주던 그 사람이다!"

 하고 알아본 것 같았다.



그때부터 '우리'와 함께 지내는 동안 (강아지 산책이라는 것을 시작한 사람들은 누구나 알겠지만) 계절이 새로웠다. 아파트 단지 내 산책길 돌멩이 하나까지 그렇게 펄떡거리는 생명 같았다. '우리'는 산책을 너무 좋아하는 강아지였고 다리는 축구선수처럼 튼튼한 강아지였다. 산책을 하다가 계단이 나오면 신나게 뛰어오르는 씩씩한 개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랑 산책을 나가고 일하다 졸리면 또 산책을 가고 저녁을 먹고 또 산책을 갔다. 잠들기 전에는 잠깐이라도 또 같이 걸었다. 함께 여행도 가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노래를 불러주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싫어하는 것은 안 하고 좋아하는 걸 해주려고 애쓰는 동안 우리는 말이 통하는 사이처럼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엔 의젓하기가 동네 서당 훈장님 같더니 언젠가부터 까불이 막둥이가 되어서 아빠한테 점프! 엄마한테 점프! 뛰고 부딪히고 장난을 걸어왔다.

강아지를 안 키워 본 사람은 오버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식을 낳아 기르는 마음이 이런 건가보다 싶었다.

늦잠도 못 자고 장마에도 혹한에도 폭염에도 몇 번씩 산책을 가고 목욕을 시키고 매일 밤 양치를 시키고 병원에 다녔다. 귀찮고 돈도 많이 들었지만 그 생명을 사랑한다는 게, 지극한 사랑을 받는다는 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집에 날리던 털만큼 웃음이 흔하던 그런 때였다.


뿐인가? '우리'와 함께 밤낮없이 싸돌아다니면서 지금까지 모르던 세상에 눈을 떴다. 아스팔트 사이사이에 이름도 모르는 잡초들이 어쩌면 그렇게 많은지, 어떤 풀들은 자기들끼리 제국이라도 지은 듯 왕성했다. 이끼도 땅에 있는 것, 벽에 있는 것, 숲에 있는 것 도시에 있는 것이 다 빛깔이 달랐다. 동틀 때의 청명함, 해 질 녘의 먹먹함이 뒤섞인 하늘은 마치 서로 다른 것인 양했고, 여름의 냄새 겨울의 냄새뿐 아니라 봄과 가을의 냄새도 사뭇 달랐다. 생명이 넘치는 숲에는 그 기운찬 생명력만큼 벌레들도 많았다. 그런데 '우리'와 함께 걸을 때는 벌레고 곤충이고 질색팔색 경기하던 나 말고 그들을 또 다른 생명으로 존중하는 조금은 더 의젓한 내가 되었다. 사람 아닌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동물 아닌 생명이라고 혐오가 될까? 풀밭만 걸어도 풀의 생명이

귀해서 까치발로 지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를 성장시켰다.


인생의 희로애락에서 '희'를 떠올리면 여러 장면이 스쳐가지만 우리 '우리'와 산책하다가 '우리'가 시원하게  배변을 할 때면 그게 뭐라고 그렇게 기분이 째지던 그런 작고 하찮은 기쁨들이 생각난다. 똥도 잘 싸는 우리 '우리', 그런 너를 자유롭게 신나게 해 줄 수 있는 '나'라는  성취감이 대단했다. 아마 우리 엄마도 나를 그렇게 키웠겠지. 세상에 모든 부모가 아이를 그렇게 키워내겠지, 알 것도 같던 그런 날들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기쁨은 3년 넘게 투병 생활을 하시다가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나, 그리고 무엇보다 더 큰 슬픔이 남았을 남편의 텅빈 마음을 채우려는 욕심으로 시작된 일인데, 텅비었던 마음은 '우리'의 꼬리와 털로, 사랑으로 가득차다 못해 넘쳐 흘렀다. 좌우로 메트로놈처럼 흔들어 재끼던 꼬리를 보던 그 순간만큼은 잡음 없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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